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여성의 날 특집_<나라는 이야기>
역사 속에서 잊히고 지워졌던 여성들. 그들의 이야기가 무대 위에서 다시 펼쳐집니다. 우리가 몰랐던 여성의 삶을 끄집어내고,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뮤지컬 <홍련> 공연 장면. 사진: 마틴엔터테인먼트
지난해에도 뮤지컬 무대에서 여성 인물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시카고>와 <리지> 같은 라이선스 뮤지컬뿐 아니라 <브론테>, <난설>, <다시, 봄>, <유진과 유진> 등 한국 창작 뮤지컬도 관객의 호응에 힘입어 재공연됐다. 올해에도 <라흐 헤스트>, <프리다>, <마리 퀴리>, <레드북> 등 레퍼토리화 된 작품들이 대기 중이다. 이러한 가운데 창작 초연작들 또한 완성도와 실험성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보였다. 지난해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 <여기, 피화당>, <파과>, <카르밀라>, <접변>, <홍련> 등에 이어, 올해 2월에는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이 호평 속에 막을 내렸다.
여성 서사 뮤지컬이 호응을 얻는 현상 자체가 새롭지는 않다. 강남역 살인사건, 미투 운동, 백래시 등을 겪으면서 한국 영화, 드라마, 연극 등 서사 장르들이 새로운 젠더 감수성을 장착해 왔다. 한국 뮤지컬 또한 이러한 흐름 속에서 여성 인물들의 삶에 진중하게 다가가는 중이다. 여성 서사를 가늠하는 데 활용되고 있는 벡델 테스트, 스핑크스 테스트, 마코 모리 테스트 등의 기준에 모든 작품이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테스트들이 공통으로 제안하는 것처럼, 극 중 여성이 남성 서사를 기능적으로 돕거나 소모되지 않고 자신만의 이야기와 관계를 주체적으로 만들어나간다는 것이 관건이다. 또한, 페미니즘이 학제 간 연구를 통해 학문의 지평을 넓혀 왔듯, 뮤지컬 역시 다양한 소재와 장르, 그리고 스타일로 여성의 복잡다단한 삶의 모습과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하기 시작했다.
장르물과 새로운 스타일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는 키키의 심리치료 과정을 토크 콘서트 형식으로 보여준다. 원작 소설 『키라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의 작가인 키라 밴 겔더뿐 아니라 작·연출자인 조윤지의 경험을 통해 당사자성을 담았고, 나아가 젠더 프리 캐스팅으로 경계를 확장했다. 구병모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 <파과>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한국형 하드보일드 여성 느와르 뮤지컬’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했다. 도시적이고 어두우며 차가운 미장센, 중년의 차지연과 구원영이 여성 킬러로서 대극장을 누비며 소화해 낸 고난도 액션, 변화무쌍하게 인물들의 감정선을 반영한 음악이 유기적인 조화를 이뤘다. 여성 흡혈귀라는 진귀한 소재를 다룬 <카르밀라>는 아일랜드 작가 조지프 셰리든 르 파누의 19세기 말 소설이 원작이다. 그런 만큼 시대적 배경을 살려서 고딕 특유의 으스스한 성과 웅장한 단조 음악을 기본으로 깔았다. 여기에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멜로디를 아이러니하게 결합시켜서 소외되고 고립된 인물들의 쓸쓸한 감성을 표현했다. <접변>은 중국 라이선스 뮤지컬이지만 한국의 네버엔딩스토리가 공동제작하고 한국 소극장 무대에 맞게 각색되어 대학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작품이다. 1930년대 중국 상하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역사극이며, 미스터리 추리극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잡지사 기자가 홍콩의 저명한 가수의 실종을 파헤치는 가운데 밝혀지는 정치적인 상황과 두 여인의 비밀스러운 우정이 서스펜스 넘치는 드라마를 형성했다.
뮤지컬 <라흐 헤스트> 공연 장면. 사진: 홍컴퍼니
여전히 뜨거운, 역사 속 여성 인물 열전
작품 수로 보면 여성 서사 중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압도적이다. ‘예술가의 고뇌’조차 대놓고 누릴 수 없는 타자로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성 예술가들의 모습이 보석처럼 반짝이며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난설>과 <여기, 피화당>은 역사적 사실과 허구적 플롯을 교묘하게 엮어서, 주인공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을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그려냈다. <난설>에서 천재적인 글재주를 지닌 허난설헌이 날개를 펼칠 수 없는 상황은 끝단이라는 소녀를 비롯한 약자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맞물린다. <여기, 피화당>에서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공녀로 끌려갔다가 돌아와 편견에 시달리던 매화와 가은비의 글(『박씨전』으로 설정)이 엄청난 이슈몰이를 한다.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풍자를 지배계층의 부조리와 엮어서 거침없이 써내려갔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연대가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잠재력을 형성하는 모습이다.
