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usical

더뮤지컬

magazine 국내 유일의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이 취재한 뮤지컬계 이슈와 인물

인터뷰 | <블랙메리포핀스> 원태민, 진심이 맞닿는 순간

글 |이솔희 사진 |표기식 2026-08-05 2,113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는 화재 사건에서 살아남은 네 남매가 잊어버린 진실을 마주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하나의 사건을 네 인물의 시선으로 풀어낸 네 개의 버전이 존재하는 공연으로, 이번 시즌에는 네 버전이 연이어 공연되어 여러 방향의 시선을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2024년 뮤지컬 <이프아이월유>로 처음 무대에 선 후 꾸준히 연극, 뮤지컬에서 활약하고 있는 원태민은 <블랙메리포핀스>에서 네 남매 중 둘째 헤르만 디히터 역을 맡아 그 여정을 이어간다. 작품을 향한, 그리고 캐릭터를 향한 그의 진심이 이번에도 관객에게 가닿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지난 2년간 출연한 작품만 10개에 달하더라고요. 뮤지컬 <이프아이월유>로 처음 무대에 설 때, 이렇게 꾸준하게 관객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나요.

정말 생각도 못 했어요. 사실 연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어요. 연기, 노래, 춤 모든 것을 잘 해내야 하는 뮤지컬 배우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서, 막연한 동경도 있었고요. 언젠가 꼭 뮤지컬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이프아이월유>를 만나게 됐으니, 제가 할 수 있는 건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는 없었어요. 최선을 다해서 내게 주어진 일을 해내면 제 실력도 조금씩 발전할 거고, 그걸 누군가는 알아봐 줄 거라고 믿었거든요. 다행히 많은 분이 좋게 봐주신 덕분에, 감사하게도 그 뒤로 많은 기회들이 찾아왔어요. <블랙메리포핀스>에서 헤르만이 예술 작품을 만들어 가듯이, 저도 다듬고, 깎아내고, 새로운 것을 덧붙이면서 뮤지컬 무대 위의 제 모습을 만들어 가는 중인 것 같아요.

 

이번에 만난 작품은 앞서 말한 <블랙메리포핀스>예요. 작품의 어떤 점이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졌나요.

가장 먼저,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불행과 기꺼이 동행하겠습니다.' 이 대사가 크게 와닿았어요. 단순히 아이들이 겪은 슬픈 사건에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네 남매가 불행한 일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믿으면서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메시지로 작품이 마무리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어요.

 

네 개의 버전을 연이어 만날 수 있다는 게 이번 시즌의 특징인데요, 그중 헤르만 버전만의 차별점을 소개해 보자면요.

버전마다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지만, 중심 화자가 바뀌어요. 헤르만 버전에서는 헤르만이 화자로 나서고, 헤르만이 기억하는 한스, 안나, 요나스의 모습이 그려지죠. 헤르만은 네 남매 중 둘째이기 때문에 한스 형을 잘 따라야 하고, 안나와 요나스를 잘 챙겨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에요. 형, 동생이 자기 세상의 전부였고요. 하지만 화재 사건을 겪으면서 형에 대한 원망, 동생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생겼고, 어린 나이에 그 감정들을 감당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으니 마음의 문을 닫고, 외면하는 것을 선택하죠. 그래서 헤르만의 독백에는 정확히 알기 어려운 모호한 감정들이 섞여 있는데, 관객분들이 헤르만의 감정을 따라가면서 공연을 보시면, 인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헤르만이라는 인물을 잘 표현하기 위해 어떤 고민을 했나요.

헤르만은 감정을 외면하는 쪽에 가깝다면, 저는 제 앞에 놓인 상황을 직면하고, 오해가 생기면 대화로 풀려고 노력하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헤르만과 저 사이에 간극이 조금 있었어요. 그 간극을 줄여 나가기 위해 헤르만이 그 어린 나이에 얼마나 큰 상실감과 고통, 아픔을 느꼈을까 몇 번이고 곱씹었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꺼내기 두려운 기억'을 꺼내보고, 나는 이때 어떤 행동을 했었는지 생각하면서 헤르만의 마음을 최대한 이해해 보고자 노력했고요. 또,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면서 진행되는 극이다 보니 과거의 밝은 모습과 현재의 방어적인 모습의 차이를 관객분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하나의 대본을 여러 방향으로 바라보는 경험이 배우에게 어떠한 가르침을 안겨 주던가요.

