음악극 <섬: 1933~2019>(이하 <섬>)가 2019년 초연 이후 5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섬>은 평생을 한센인을 위해 헌신한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1930년대와 1960년대 억압받던 한센인의 삶과 ‘장애도’라는 섬에 갇혀 살아가는 2019년 발달장애 아동 가족의 사연을 교차하며 풀어내어 우리 삶 속에 여전히 만연한 편견과 차별 문제를 꼬집는 작품이다.
<섬>은 목소리 프로젝트의 두 번째 작품이다. 박소영 연출가, 이선영 작곡가, 장우성 작가가 힘을 합친 목소리 프로젝트는 사회에 귀감이 되는 삶을 살았던 실존 인물을 재조명해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프로젝트다. 2017년 음악극 <태일>에 이어 2019년 <섬>, 2023년 <백인당 태영>을 선보였다. <섬>이 초연된 2019년 이후 5년이 흐른 지금, 이 작품은 현재의 관객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까? 박소영 연출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섬: 1933~2019>(이하 <섬>)이 5년 만에 다시 관객을 만나고 있어요. 초연 당시에도 호평 받았던 작품이기에 재 공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오랜만에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솔직히 말하면 저는 다시는 <섬>을 공연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초연 공연이 끝나고 저희 작품을 좋게 봐주신 제작사 몇 군데에서 계약 제안이 들어왔는데, 각기 다른 현실적인 이유들로 인해 계약이 성사되지 못했거든요. 많은 분이 관심을 가져 주시지만 쉽게 무대에 올릴 수 있는 공연은 아니구나, 그럼 다시는 이 공연을 하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죠.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와중에, <섬> 초연을 함께 했던 PD님과 대화를 나누게 됐어요. PD님이 그동안 했던 작품 중에 다시 하고 싶은 작품이 있냐고 물어보시길래 바로 <섬>이라고 대답했어요. 이 이야기가 아직은 유효하다고 생각한다고요. 그렇게 PD님이 현 제작사(라이브러리컴퍼니)를 통해 <섬> 제작을 추진했고, 감사하게도 국립정동극장 측에서 협업 제안을 흔쾌히 수락해 주신 덕분에 다시 공연을 올릴 수 있었어요.
오랜만에 공연되는 만큼, 재연을 선보이게 된 소감이 남다르겠네요.
재연을 올릴 수 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감격스러운 마음이 당연히 가장 컸지만 두려운 마음도 들었어요. 무대에 오르는 12명의 합을 만들어 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섬>의 음악은 합창이 주를 이뤄요. 개인의 목소리를 뽐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의 목소리를 전해야 하는 이야기니까요. 그래서 배우 개개인의 목소리가 튀지 않게, 하나의 목소리로 들릴 수 있게 맞춰가는 과정에 오랜 시간을 들여요. 합창뿐만 아니라, <섬>은 굉장히 많은 약속으로 묶인 작품이라서 연습 과정이 녹록지 않아요. 초연 당시 연습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문득 떠올라서, 그 지난한 과정을 다시 거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 두려웠어요.
이번 시즌을 앞두고 초연 연습 과정이 많이 떠올랐겠어요. 초연을 준비하던 순간들을 돌아보면 어떤 감정이 드나요.
우선, 초연을 함께해준 배우들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어요. 그때 배우들을 정말 많이 고생시켰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렇게까지 했지?’ 싶을 정도로요. 하루는 소록도 워크숍을 다녀왔어요. 왕복 10시간은 걸렸을 거예요. 서울로 돌아오니까 밤 12시가 다 됐더라고요. 하루 정도 쉴 법 한데, 다음날 연습을 평소대로 오전 10시에 시작했어요. 연습을 하루라도 빠지면 안 될 것 같았거든요. 처절하고, 절박하고, 힘든 상황에 놓인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우리의 태도가 쉽고, 가벼우면 안 되잖아요. 그들의 이야기를 단순히 아름답고 멋있게 표현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다가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매 장면 수십 번씩 고민했죠. 고민의 결과물을 반영하기 위해 장면 수정도 많았고요. 그래서 배우 입장에서는 정말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이번 시즌을 앞두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던 이유 중 하나도 배우들에게 이 어려움을 다시 한번 안겨줘야 한다는 점이었어요. 그런데도 이렇게 힘든 과정을 초, 재연 배우 모두 행복한 마음으로 임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5년이란 시간이 흐른 만큼 연출가로서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변화가 생겼을 듯한데요. 이번 시즌에 가장 마음 깊이 다가오는 키워드는 무엇인가요.
‘연대’라는 키워드가 유독 크게 다가오더라고요. 지난 시즌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거’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노력할 때 내 곁에서 손 내밀어 주는 누군가, 날 바라봐 주는 누군가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마리안느와 마가렛도 힘든 사람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고, 그들의 곁을 묵묵히 지켜준 분들이잖아요. 이처럼 주변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연대한다면 세상이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할 거라고 믿어요.
초연을 선보인 2019년 이후 5년이나 흘렀지만, 사회에는 차별과 편견이 만연해요. 지난 5년간 우리 사회는 어떤 방향으로 걸어왔다고 생각하시나요?
안타깝지만, 5년 전에 비해 현실이 더 나아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저희가 이 작품을 다시 준비할 때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이 ‘이 이야기가 아직 필요한가?’ 였는데, 긴 고민을 거치지 않고도 ‘그렇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거든요. 공연의 마지막 장면에 수선과 지선이 대화를 나눠요. 수선이 지선에게 계속하면 된다고, 해도 안 되면 또 하면 된다고 말해주죠. 그 대화가 저희의 답이 되어준 것 같아요. 이 작품이 아직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이상, 저희의 몫은 계속해서 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한 사람이라도 더 이 이야기를 자신의 삶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차별과 편견의 시대에 <섬>이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길 바라시나요.
작품이 지닌 메시지가 워낙 뚜렷하다 보니 연출가인 저까지 어떤 메시지를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마음을 남기되 강요하지는 말자, 질문은 던지되 답까지 남기려고 하지는 말자는 생각으로 작품을 만들어 갔어요. 뭐가 선이고 뭐가 악인지 날카롭게 선을 그을 수 없는 게 인생이잖아요. 그저 관객이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대답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작품이길 바랐어요.
목소리 프로젝트의 세 번째 작품인 <백인당 태영> 공연을 선보이면서 ‘목소리 프로젝트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고 밝힌 바 있잖아요. 목소리 프로젝트는 추후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나요?
사실 목소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저희 셋(박소영 연출가, 이선영 작곡가, 장우성 작가)이 작품 제작에 필요한 모든 부분을 해결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첫 작품인 <태일>을 준비하면서 여러모로 힘들었는데, 그때 감사하게도 우란문화재단에서 먼저 기회를 주셨어요. 목소리 프로젝트 3탄까지 만들어 보자고요. 그래서 <섬>과 <백인당 태영>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죠. 올 연말에 ‘목소리 프로젝트 음악회’도 준비 중인데, 이 역시 우란문화재단에서 아쉬운 마음을 담아 마지막 자리를 마련해 주신 거예요. 네 번째 작품을 준비하려면 처음 <태일> 공연을 올리던 때처럼 다시 저희 셋이 주도적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모두가 각자의 일로 바쁘다 보니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쉽지 않더라고요. 특히 목소리 프로젝트는 한 인물의 삶을 다루다 보니 신경 써야 할 부분도 많고, 조심스러운 부분도 많거든요. 하지만 네 번째 작품에 대한 가능성은 언제든 열어두고 있어요. 저희가 전달하고 싶은 목소리를 발견하면, 새로운 작업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