이처럼 여성들이 숨어서 글을 쓰는 현실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레드북>과 <브론테>를 떠올리게 한다. 안나와 브론테 자매들 역시 여성 작가라는 이유로 매서운 사회적 시선을 온몸으로 견디며 내적 성장을 보여준다. 전자가 정통 뮤지컬 코미디 형식으로 기존의 고정관념을 발랄하게 전복했다면, 후자는 미래에서 온 편지라는 설정을 통해 미스터리 장르의 요소를 가미했다. 전자에서는 ‘여성문학회’에서 펼쳐지는 도발적인 이야기들이 희극적인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고, 후자에서의 편지는 마치 운명을 좌우하는 신탁과 같이 주인공 샬롯의 내적 갈등을 강조하며 극적 재미를 배가시킨다.
<라흐 헤스트>, <프리다>의 경우에는 한국의 수필가이자 미술평론가인 변동림(김향안)과 스페인의 화가 프리다 칼로의 불꽃 같은 삶을 새롭게 조명했다. 얼핏 남성들과의 관계가 이들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로맨스는 두 여성의 플롯을 점령하지 못했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하고 스스로에게 다가서는 발걸음에 도움을 주는 기능을 했을 뿐.
그런가 하면, 지난해 웨스트 엔드에 진출한 <마리 퀴리>는 여성 천재 과학자의 치열하고 외로운 여정을 보여준 작품이다. 폴란드인이며 여성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과학계에서 배척당한 그녀는 스스로 빛을 내는 라듐에 자신을 투영한다. 그런데 이 라듐은 프로메테우스의 불처럼 유용하면서도 위험한 양날의 검이었다. 폴란드인 여성 노동자 안느와의 우정이 그녀를 일깨운다. 이후 방사능 피폭의 위험에도 목숨을 걸고 실험하는 마리의 모습은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 고전 비극의 주인공처럼 숭고미를 느끼게 한다. 7인조 밴드의 감성적이면서도 기하학적인 음악은 마리의 심리와 실험 과정을 정교하게 표현한다.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 공연 장면. 사진: 라이브
서로를 살리는 우정과 연대
이제 뮤지컬에서 여성들의 우정인 ‘시스맨스’가 뿜어내는 매력이 ‘브로맨스’ 못지않다. 앞서 <여기, 피화당>에서 여성들의 연대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정동을 형성한 것처럼, 이들의 우정은 서로를 살리며 좀 더 나은 삶과 세상을 향한 에너지를 만들어내곤 한다. 중학생부터 할머니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이금이 작가의 소설을 무대화한 <유진과 유진>은 어린 시절 유치원 원장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소녀들이 서로를 보듬으며 트라우마를 이겨나가는 과정을 담았다. 현악기와 건반악기 중심으로 연주되는 수채화처럼 맑은 음악은 이들의 여리고 섬세한 감성을 대변하는 것 같다. <다시, 봄>에서는 중년이 된 일곱 친구가 함께 여행을 가던 중에 버스가 고장 나면서 판타지 세계로 빠져든다. 난데없이 나타난 저승사자가 딱 한 명만 데려가겠다고 선언하자, 인물들은 각자의 삶을 돌아보며 노래한다. <캣츠>의 럼 텀 터거를 오마주한 듯한 로큰롤 음악으로 가슴에 맺힌 것을 시원하게 발산하기도 한다. 예기치 못한 계기로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사연을 알게 된 친구들이 서로를 다독이는 모습은 관객들에게도 따뜻한 위로를 전한다.
