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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칼럼] 실명, '너머'를 향해 나아가는 역설

글 |현수정(공연평론가·중앙대 연극학과 겸임교수) 사진 |. 2026-03-31 185

현수정 공연 평론가가 하나의 테마를 정해 뮤지컬을 깊이 있게 들여다 보는 칼럼을 연재합니다. 


 

뮤지컬 <서편제> 공연 장면. 사진=PAGE1

 

최근 상연되었거나 막을 올릴 예정인 뮤지컬들에서 ‘실명 모티프’를 적잖게 발견할 수 있다.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은하철도의 밤>, <초록>, <서편제>, <몽유도원>의 주요 인물들은 선천적 시각장애를 지녔거나 다양한 이유로 시력을 상실한다. 이 작품들이 눈이라는 소재를 통해 전하려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이들이 거의 동시에 상연되고 있는 것은 우연일까.

 

우리가 보는 것은 진실일까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고사성어는 평소 자주 쓰인다. 잘 알려져 있듯이 백 번 듣기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는 뜻이다. ‘Seeing is believing’이라는 영문 속담도 같은 맥락에서 떠올릴 수 있다. 이러한 문구들은 시각이 일상에서 지배적인 감각으로 자리해 왔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이제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확신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AI로 감쪽같이 만들어진 영상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문득 제기해 보고 싶은 질문이 있다. 이전에 우리가 봐 왔던 것들은 과연 진실일까?

 

진실에 대해 철학적으로 논하면 단순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육안은 극히 일부만 인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볼 수 있는 ‘가시광선’의 범위는 매우 제한적이다. 시각을 통한 인식은 또한 상대적이기도 하다. 한 예로 무대 위의 가면이나 인형은 장면과 조명에 따라 천 개의 표정을 보여준다. 관객의 생각과 마음이 어떻게 투영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각적 스토리텔링의 구성에 특히 영향을 주는 것은 욕망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시각에 대해 사유하게 하는 대표적인 고전이다. 오이디푸스는 피하고자 부단히도 애썼던 아폴론의 신탁이 결국 이루어졌음을 깨닫고 스스로 두 눈을 찌른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는 저주와 같은 예언이다. 이때 두 눈의 찢어진 틈새는 베일에 가려 있던 ‘너머’를 보게 한다. 육체의 눈이 허상을 봐 왔다면, 실명을 통해 심안이 열리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는 시각장애를 지녔지만 앞날을 내다보고 신의 목소리를 전하는 인물이다.

 

뮤지컬 <초록> 공연 장면. 사진=북극성

 

초록을 거둬내고 마주한 진실

<초록>에도 욕망과 질투에 시야가 가려진 비극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토마는 아름다운 초록빛 눈을 지녔지만, 1900년대 초반 평안도 해주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 이방인이라는 이유뿐 아니라 초록이 뱃사람들에게는 금기시된다는 점에서 배제되고 차별받는다. 그랬던 그가 상단 객주의 딸인 유희의 따뜻한 응원과 보살핌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은 잠시뿐. 그가 이부동생 영진과 유희 사이를 의심하면서 비극이 싹튼다.

 

인물들의 관계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김동인의 『배따라기』와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바탕으로 한다. 여기서 환기되는 또 하나의 작품이 바로 『오이디푸스 왕』이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살해했듯이 토마는 오해로 인해 동생을 죽음으로 내몬다. 이러한 판단의 오류는 비극에서 고결한 주인공이 몰락하며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요소다.

 

토마는 신분이 낮지만 맑고 기품 있는 성품을 지녔다. 바다와 같은 초록빛 눈은 신성이 묻은 듯 신비롭다. 그런 만큼 그가 무너져가는 모습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토마의 심리적 변화는 추상적 인물인 류인에 의해 추동된다. 류인은 토마의 심리적 억압이 응축되어 빚어진 존재다. 그 속에 유희를 향한 갈망과 영진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뿐 아니라 의붓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죄책감이 녹아 있다. 토마가 그러한 류인을 자신의 눈빛과 닮은 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설정이 흥미롭다.

 

사실 토마는 이전에 자신을 액막이로 희생시키려던 의붓아버지의 목숨을 빼앗게 되었는데, 이러한 부친살해 서사 역시 오이디푸스와의 접점이다. 어쩌면 이는 극의 밑바닥에 조용히 자리한 동력일지도 모르겠다. 영진이 류인뿐 아니라 아버지의 얼굴을 닮아가는 점도 관련해 생각할 수 있다.

 

결국 토마는 자신의 눈을 찌른 후 자아 추방의 길을 떠나고, 심해와 같은 어둠 속에서 진실을 받아들인다. 그가 맞이하는 파국은 극 중 펼쳐지는 낙화놀이와 겹쳐진다. 불꽃들은 열정적이고 아름답지만 처연하게 바닷물 위로 잦아든다. 이는 토마의 서사가 그러하듯, 벗어날 수 없음에도 최선을 다해 운명에 반항하고 선택하는 삶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상징성을 지닌 낙화놀이는 박윤솔 작곡가가 프로그램북에 밝힌 것처럼 한 옥타브로 하강하는 모티프들과 함께 바람에 흩날리는 불꽃들을 그린 듯한 음형으로 섬세하게 표현된다.