정답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같은 상황이라도 누구의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가장 크게 느꼈고요. 버전별로 화자가 다르다 보니 단순히 제 역할만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인물들의 마음까지 함께 이해하게 되면서, 제가 표현하는 헤르만의 모습이 좀 더 입체적으로 그려지게 된 것 같아요.

 

극 중 화재 사건을 겪은 이후부터 다시 남매들을 마주하고 기억을 되찾는 순간까지, 헤르만을 지배하는 감정은 무엇이라고 생각했나요.

죄책감. 안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가장 컸을 거고, 그 죄책감이 헤르만을 지배해 왔을 거라고 생각해요. 헤르만의 시간은 그때 이후로 멈췄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앞으로 나아가고 싶지만, 끝내 그날을 떠나지 못하는 헤르만의 마음이 그를 계속 붙잡고 있었을 거예요. 공연의 마지막, ‘이제 모든 기억을 지우게 된다’는 말을 듣는 순간에 저는 '이번에는 이 기억을 지우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해요. '제발, 지우고 싶지 않아. 내가 지켜주지 못했던 그 모습 그대로의 안나가 기억의 방 안에 있어. 내가 여기서 이 기억을 지워버리면, 그때 내가 지켜주지 못했던 그 아이를 또다시 그 자리에 두고 오는 거야.'라는 마음이죠. 다행히 기억을 지우지 않게 되고, 그 후로도 안나를 향한 죄책감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보듬어 주면서 살아갈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헤르만은 행복해지기 위해 불행과 동행하겠다는 선택을 한 후에도 계속 힘들었겠죠. 하지만 그가 계속해서 꾸던 악몽에서는 조금 벗어났을 것 같아요. 허상이 만들어 낸 모래 사나이에 대한 악몽이요. 모래 사나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서, 어떻게든 살아갔을 거라고 생각해요. 멈춰 있던 시간도 다시 흐를 거고요.

 

헤르만 버전의 부제가 '모래 사나이가 나오는 꿈'이죠. 헤르만의 내면에 '모래 사나이'는 어떤 존재로 자리 잡고 있나요?

헤르만의 독백에서 모래 사나이는 실체가 없는 두려움, 진실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낸 괴물로 묘사돼요. 헤르만은 악몽을 통해 '사실 내가 모래 사나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고요. 그런데 모든 진실을 마주한 후에는, 모래 사나이는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걸, 외면하고 싶었던, 모래처럼 흩어져 있던 기억들이 두려움과 섞이면서 크고 단단해진 거라는 걸 깨닫게 되죠. 그래서 아이들이 불행과 동행하기로 마음먹은 후에는, 모래 사나이는 다시 작은 모래알로 부서져요. 모래 사나이는 잠들지 않은 아이들의 눈을 빼앗아 가는 존재로도 묘사되는데, 눈은 진실을 볼 수 있는 창구잖아요. 우리가 무서운 걸 볼 때면 눈을 감아버리고요. 그동안 마음의 눈을 감은 채 살아온 헤르만은, 진실을 마주한 후에야 비로소 눈을 뜬 기분이었을 거예요.

 

행복하기 위해 불행과 동행하겠다는 네 남매의 다짐에 공감하시나요.

정말 공감해요. 저 역시 지우고 싶은 기억들이 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경험 덕에 지금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좌절과 실패의 경험이 저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도 생각하고요. 살면서 행복한 순간만 있을 수는 없으니, 나에게 생긴 아픔을 최대한 잘 극복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상처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상처에서 새살이 돋아나면서 회복하는 과정 역시 자연스럽게 따라오니까. 그 과정이 저를 단단하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무대 위에서 보낸 지난 2년을 돌아보면 어떤 기분이 드나요.

