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Manuel Harlan
2026년 런던 바비칸에서 만난 〈데스노트〉는 내가 알고 있던 〈데스노트〉와는 꽤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2015년과 2017년, 호리프로의 오리지널 일본 프로덕션을 바탕으로 한 같은 버전의 한국 프로덕션을 거쳐 2022년 새로운 버전의 한국 프로덕션, 그리고 2026년 런던 프로덕션까지. 한 작품을 세 가지 버전으로 만나고 나니, 이번 런던 공연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익숙한 이야기가 프로덕션에 따라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구현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더 나아가 그 차이가 단순히 연출이나 미학적 선택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각 프로덕션이 만들어진 문화적 맥락의 차이와도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는 것 역시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뮤지컬이 공유하는 기본적인 구조는 같지만, 연출과 무대미술, 조명, 안무, 배우의 해석에 따라 작품이 전달하는 인상은 상당히 달라진다. 한국의 초,재연과 삼연도 그랬듯이. 하지만 특히 이번 런던 프로덕션은 기존 일본·한국 프로덕션과 비교했을 때 피지컬 프로덕션뿐만 아니라 대본과 음악에서도 분명한 변화를 보여준다. 익숙한 넘버의 위치가 바뀌고, 새로운 넘버가 추가되며, 기존 넘버를 부르는 인물이 달라졌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러닝타임을 조정하거나 음악적 색깔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인물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며, 서로를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는지까지 달라지게 만든다.
이번 리뷰에서는 〈데스노트〉라는 작품 자체에 대한 감상과 함께, 앞서 관람했던 한국 프로덕션들과 비교하며 이번 런던 버전이 무엇을 새롭게 선택했고, 그 선택이 작품의 인물과 이야기에 어떤 효과를 만들어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는 2015년과 2017년에는 오리지널 일본 프로덕션을 바탕으로 한 한국 프로덕션을 각각 한 차례씩, 2022년에는 새로운 버전의 한국 프로덕션을 한 차례, 2026년에는 런던 바비칸 프로덕션을 프리뷰 후반부에 관람했다. 원작 만화 〈데스노트〉를 직접 접한 경험은 없으며, 일본 문화와 사회적 맥락에 대해서도 전문적인 배경지식을 갖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이 글에서 언급하는 일본·한국·영국 프로덕션의 특징이나 작품에 대한 해석은 원작이나 별도의 자료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각 뮤지컬 공연을 직접 관람하며 작품을 통해 받은 인상과 경험에 한정됨을 미리 밝힌다.

사진: Manuel Harlan
다사다난했던 런던 프로덕션의 탄생
〈데스노트〉는 런던에서 2023년 8월, 이틀간의 콘서트 버전으로 처음 관객을 만났다. 2,200석이 넘는 팔라디움 극장이 전석 매진됐고, 같은 해 9월에는 리릭 시어터로 자리를 옮겨 4일간 공연했다. 짧은 콘서트였지만 런던 관객에게 〈데스노트〉라는 작품을 처음 소개하는 자리로서는 꽤 인상적인 출발이었다.
당시 이 작품의 프로듀싱 컴퍼니는 이후 〈4월은 너의 거짓말〉의 콘서트와 정식 공연까지 진행했다. 하지만 〈데스노트〉의 매진 행렬과는 달리 장기 공연으로 이어진 〈4월은 너의 거짓말〉은 여러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조기 종영했다. 이후 〈데스노트〉의 공연권은 트라팔가 엔터테인먼트로 넘어갔고, 새로운 크리에이티브와 함께 프로덕션이 새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즉, 이번 런던 공연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것이 아니다. 영어권에서 처음 선보이는 정식 공연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의 개발과 변화가 있었고, 단순히 일본 혹은 한국 프로덕션을 그대로 가져와 영국 배우들과 공연하는 방식이 아닌, 런던에서만 나올 수 있는 새로운 프로덕션을 지향했다. 그 결과 우리가 알고 있던 〈데스노트〉와는 상당히 다른 작품이 탄생했다. 익숙한 이야기를 영어로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관객에게 이 작품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만들어온 결과다. 그리고 그 변화는 대본과 음악뿐 아니라 무대와 움직임, 캐릭터를 바라보는 방식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2028년 리노베이션을 위해 운영 중단을 앞둔 바비칸에서 짧지만 매진인 여름 시즌을 보낸 이 프로덕션은 이미 2027년 재공연이 벌써 발표되었다. 콘서트로 시작해 여러 변화를 거쳐 정식 프로덕션에 도착한 〈데스노트〉가 이제 런던에서 또 한 번의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는 셈이다.
