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진 공연 칼럼니스트가 더뮤지컬 칼럼을 통해 공연 속 여성 캐릭터를 다각도로 조명합니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미세스 윌킨슨은 유일하게 빌리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꿈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인물이다. 겉보기에는 꿈을 좇는 이상주의자 같지만, 사실 그는 작품 속 누구보다 현실적이며 자신이 처한 세계를 정확히 인식하는 사람이다. 광산 민영화를 두고 정부과 대치하는 광부들이 결국 승리하기 어렵다는 것, 산업의 방향이 바뀌는 시대 속에서 광산 지역은 쇠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곳의 아들들은 결국 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반복할 것이고, 그 삶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이 얼마나 희박한지도 안다.
개인의 삶 역시 불안정하다. 불륜으로 직장을 잃은 남편은 알코올중독자가 되었고, 딸 데비 역시 발레를 배우지만 특별한 재능은 없어 보인다. 특히 노동자 계급이 절대 다수를 이루는 공동체 안에서 윌킨슨 가족은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물리적으로 배제된다. 가족과 공동체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미세스 윌킨슨은 사회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고립된 인물이다.
그래서 미세스 윌킨슨은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에게 발레 수업은 꿈의 현장이기보다 반복적인 일과에 가깝고, 재능 없는 아이들과의 시간 역시 교육이라기보다는 보육처럼 보인다. 그러니 아이들에게조차 꼭 필요한 말 외에는 쉽게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때로는 공격적으로도 보이는 냉소적이고 퉁명스러운 태도는 성격이라기보다 그의 생존 방식에 가깝다.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는 것을 얻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기대는 실망이 되고 실망은 다시 상처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통제 가능한 최소한의 감정과 에너지만을 사용하며 살아간다.
그런 그에게 빌리는 충격적인 존재가 된다. 발레 하는 남자 모두를 ‘게이’로 인식하는 편견의 시대, 여자아이들로 가득한 발레 교실에 불쑥 들어온 소년. 신발도 없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끝내 수업을 떠나지 않는 아이.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빠르게 동작을 이해하고 완성해가는 아이. 빌리의 ‘애티튜드 프롬나드’를 본 순간, 미세스 윌킨슨은 이미 끝났다고 단정했던 현실이 사실은 거짓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감탄하거나 기뻐하는 대신, 조용히 빌리의 자세를 고쳐주며 희미해 보이는 기대를 진지하게 바라본다. 미세스 윌킨슨에게 빌리는 단순히 재능 있는 학생이 아니다. 오래전에 포기했던 가능성 자체에 가깝다.

이후 그의 세계는 빌리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세상에 무관심하고 무기력해 보였던 사람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빌리의 몸에서 춤의 가능성을 읽어내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다. 삶을 담은 안무를 만들고, 로얄 발레 스쿨 오디션을 알아봐주고, 가족의 반대에도 직접 마주하면서. 이 과정에서 미세스 윌킨슨은 빌리 가족이 애써 외면하고 싶어 하는 현실을 정면으로 이야기하며 그들을 설득한다. 파업은 결국 실패할 것이고, 아이들은 부모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어려울 것이라고. 그러니 우리는 망가졌더라도 아이들만큼은 다른 미래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빌리는 어른들의 결단과 응원을 딛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 미세스 윌킨슨은 냉정한 현실주의자이기에 꿈이 얼마나 쉽게 좌절되는지 알기에, 끝까지 빌리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빌리의 런던행은 개인만의 성공이 아니다. 그것은 지난 세대를 향한 위로이자, 굳게 닫혀 있던 사회 구조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가능성의 증명이 된다.
그러나 미세스 윌킨슨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그가 빌리의 유사 엄마처럼 기능할 수는 있어도, 끝내 진짜 엄마가 될 수는 없다. 빌리의 성공 역시 빌리 자신의 몫이다. 그에게는 여전히 불화하는 가족과 재능 없는 수강생들, 그리고 쇠퇴해가는 지역이 남았다. 그의 삶은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빌리라는 예외를 목격한 후, 미세스 윌킨슨은 이전과 같은 사람으로 남을 수 없다. 가망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도 재능은 피어나고, 그 재능을 현실로 만들 수 있음을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고립된 채 떠나지 못한 사람이지만, 빌리를 떠나게 함으로써 미래를 만들어낸다. 아버지들이 깊은 땅속으로 들어가 다시 히어로가 되듯, 미세스 윌킨슨 역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또 다른 히어로가 되어 더럼을 지킨다.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부족함을 지적하는 대신 중요한 건 자신감이라 강조했던 사람. 희망이라곤 품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춤출 때만큼은 누구보다 생생하게 빛났던 사람. 이게 냉소라는 갑옷 뒤의 진짜 미세스 윌킨슨이다. 그러니 빌리가 떠난 후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아주 작지만 분명한 문장이 오래 남을 것이다. “예술의 힘으로 별 볼 일 없는 인생을 바꾸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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