감사한 마음이 가장 크고요. 한 작품을 끝내면 '이번에는 이런 걸 배워서 성장했구나'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다음 작품을 만나면 '내가 이런 점이 부족하구나'라는 걸 또 느껴요. 그래서 지난 2년은 계속해서 배우고 성장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다만 처음에는 '더 표현해야 해, 더 느껴야 해' 이런 생각을 하며 '플러스'에만 집중했다면, 이제는 '마이너스'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려고 해요. 저는 잘 해내고 싶다는 욕심이 많은 편이라 자꾸 스스로를 채찍질해요. '왜 내가 느낀 감정들을 더 잘 표현하지 못했지?'라는 생각을 하면서요. 하지만 그런 생각이나 욕심이 저를 지배하게 두지는 않아요. 욕심이 커지면 오히려 인물의 감정은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고 싶다는 욕망만 남게 되니까요. 그래서 억지로 표현하고 느끼기보다는, ‘캐릭터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 보자, 인물의 마음을 믿고 그냥 그 상태로 나를 흘러가게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해요. 내가 들인 노력의 시간을 믿으면서, 관객분들이 보내주신 응원을 믿으면서, 한 발짝씩 재미있게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블랙메리포핀스>를 비롯해서, <사의찬미> <팬레터>처럼 오랜 시간 공연되어, 마니아층이 두터운 작품에서 활약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들인 만큼 새로운 캐스트로서 부담감도 당연히 따라올 텐데, 어떤 마음으로 작품과 관객을 마주하고 있나요.

부담이 없다면 거짓말이죠. 여러 작품을 만나면서 역시 오랜 시간 사랑받는 작품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느꼈고, 그 긴 시간 안에는 작품을 오랫동안 사랑해 온 관객과의 시간도 포함돼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러니 작품을 새롭게 만난 저는 그저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어요. '내가 생각하는 이 인물을 그대로 보여드리자.' 거기에만 집중했어요. 제 진심이 관객분들에게 닿기를 바라면서 노력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마음이에요.

 

 

요즘의 태민 씨에게 무대는 어떤 의미인가요.

가장 크게 느끼는 건, 무대는 사람과 사람이 진심으로 만나는 공간이라는 거예요. 제가 진심을 담아 그려내는 인물과, 상대 배우가 진심을 담아 그려내는 인물이 함께 진심으로 만들어낸 장면을 관객분들에게 보여드리고, 관객분들이 그 진심을 함께 느끼고 호흡하는, 즉 작품과 캐릭터와 배우와 관객이 진심을 공유하는 공간이 무대라고 생각해요. 무대는 제게 늘 긴장감과 떨림을 주는 공간이지만, 그 긴장감과 떨림 역시 제가 무대 위에서 진심으로 임하고 있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에, 저는 무대 위에서 그저 진심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라는 생각으로 연기를 시작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게 되었다는 게 정말 감사하고 행복해요.

 

스스로에게 질문한 것처럼,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기분인가요? 행복감과 동시에 불안감도 자연스레 따라오겠죠?

맞아요.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이 훨씬 크지만, 불안감도 종종 따라와요. 행복한 마음으로 쌓아 올린 모래성이 한순간에 다시 모래로 흩어져 버릴 수 있는 거니까요. 언제든 파도가 쳐서 모래성이 휩쓸려 갈 수 있겠지만, 지금의 저는 저만의 모래성을 단단하게 쌓기 위해 노력 중이에요. 원래 모래성은 바닷물을 뿌려야 단단해지는 법이니까요.

 

최근 가장 중요시하는 것, 그리고 경계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중요시하는 건 언제나 진심이고요. 경계하는 건 익숙함인 것 같아요. 저는 진심이라는 말을 정말 좋아해요. 작품을 대할 때도, 사람을 만날 때도 진심으로 대하는 태도는 말하지 않아도 느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또, 익숙해지는 순간 주변에 있는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을 놓치게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처음으로 연기를 했던 순간에 가졌던 그 진심을 잊지 않으면서, 앞으로도 쭉 행복하게 연기하고 싶어요. 제가 캐릭터에 대해 가졌던 고민이 연기를 통해 고스란히 보이는 배우, 차근차근 나만의 길을 가는 배우, 그래서 오래오래 보고 싶은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네이버TV

트위터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