가장 큰 변화, 대본과 음악
〈믿을 수가 없어, 꿈을 꾸는 걸까〉가 없다니. 믿을 수가 없어, 꿈을 꾸는 걸까?
한국 관객에게 〈데스노트〉의 첫인상을 묻는다면 아마 “믿을 수가 없어, 꿈을 꾸는 걸까”의 가사를 떠올리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런던 공연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그 노래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 순간에 그 노래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라진 것은 아니고, 훨씬 뒤로 자리를 옮겼다. 문제는 단순한 순서의 변화가 아니라, 그 결과 라이토가 데스노트를 받아들이는 과정 자체가 달라진다는 데 있다.
한국 프로덕션에서 이 노래는 라이토가 데스노트를 손에 넣은 직후 자신이 경험한 것이 정말 현실인지, 이 힘이 실제로 작동하는 것인지 확인하고 자신의 사명감을 확신하는 과정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자연스럽게 ‘정의’와 ‘법’, ‘도덕’에 대한 고민과 스스로의 희생, 그리고 그 가치가 함께 따라온다.
반면 런던판에서는 이 과정이 상당히 빠르게 지나간다. 데스노트의 힘이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을 확인한 라이토는 〈Change the World〉 안에서 ‘이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관심을 확장한다. 그래서 한국판에서 느꼈던 라이토의 고뇌와 자기검열보다, 자신이 가진 힘,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이 힘 자체에 매혹되어가는 과정이 더 강하게 보인다. 라이토가 FBI 요원들마저 제거한 후에 배치된 〈데스노트〉 역시 라이토가 정의를 희생해서라도 힘의 중심으로 거침없이 들어가는 흐름을 돕는다.
결국 런던판에서 달라진 것은 노래 한 곡의 위치가 아니다. 라이토가 무엇을 위해 데스노트를 사용하는 사람인가, 그리고 데스노트를 통해 무엇이 되는가라는 질문의 무게가 달라진 것이다.
미사는 ‘설명되는 인물’에서 ‘행동하는 인물’로
미사의 변화도 상당히 크다. 이전 버전에서 미사의 〈사랑할 각오〉는 스타이자 아이돌로서의 모습, 그리고 키라의 열렬한 팬이라는 성격을 강조한다. 런던판의 〈I’m Ready〉는 훨씬 짧고 팝적인 방향으로 재구성됐다. 복싱 링을 연상시키는 공간과 랩을 활용하면서 미사의 에너지를 빠르게 보여준다. 이곳에서 미사는 ‘아이돌’이라기보다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의지가 강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젊은 여성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원작에서 새롭게 무대화된 사신 제라수도 그러한 미사의 면모에 매혹되었다고 고백한다.
그 변화는 새로운 넘버 〈Half a Life〉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미사는 본인의 영웅인 키라를만나기 위해 사신의 눈을 얻으려 자신의 수명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선택을 빠르게 내린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절반은 버릴 수 있다며 고민 없이 결정한다. 2막을 시작하는 독립적인 음악 장면으로서 이 곡은 미사에게 상당한 주체성을 부여한다. 미사는 욕망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인물이 된다.
다만 그만큼 잃어버린 것도 있다. 한국판에서는 미사의 감정이 라이토와의 관계 안에서 보다 복잡하게 움직였고 키라를 돕는 것이 자신의 보답이자 책임이라 여기는 부분이 컸다. 이전 프로덕션의 〈나의 히어로〉에서는 사유가 먼저 노래하고, 미사가 그 반대편에 놓이면서 두 사람의 가치관과 세계가 자연스럽게 대비된다. 반면 런던판의 〈We All Need a Hero〉에는 사유가 등장하지 않는다. 미사가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키라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노래한다. 덕분에 미사 자신의 감정과 욕망은 훨씬 선명해졌지만, 동시에 라이토와 미사 사이의 감정적 관계는 단순해진다. 미사는 거의 맹목적일 정도로 라이토에게 헌신하지만, 라이토에게 미사는 자신의 힘을 확장하는 데 필요한 존재로 이용당할 뿐이다. 심지어 여자친구를 시켜주지도 않는다.

사진: Danny Kaan
사라진 가족, 새롭게 음악화된 관계
미사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유의 존재가 눈에 들어온다. 기존의 〈나의 히어로〉는 사유가 리드하는 넘버고, 미사가 그 반대편에 놓이면서 두 사람의 가치관과 세계가 자연스럽게 대비되었다. 사유는 라이토에게 자신이 선택한 길을 바라보게 하는 하나의 인간적인 거울처럼 기능했지만, 런던판에서는 미사의 솔로로 진행된다.
