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진 공연 칼럼니스트가 더뮤지컬 칼럼을 통해 공연 속 여성 캐릭터를 다각도로 조명합니다.

뮤지컬 <렘피카>는 노인이 된 렘피카가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는 “신기한 구경거리”로 취급받는 현재가 아닌, 스스로를 ‘렘피카’로 명명하는 순간으로 돌아간다. 아이러니는 그 선언이 결혼식 당일에 이루어진다는 데 있다. 결혼을 앞두고 남편 타데우스는 원하는 건 다 주고 싶다 말하고, 렘피카는 “원하는 건 모두”라는 문장을 조용히 읊조린다.
‘욕망’은 렘피카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인지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100% 쏟아붓는 인간이다. 아버지가 유대인 상인이라는 이유로 반대에 부딪혔지만, 그는 기꺼이 사랑을 선택하고 보수적인 사회 속에서 아이를 가진 채 결혼한다. 미술 역시 좋은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만 허용되는 유치한 취미로 치부되지만, 창으로 빛이 들어오는 순간을 포착해 그림으로 남긴다. 렘피카는 과거를 후회하거나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기보다, 현재의 감각에 집중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온전한 몰입은 반작용처럼 짙은 그림자를 동반하고, 욕망의 양면성은 그의 삶과 작품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사랑과 예술이라는 낭만을 욕망했던 그는 러시아 혁명을 기점으로 전혀 다른 욕망을 마주한다. 죽음의 공포로부터 살아남겠다는 치열한 생존 욕구다. 귀족 출신이었던 남편은 투옥되고 신생아와 단둘이 남겨진 상황, 렘피카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남편을 구출하러 나선다. 파리 망명 후 남편이 자기연민에 빠져있을 때에도 렘피카는 그림을 그린다. 영원한 세상은 없다는 깨달음은 그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대신, 모든 것이 변할 수밖에 없는 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살아남는 방식을 선택하게 한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던 예술은 생존을 위한 전략으로 얼굴을 바꾼다. 렘피카는 초상화가 돈이 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딸을 모델로 연습하며, 스스로를 치장해 몸값을 올린다.
붕괴된 세계는 렘피카에게 새로운 자극으로 다가온다. 파리는 그동안 그가 당연하게 여겼던 질서들을 의심하게 만들고, 본질을 다시 재정의하도록 이끈다. 특히 여성을 향한 시선이 그렇다. 렘피카는 부끄러움 없이 자신을 드러내며 도시를 누비는 파리의 여성들을 보며 여성의 진취적인 에너지를 발견한다. 이러한 발견이 여성인 자신에게로 확장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변화의 정점에 선 존재가 라파엘라다. 그는 사랑의 대상을 넘어, 렘피카가 틀에 박힌 삶에 갇혀있던 자신을 발견하고 억압된 욕망을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여성에 대한 관점이 확장되면서 그의 예술에도 변화가 이어진다. 생존 수단이었던 예술이 다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전환된다. 당시 예술계에서 그림과 여성은 장식품으로 소비되어 왔고, 남성들은 렘피카의 성공과 라파엘라와의 관계를 두고 “남자 자리까지 뺏으려 하냐”고 조롱한다. 그때 그는 “이제야 제 자리를 찾은 것”이라는 말을 되돌려주며 거침없이 전진한다. 그의 예술 안에서 여성은 감정과 연민에 휘말리는 존재가 아닌, 질주하는 위력을 가진 존재로 표현된다. 렘피카의 누드화는 기존의 세계가 유지해오던 자극적인 퇴폐를 지우고 여성의 시선으로 창조된 새로운 예술로 인식된다.
그러나 렘피카의 욕망은 언제나 해방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한계를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했다. 렘피카는 어머니에게서 “예쁜 미소 하나면 뭐든 다 잘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지만, 자신의 딸 키제트에게는 “누굴 위해 억지로 웃을 필요 없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역시도 “그래도 아직은 웃어야지, 딱히 변한 것도 없는 세상이니까”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여성 스스로가 달라졌어도 사회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고, 다시 시작된 전쟁으로 사회는 더 깊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생존을 위해 타협이라는 전략을 선택해야 하는 모순적 현실이 그의 삶을 지배한다. 어렵게 쌓아 올린 커리어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 역시 라파엘라와의 사랑을 감추는 선택으로 이어진다. 보호와 통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인물이, 다시 보호를 이유로 사랑하는 이의 존재를 지우는 아이러니. 욕망은 그를 성공한 예술가로 밀어 올렸지만, 동시에 타인의 존재를 지움으로써 고립 속으로 밀어 넣는다.
렘피카는 강인하면서도 약하고, 선하면서도 악한, 아주 평범하고 입체적인 인간을 그리고자 했다. 그리고 그는 그 목표를 자신의 삶으로 증명한다. 뜨겁고 진취적이었지만, 동시에 이기적이고 비겁하기도 했던 인간. 중요한 것은 렘피카가 사랑과 생존, 예술과 전략 사이에서의 흔들림을 자신의 일부로 끌어안는다는 점이다. 완벽하지 않은 인간, 그럼에도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100%를 던진 여성을 향한 연민이 <렘피카>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