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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칼럼] <비틀쥬스> 레벨 2가 된 여성들

글 |장경진(공연 칼럼니스트) 사진 |CJ ENM 2026-01-23 160

장경진 공연 칼럼니스트가 더뮤지컬 칼럼을 통해 공연 속 여성 캐릭터를 다각도로 조명합니다.


 

 

불안과 두려움, 슬픔과 공허, 그리고 외로움. 인간이 마주하는 이 보편적인 부정적 감정들을 우리는 어떻게 소화해야 할까. 뮤지컬 <비틀쥬스>는 ‘쇼뮤지컬’이라는 외피 안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작품이다. 뮤지컬은 원작인 동명 영화와 다르게, 묘지에서 시작한다. 죽음이 선언된 후, 이야기는 무대 위 인물들이 죽음과 상실을 어떻게 대하는지 추적에 나선다.

 

리디아와 비틀쥬스는 각자의 이유로 죽음을 부정한다. 비틀쥬스가 산 자와의 계약을 통해 다시 인간이 되기를 희망한다면, 리디아는 엄마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한 채 오히려 그 세계의 일원이 되길 원한다. 이제 갓 사망한 아담과 바바라는 죽음을 계기로, 불안과 회피로 점철되었던 이승 생활 대신 용기와 시도라는 가치에 집중한다. 리디아의 아빠 찰스와 그의 연인 델리아는 부정적 감정을 ‘모른 척’하는 전략을 취한다. 정확히는 감정을 억압하고 보이지 않게 덮어두는 것에 가깝다. 찰스는 아내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하고, 델리아는 과잉된 긍정의 에너지로 현실 위를 부유한다. 이러한 어른들의 방어기제는 리디아의 깊은 슬픔에 공감하지 않는다. <비틀쥬스>는 이 여섯 인물이 일련의 소동을 겪으며 기존의 삶의 방식을 어떻게 전환하는지 보여준다.

 

여전히 검은 의상을 고수하는 리디아는 외견상 가장 죽음에 밀착된 인물처럼 보인다. 그는 ‘엄마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상실 앞에 스스로를 죽음의 세계에 가둔다. 그러나 몇 달째 이어지는 리디아의 애도는 단순한 절망이 아닌, 아빠를 향한 구조신호에 가깝다. 가족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유일하게 공유한 아빠가 그 사실을 외면할 때, 리디아의 고립감은 더욱 깊어진다. “아빠, 나 죽은 거 같애?”라는 질문이나 그가 남기는 유서는 삶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라기보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은 갈망이자 생을 향한 의지로 해석된다.

 

그런 리디아에게 아담과 바바라는 변화의 시작점이 된다. 그는 ‘투명함’에서 비롯되는 감정을 그들과 공유하며 비로소 자신의 외로움을 이해받는다.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리디아는 ‘나만이 세상에서 가장 슬프다’는 자기중심적 우울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아빠가 묻어둔 슬픔을 마주하고 화해한 후, 현실의 삶을 적극적으로 선택한다.

 

반면, 바바라는 평생을 안전한 회피 속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는 언제나 시간이 충분할 것이라는 안일함과 완벽하게 해내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속에서 모든 일을 미뤄왔다. 자신이 빚은 도자기를 “아이”로 칭하는 것으로, 자신의 욕망을 가상의 존재에 투영하며 자신을 보호해왔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시도하지 않는 삶을 선택해온 그가 ‘이제 좀 해볼까’ 결심한 날 사망한다는 설정은, 그의 인생이 얼마나 회피로 점철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저승에서의 바바라는 “까짓것 해보지 뭐”라는 태도로 불안을 통과한다. 미련과 후회를 남기지 않겠다는 다짐은 주춤거리는 남편 아담을 리드하는 동력이 된다. 특히 리디아와의 만남 이후, 회피는 타인과의 연대로 확장된다. 낯설고 이상한 존재로만 치부되던 리디아는 바바라에 의해 “멋지고 용감한 아이”로 새롭게 불린다. 바바라는 리디아의 외로움을 읽어내고 그가 잘못된 방향을 선택할 때 브레이크를 걸며 그의 곁을 지킨다. “많이 힘들 거야. 함께 있어 주자”라는 말과 함께.

 

 

델리아는 고통을 직시하는 대신 ‘치유와 긍정’이라는 필터를 통해 모든 부정적 감정을 삭제한다. 그의 세계에서 슬픔과 우울은 즉각적으로 사라져야만 하는 결점이다. 그는 ‘자기계발 인생멘토’로서 리디아의 곁에 있지만, 공감 대신 긍정적 사고를 통한 빠른 해결을 독촉한다. 그의 과잉 긍정은 때로 타인에게 폭력이 된다.

 

일련의 사건을 겪은 후에도 사실 델리아의 긍정성은 여전하다. 다만, 그는 긍정만으로 모든 상처를 덮을 수 없다는 진실을 받아들인다. 비정형적인 조각, 예측불가한 인테리어, 독특한 스타일링에서 알 수 있듯, 델리아는 자신의 가치관이 뚜렷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사고 회로를 수정한다는 점은 유의미한 변화다. 리디아 역시 델리아를 엄마의 흔적을 지우러 온 침입자가 아닌 슬픔을 함께 나눌 또다른 내 편으로 받아들인다.

 

리디아, 바바라, 델리아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생의 어둠을 통과한다. 리디아는 머물러있던 슬픔에서 나오고, 바바라는 회피했던 두려움을 직면하고, 델리아는 삭제되지 않는 감정의 무게를 깨닫는다. 혼자서 완성한 변화가 아니다. 리디아는 바바라를 통해 함께 애도하는 법을 배웠고, 바바라는 리디아를 통해 과거의 후회로부터 해방됐다. 그리고 델리아는 이들 사이에서 자신의 리듬을 유지하며 관계의 한 축을 담당한다. 결핍이 결핍을 치유하고, 서로의 존중과 연대를 바탕으로 이들은 ‘레벨 2’에 다다른다. <비틀쥬스>는 죽음을 통해 이런 답을 내리는 듯하다. 끊임없이 배우며 궤도를 수정하고 태도를 갱신해나가는 것이 삶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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