<홍련>과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우정과 연대를 통한 치유의 과정을 독창적인 형식으로 보여준다. <홍련>에서 홍련은 자기 비난의 자포자기 상태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충분히 애도하지 못하면 이를 무의식으로 억압하게 되고, 스스로에게 분노와 비난을 돌리는 멜랑콜리 상태에 빠지게 된다고 했다. 홍련은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무서워서 언니인 장화가 당하는 학대와 죽음을 목격하고도 슬픔을 안으로 삭일 수밖에 없었다. 몽환적이면서 반복적인 멜로디는 자신 안에 함몰되어가는 그녀를 잘 표현한다. 이러한 홍련의 내면을 재판이라는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 참으로 탁월한 아이디어다. 바리는 재판관이기도 하지만 씻김을 통해 홍련의 혼백을 구원하려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런데 바리 역시 자신은 그 대상에서 쏙 빼놓은 상태다. 이러한 두 사람은 서로의 내면 깊은 곳에 소외되고 상처 입은 채 울고 있는 소녀를 감싸 안으며 애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슬픔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나의 과거, 그리고 “내가 나를 소외시켰던 삶의 부분들”1) 에 대한 애도가 필요하다.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김재환 영화감독의 다큐멘터리 <칠곡 가시나들>과 에세이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을 바탕으로 창작되었다. 영란, 춘심, 인순, 분한 할머니들은 팔복리 문해학교에서 늦깎이 학생으로서 한글을 배운다. 딸이기 때문에, 시집살이하고 애 키우느라 등등의 이유로 이름 석 자도 쓸 줄 모르는 채 80년 혹은 90년의 세월을 지나왔다. 그러한 할머니들에게 시 창작은 못다 이룬 소녀 시절의 꿈을 되찾는 치유의 행위이다. 이들은 일상의 곳곳에 “천지 삐까리”로 “널려 있는” 시들을 찾아내며 10대 소녀들처럼 까르르 즐겁게 웃는다. 죽음조차도 설렘의 대상으로 삼아 시 속에 녹인다. 이 모든 것이 노년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고 있는 친구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뮤지컬 <하트셉수트> 캐릭터 포스터. 사진: 글림컴퍼니
올해에도 여성 서사 창작뮤지컬
이처럼 소재뿐 아니라 장르와 스타일이 다양화되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여성들의 삶을 다층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관건은 생동감과 진정성을 담으면서 어떻게 정교한 완성도를 갖추는가 하는 점이다. 미학적인 실험과 모험도 필요해 보인다. 상업적인 흥행이 곧 성공이라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동시대를 반영하며 장르의 경계를 넓히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뛰어난 창작진 제작진, 그리고 배우들의 약진을 더욱 기대하게 된다.
올해에도 <하트셉수트>, <삼색도>, <인화>, <번 더 위치>, <청새치>, < B사감: 악당의 러브레터 > , <하트비트: 심폐소생일지>, <풀 드로우> 등의 다채로운 소재의 창작뮤지컬이 기대를 모으는 중이다. <하트셉수트>는 실존했던 여성 파라오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역사에서 잊힐 뻔했던 그녀의 존재를 입체적으로 복원한다. 그리고 <번 더 위치>는 중세시대와 현재의 마녀사냥에 대해 다룬다. 그러고 보니, 이 두 작품 외에는 네버엔딩플레이에서 개발 중인 작품들이다. 현진건의 동명 소설을 모티브로 하는 < B사감: 악당의 러브레터 >는 일제강점기 여성 기숙사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미스터리이고, <하트비트: 심폐소생일지>는 학폭, 저작권, 심장이식 등 동시대적 소재를 담은 매운맛의 복수극이다.
한편, 요즘 여성 서사 뮤지컬 대부분이 견인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사회적 정의와 정치적 올바름이다. 일상적인 부조리에 대해 국가가 보호해주지도 적절한 대책을 마련해주지도 못하는 가운데, 각자도생해야 하는 절박함이 묻어난다. 피해자를 비난하는 것에 익숙한 사회 속에서 ‘무엇이 폭력인지’ 자각하는 일은 꼭 필요하다. 기존의 왜곡된 여성상을 수정하고 숨겨진 목소리를 드러내는 것이 그러한 작업의 일환일 것이다. 또 다른 영웅적인 여성 신화와 ‘바람직한 여성’의 기준을 만들어내고 얽매이지 않는 것도 중요해 보인다. 그렇게 차이에 기반한 연대와 사랑으로 모든 퀴어함을 환대하며 나아간다면, 여성 서사 뮤지컬이 세상을 조금은 바꿀 수 있지 않을까.
1) 박우정, 『애도의 기술』, 유노라이프, 2023, 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