 

뮤지컬 <서편제> 공연 장면. 사진=2021 EPITAPH.Corp

 

주어진 어둠, 스스로 찾은 소리

<서편제>에서는 송화가 실명의 고통을 소리로 승화한다. 아버지 유봉은 송화에게 약을 먹여 눈이 멀도록 한다. 그로 인해 형성되는 한을 소리로 승화시키게 하려는 의도다. 원작 소설과 영화가 그러했듯이 뮤지컬에서도 송화의 판소리 넘버는 <심청가>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 대한 복잡하고 다채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송화는 처음에는 자신의 시력을 앗아간 아버지에게 차라리 죽여 달라 소리친다. 그런데 이후 스스로 직성을 따르듯이 소리에 몰두한다. 마치 원래 그렇게 살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아버지의 방식을 거부하며 자신만의 소리를 찾겠다고 떠났던 동생 동호가 찾아와 함께 가자 제안해도 거부한다. 동호는 송화에게 ‘대체 이게 뭐냐’며 울먹이지만, 송화는 “소리하기에는 이게 훨씬 좋다”고 답한다. “그래도 나는 여기 있어야만 하는 걸 알고 있어.” 송화의 넘버인 ‘나의 소리’에는 그녀의 고뇌와 의지가 녹아들어 있다.

 

“한 번씩 뒤돌아볼 때 난 항상 여기 있을게. 잊혀져 가지만 항상 있어 줄게.” 이어지는 가사는 또 다른 상징적 의미를 떠올리게 해준다. 조광화 작가는 유봉의 행동을 “시대 변화에 따른 방어적 기제”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며 서구화되던 당시, 장르를 지키려는 절박함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이다. 송화의 심리 역시 단순하게 파악될 수 없다. 자신에게 말도 안 되는 행동을 저지른 아버지에게 의지하고 순응할 도리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분명 스스로 소리길을 선택하고 지켜나가려는 열정을 보여준다.

 

그런 그녀의 내면이 무대(박동우 무대디자인) 위에 실험적인 수묵담채화로 묘사된다. 여러 겹의 한지를 덧붙여 만든 반투명 막들은 조명과 영상을 부드럽게 머금는다. 정재진 디자이너가 모던하게 풀어낸 한국화 스타일의 영상은 송화의 여정과 감정선을 섬세하게 살린다. 가장 강렬한 이미지로 잔상을 남기는 것은 커튼콜 직전의 장면이다. 커다랗고 다채로운 색감의 수많은 꽃이 고통을 겪은 이후 찬란하게 개화한 송화의 예술적 영혼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공연 장면. 사진=뉴프로덕션

 

“같은 어둠 다른 진실”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는 실명의 의미를 또 다른 방식으로 조명한다. 이 뮤지컬은 스페인의 작가인 안토니오 부예로 바예호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하며, ‘돈 파블로’ 시각장애인 학교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돈 파블로의 부인이자 관리자인 도냐 페피따의 지도에 따라, 학생들은 지팡이 없이 자유롭게 움직이며 자신감 넘치는 생활을 영위해 왔다. 그런데 전학생 이그나시오가 지팡이를 짚고 걸어 들어오면서 균열이 시작된다. 처음에 “불쌍한 장님일 뿐”이라는 자기소개를 농담으로 받아들이던 학생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자 도냐가 총애하는 우등생 카를로스는 학교를 다시 예전처럼 돌려놓으려 한다. 둘은 시각장애에 대한 상반된 관점을 지닌 인물들이다. 카를로스가 교육에 순응하며 그 안에서의 안전을 추구한다면, 이그나시오는 계속해서 “앞을 보는 것”을 갈구한다. 그런 만큼 카를로스는 안정적이고 균형 있는 4분의 4박자로, 이그나시오는 리듬의 변화가 들어 있는 8분의 6박자 계열로 표현된다. 학생들이 점차 이그나시오에게 동조해가는 흐름 역시 박자의 변화를 통해 전개된다.

 

그리그가 입센의 희곡을 바탕으로 작곡한 <페르귄트>의 ‘솔베이그의 노래’는 곳곳에서 시각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읽게 한다. 극이 시작될 때 원래 단조인 이 곡이 장조로 변주되며 흘러나오고, 학교의 종소리도 같은 멜로디로 울린다. 김은영 작곡가는 “학습된 즐거움”을 인위적이고 밝은 분위기로 나타냈다. 오프닝 넘버에서는 장조의 코드와 스트링을 적극 활용했다. 이처럼 한없이 명랑한 아이들을 향해 이그나시오는 거짓이라고 비판한다.

