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스테레오포닉> 공연 장면. 사진=Marc Brenner
오래된 극장의 구조적 제약이 고유한 미학으로 발전된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의 조명 디자인은 화려함을 강조하기보다는 무대 위의 이야기를 돋보이게 하는 데 집중한다. 웨스트엔드에서 공연된 연극 <스테레오포닉>의 협력 조명 디자이너로 참여한 안효영 디자이너와의 대화를 통해, 조명을 중심으로 최근 웨스트엔드 무대의 특징을 살펴본다.
웨스트엔드에서 바라본 조명 디자인
연극 <스테레오포닉>은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밴드가 앨범을 녹음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다. 2024년 제77회 토니어워즈에서 13개 부문 후보에 올랐고, 5개 부문(작품상, 연출상, 무대 디자인상, 음향 디자인상, 남자 조연상)에서 수상해 그해 최다 수상작에 등극한 바 있다. 브로드웨이, 웨스트엔드 등 해외 무대에서 활동 중인 장지윤 조명 디자이너가 조명 메인 디자인을 담당했다.
<스테레오포닉> 공연 이전 우연히 장지윤 디자이너와 안면을 튼 안효영 디자이너는 그 인연을 계기로 <스테레오포닉> 웨스트엔드 프로덕션에 협력 조명 디자이너로 참여했다. 메인 디자이너가 공연의 조명을 큰 틀에서 바라보며 진두지휘한다면, 협력 디자이너는 특정 위치에서 조명이 지나치게 눈부시지는 않은지, 무대 위 배우가 너무 밝거나, 혹은 어둡게 보이지 않는지 등 조금 더 세세한 측면에서 조명을 확인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투어 공연에서는 기존 프로덕션의 조명 디자인 의도와 운영 방식 등을 투어 지역의 새로운 극장 환경에 맞게 구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안효영 디자이너는 "최근 웨스트엔드 공연은 무대와 조명을 덜어내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배우와 대본이 이야기를 끌고 갈 수 있도록, 조명은 공간을 마련해 주는 정도로 디자인한다. 조명의 색을 연하게 사용하는 대신 그림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런 특징은 극장의 구조와도 연관성이 있다. 영국에는 오래전 지어진 극장이 많고, 오래된 극장의 구조상 조명을 설치할 수 있는 위치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조명이 정면보다는 측면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측면 조명은 그림자를 많이 만들어 인물과 공간의 입체감을 강조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 안효영 디자이너의 설명이다. 환경적 제약에서 시작된 조명 사용 방식이 특유의 미학으로 발전한 셈이다.
“조명 자체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아닌, 조명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일이 제게는 더 재미있습니다. 요리에 비유하자면, 배우, 무대 세트 등이 요리의 재료라면 조명은 소스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소스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요리의 인상이 완전히 달라지니까요. 조명도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작품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고, 이야기의 인상을 완성하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뮤지컬 <패딩턴> 공연 장면. 사진=Johan Persson
조명으로 읽는 웨스트엔드 화제작
# 녹음실을 무대 위로, <스테레오포닉>
“<스테레오포닉>은 실제 녹음실에 들어온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드는 데 중점을 둔 작품입니다. 무대에서 주로 사용하는 공연용 조명만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레일 조명, 펜던트 조명 등 일상 공간에서 사용하는 인테리어용 조명도 배치했어요. 무대 자체도 유리창, 스튜디오 마이크를 갖춘 실제 녹음실처럼 제작됐고, 배우들이 라이브로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녹음실 부스 바깥, 컨트롤 룸은 현실적인 분위기의 조명을 사용했다면, 녹음실 부스 안쪽은 조명의 색과 조명이 들어가는 각도를 조금 더 극적으로 적용해 인물들의 갈등과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했어요. 평범한 녹음실의 모습과 인물들의 복잡한 심리가 대비되도록 구성한 거죠.”
# 주인공을 비추는 조명 <패딩턴>
“동명 영화를 무대로 옮긴 뮤지컬 <패딩턴>은 런던에서 홀로 모험을 시작한 꼬마 곰 ‘패딩턴’의 이야기입니다. <패딩턴>에서는 주인공 패딩턴이 다른 인물들과 자연스럽게 구분되도록 조명을 통해 그의 실루엣을 강조한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인물의 뒤쪽에서 조명을 더해 인물의 윤곽을 강조하면 배경 혹은 다른 인물과 분리돼 관객이 시선이 자연스럽게 주인공에게 향할 수 있거든요. 패딩턴이 혼자 남자 외로움을 느끼는 장면에서는 조명을 낮춰 주변을 어둡게 만들어 관객이 그의 감정에 집중하도록 했고요. 또, <패딩턴>은 리듬감 있는 음악과 빠른 장면 전환이 매력인데, 그에 맞춰 조명에도 다양한 색을 사용한 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햇빛처럼, <인투 더 우즈>
“뮤지컬 <인투 더 우즈>는 여러 동화를 한 데 엮은 작품인데, 조명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조명을 사용해, 숲에서 바라본 빛을 구현한 점이 좋았습니다. 자연스러운 분위기의 조명으로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고, 으스스한 분위기의 장면에서는 아래에서 위로 쏘아지는 조명을 사용해 작품의 서사를 살렸어요.”

뮤지컬 <인투 더 우즈> 공연 장면. 사진=Johan Persson
웨스트엔드로 향하는 길
안효영 디자이너는 어린 시절 한 콘서트 영상을 본 후 무대 조명에 매료돼 서울예대에서 무대 조명을 전공했다. 마이클 잭슨의 콘서트 준비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 This is it >을 통해 해당 콘서트에 참여한 유명 조명 디자이너 패트릭 우드로프에 대해 알게 됐고, 그를 만나기 위해 독일까지 날아갔다. 독일에서 참여한 패트릭 우드로프의 특강에서 “현장 업무를 시작하고 싶다면 학위를 취득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는 조언을 얻은 그는 2021년 영국 로즈 브루포드 칼리지에서 무대 조명 석사를 시작하면서 영국 공연 업계와 가까워졌다.
석사 과정을 마친 후 우연히 영국 국립극장 근처로 이사한 그는 ‘국립극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극장 담당자에게 “조명과 관련된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이력서를 보냈다. 마침 연말 공연 준비로 인해 많은 인력이 필요한 시기였던 국립극장 측은 그가 내민 손을 잡아주었고, 안효영 디자이너는 한국인 최초로 영국 국립극장 조명팀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는 기회를 거머쥐었다.
“재능 있는 창작자들과 작업하면서 함께 성장하는 경험은 굉장히 즐겁습니다. 공연예술 산업의 중심에서 일한다는 자부심도 있고요. 다만 경쟁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치열합니다. 뛰어난 실력을 지닌 사람이 워낙 많은 곳이니까요.”

안효영 조명 디자이너. 사진=본인 제공
안효영 디자이너는 영국 공연계 진출을 꿈꾸는 이들에게 “일단 도전하라”고 조언했다. 그가 그랬듯이 말이다. 그는 “저 역시 할지 말지 고민만 했다면 기회를 얻지 못했을 거다. 물론 운도 중요하지만, 운을 만날 수 있도록 먼저 행동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몫”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안효영 디자이너 역시 다양한 방면으로 도전을 이어갈 예정이다. 추후 한국에서의 활동도 계획하고 있다는 그는 “연극과 뮤지컬을 중심으로, 표현주의적인 스타일의 작업을 하고 싶다. 동시에 조명과 빛의 가치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역할도 하고 싶다”고 뜻을 내비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