여동생이 라이토를 바라보던 시선이 사라지자, 라이토를 옥죄는 도덕적 딜레마와 위험도가 사라졌다. 이런 변화는 소이치로와 라이토의 관계에서도 이어져서, 아버지의 직업과 라이토에 대한 신뢰가 라이토에게 무게감 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런던판에서는 한국에서 장면과 대사로 축소되었던 소이치로의 2막 솔로곡 〈Honor Bound〉가 되살아났는데, 라이토와 소이치로의 관계가 상대적으로 줄어들자 오히려 소이치로와 엘의 관계가 선명해진다. 소이치로는 엘의 의견에 더 동요하고, 자신이 믿어왔던 것에 흔들린다.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의 논리와 판단에 영향을 주고받는 동등한 관계로 그려진다.
키라의 타겟이 범죄자들을 넘어 수사본부를 겨냥한 뒤 이어지는 〈가능한 일이라면 Reprise〉에서도 가족에 대한 언급은 한국판보다 훨씬 적다. 한국판에서 중요하게 작동했던 가족이라는 관계의 무게감이 런던판에서는 상당 부분 뒤로 물러난 셈이다.
이 부분에서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각색의 선택일까, 아니면 가족이라는 관계를 바라보는 각 문화권의 차이와도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을까.
제라수의 등장, 달라진 렘의 감정선
런던판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는 제라수의 등장이다. 미사를 사랑하는 사신인 제라수는 미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희생하는 인물이다. 이전 뮤지컬 무대에서 볼 수 없었던 이 캐릭터가 이번에는 직접 무대 위에 등장한다.
따라서 〈잔인한 꿈〉의 위치도 달라졌다. 한국판에서는 2막 초반, 렘이 미사에게 제라수의 희생을 설명하며 렘이 미사를 지키는 감정적 이유와 연결한다. 반면 런던판에서는 1막에 배치되어 미사와 렘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전에 두 사신과 사신들의 규칙,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를 먼저 소개한다. 이 배치는 사신이라는 존재와 그들의 세계를 일찍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효과적이다. 특히 제라수가 미사를 향해 품은 감정을 렘이 경고하는 모습이 1막부터 드러나면서, 두 사신 사이의 다른 관점 역시 보다 일찍 확립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렘의 감정적인 여정은 약해진다. 기존 버전에서의 렘의 여정 중 1막은 제라수에게 떨어져 나간 것이기 때문이다. 제라수의 희생과 미사와의 연결, 그리고 그것이 렘에게 남긴 감정적 결과가 빠르게 지나간다. 미사를 향한 제라수의 감정을 1막 내내 경계하던 렘이기에, 2막에서 미사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발전하고 결국 희생으로 이어지는 과정도 다소 급하게 느껴진다. 제라수 역시 무대에서 충분히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점은 아쉽다.

사진: Danny Kaan
〈정의는… 어디에?〉 그 질문이 사라진 자리
또 하나 눈에 띄는 변화는 라이토의 인간적인 고뇌가 상당 부분 사라졌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한국판에서 중요하게 느껴졌던 〈정의는 어디에?〉라는 질문도 런던판에서는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라이토가 자신의 선택을 통해 무엇이 옳은지 고민하는 과정이 줄어들면서, 작품의 중심 역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힘을 손에 넣은 인간은 어디까지 치달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다.
라이토가 정의를 빠르게 버리기에, 류크와의 관계성도 달라진다. 한국판에서는 라이토와 류크가 어느 순간부터는 애증 어린 파트너십에 가까운 관계를 형성한다. 반면 런던판에서는 류크는 라이토를 ‘child’, ‘school boy’라 부르며 그를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라이토의 변화를 경계하며 엘의 수사와 성취에 더 큰 흥미와 찬사를 보인다. 류크가 결정하는 라이토의 마지막 역시 그 관계의 연장선에서 예상된 대로 차갑고 깔끔하게 끝난다.
흥미로운 것은 그 반대편에 있는 엘이다. 한국판에서 엘은 비범하고 초현실적인 캐릭터라는 인상이 강했다면, 런던판에서는 초현실적인 사건 앞에서 자신의 논리와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이 보다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그의 결말이 오히려 더욱 안타깝게 다가오기도 했다. 라이토에게서 인간적인 고뇌가 덜어진 자리에, 예상치도 못했던 엘의 인간적인 고민이 더 선명하게 들어온 셈이다.