 

도냐는 이러한 이그나시오를 불러 페르귄트 이야기를 들려준다. 희곡에서 영혼을 수거하는 단추공은 한 번도 자기 자신이었던 적이 없다는 이유로 페르귄트를 주물국자에 녹이려 하고,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게 뭐냐’는 질문에 “주인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라 대답한다는 내용이다. 이그나시오는 자신을 페르귄트에 비유하고 있음을 알아챈다. 그렇지만 이후에도 학교 안 ‘주인’의 뜻을 계속 거역하고, 결국 카를로스가 그에게 단추공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페르귄트는 낭만주의적 인간으로서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 드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은 신의 눈에는 규칙을 어기는 오만함으로 보일 수 있다. 도냐는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존재이며 학교 안에서 절대자적 위치에 있다.

 

한편으로 이 작품이 프랑코 독재 하에 쓰여진 만큼, 학교의 시스템은 진실을 가리는 억압적 장치로 해석되곤 했다. 그런데 우리의 맥락에서는 카를로스와 이그나시오가 부르는 넘버인 ‘그 나름의 의미를 찾아’에 나오는 “같은 어둠”이라는 가사처럼, 현실을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사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온통 블랙인 무대는 섬세하면서도 절제된 조명과 영상으로 표현된다. 나무를 비롯한 오브제에 학생들의 마음속 심상이 아름답게 묻어나고, 장면에 따라 점자를 활용한 디자인이 뒷벽에 펼쳐진다. 직선의 디자인은 ‘시스템’을 상징하려는 연출 의도인데, 이와 관련해 계단 등의 모서리마다 조명이 길게 드리워진다. 카를로스가 질서를 다잡으려는 의지를 보일 때는 흰빛의 프레임이 양옆으로 내려온다. 인물들은 조명을 통해 강조되기도 하는데, 특히 이그나시오와 카를로스는 각각 보라색과 초록색으로, 도냐는 주황색으로 비친다.

 

뮤지컬 <은하철도의 밤> 공연 장면. 사진=더블케이엔터테인먼트

 

“보는 눈”이 아닌 “울고 있는 눈”

잠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필자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오랜 기간 시각을 잃은 상태로 지내셨다. 그 때문에 시각장애인이 나오는 작품들을 관람하면 상징성을 지닌 텍스트로 분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어머니 입장이 되어 생각하게 된다. 어머니는 시각장애인이 된 것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 하셨다. 지팡이도 짚은 적 없고 자식들이 점자를 배우시길 권유하면 역정을 내셨다. 시력이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드릴 수 없어서 고통스러웠다.

 

그런 어머니를 생각하면 시각에 집착하기보다 다른 감각을 통해 삶의 즐거움을 누리며 마음속에 아름다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번 본문에서는 다루지 못했지만 <은하철도의 밤>의 주인공 조반니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광활한 은하수를 만끽한다. 그리고 그 여정은 상처의 치유와 성장의 과정이다. 몽환적이고 아기자기한 영상은 조반니의 내면을 따뜻하게 그린다. <몽유도원>에서 도미는 여경에 의해 눈을 잃고 추방된 후에도 아랑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간절한 피리 소리에 담는다. 그 소리의 파장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결국 아랑에게 닿는다. 둘은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 그 어떤 지옥 속에서도 가장 행복한 존재들 아니던가. 무대·조명·영상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현실인 듯 환상인 듯 수묵담채화 속에서 한바탕 꿈을 꾸는 느낌을 준다.

 

뮤지컬 <몽유도원> 공연 장면. 사진=에이콤

 

한편 『오이디푸스 왕』에 대해 수업할 때면 언급하는 영상이 있는데, 바로 1992년 사이토 키넨 페스티벌에서 줄리 테이머가 연출한 스트라빈스키의 오라토리오다. 머리 위에 얹는 방식의 가면과 독특한 분장을 활용하는 가운데, 테이레시아스의 눈을 양 손바닥에 위치시킨 것에 특히 공감이 간다. 어머니가 종종 하셨던 말이 떠올라서다. “나는 손이 눈이야”라고. 시각만큼이나 촉각도 중요하다. 인식의 착오를 불러오는 시각적 이미지가 범람할수록 우리는 접촉하는 것에 더욱 절실해지지 않는가. 비슷한 시기에 뮤지컬들이 실명 모티프를 다루는 현상도 지금 요구되는 감각의 다양성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영문학자 임철규는 『눈의 역사 눈의 미학』에서 ‘악한 눈’에 대해 다루면서 “눈이 있다는 것은 본다는 것이며, 본다는 것은 인식한다는 것이며, 인식한다는 것은 전체 중의 부분만을 파악한다는 것이기에 눈이란 진정 감옥이다”1)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기존의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울고 있는 눈’은 ‘선한 눈’이다”2)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 시대의 감각에 대한 성찰과 맞물린다. 눈물은 타자와의 진실한 연결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공감은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닌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비극과 같은 파국을 향해 내달리지 않기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함께 얽혀 살면서 감응하는 일 아닐까. 

 


[1]임철규, 『눈의 역사 눈의 미학』, 한길사, 2004, 32쪽.

[2]위의 책, 4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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