음악으로 다시 그린 〈데스노트〉
이번 런던 프로덕션을 보면서 생긴 궁금증을 직접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지킬 앤 하이드>, <마타하리>, <시라노>, <몬테 크리스토> 등)과 편곡자 제이슨 하울랜드(<위대한 개츠비>, <스윙데이즈>, <작은 아씨들>)에게 물어볼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공연만 봐서는 알기 어려운 음악적 비하인드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작품을 만든 이들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번 런던판을 이해하는 데 꽤 특별한 단서가 되었다.
프랭크 와일드혼은 먼저, 한국 프로덕션에 대한 애정이 상당했다. 한국에서 〈데스노트〉가 비로소 자신이 생각했던 작품의 ‘스펙터클’을 찾았다며, 초연의 김준수와 홍광호를 시작으로 모든 배우들의 공연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다고 했다.
그에게 런던판의 〈Change the World〉는 중요한 변화다. 라이토에게 보다 강력한 록 넘버를 초반에 부여하면서 그의 에너지를 빠르게 끌어올릴 수 있고, 동시에 〈데스노트〉를 뒤로 옮겨 더 효과적인 위치에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새롭게 만들어진 미사의 〈Half a Life〉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넘버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미사의 주체적인 선택을 통해 작품의 긴장감을 높이고 관계의 무게 역시 강화했고, 또 가창력을 발휘하기에도 좋은 넘버이기 때문이다.
제이슨 하울랜드가 들려준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런던판에서 〈데스노트〉 자체는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강한 인상을 남기지 않지만, 2막의 새로운 엔트랙트에서 다시 활용된다. 인터미션 이후 관객이 다시 〈데스노트〉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음악적 문을 만드는 셈이다. 실제로 그 엔트랙트를 들었을 때 바로 ‘제이슨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일본 국가의 사운드스케이프에서 시작해 〈데스노트〉의 음악적 모티프를 오케스트라와 라이브 밴드로 확장하면서 2막의 분위기를 다시 구축했다고 한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현악 4중주 미사 테마다. 유일하게 현악기로만 연주되는 미사의뮤지컬 모티프는 미사를 사랑하게 된 사신 제라수에게 먼저 이동한다. 그리고는 미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하는 렘의 〈어리석은 사랑〉 역시 같은 모티프의 현악 4중주로 시작한다. 렘의 음악적 언어도 캐릭터의 여정에 따라 변한다는 설명이다. 처음에는 마치 거대한 마블 세계의 신적 존재를 연상시키는 듯한 웅장하고 초월적인 사운드와 질감을 사용하지만, 렘의 결말에 가까워질수록 인간적인 어쿠스틱 텍스처로 이동한다. 사랑에 빠지고 인간의 감정에 가까워지는 렘의 변화를 오케스트레이션 자체로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프랭크도, 제이슨도, 그리고 나 역시도 한국 배우들이 노래를 가장 잘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2014년 지킬앤하이드 10주년 공연부터 시작된 인연, 프랭크 옆자리에서 공연을 관람하며 새로운 넘버들에 대해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사진: 본인 제공
만화의 세계가 무대 위로 열리는 방식
이번 무대의 세트 디자인은 최근 한국에서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큰 호평을 받은 존 바우저가 맡았다. 한국 프로덕션 역시 세련된 LED 스크린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지만, 런던판은 LED에 입체적인 상부 구조물을 결합하면서 인간계와 사신의 세계를 보다 분명하게 구분한다. 평면적인 이미지와 실제 구조물이 겹쳐지면서 정말 사신들이 인간계로 내려오듯, 만화의 한 장면이 페이지에서 빠져나와 무대 위에 입체적으로 펼쳐지는 느낌을 준다.
다만 턴테이블의 활용은 조금 아쉽다. 몇몇 장면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는데, 그만큼의 존재감이나 기능을 충분히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전체적인 무대의 규모와 디자인을 생각하면 오히려 조금 비효율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다.
올해 올리비에 안무상 수상자인 파비안 알로이즈의 안무도 만화의 세계가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만드는 데 초점을 둔다. 이는 〈선셋 블러바드〉나 〈에비타〉에서 그가 보여준 접근과도 연결된다. 〈선셋 블러바드〉에서는 앙상블이 주인공 조와 노마의 감정과 욕망을 확장하고, 불안정하고 광기 어린 할리우드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에비타〉에서는 장면과 인물에 따라 움직임의 밀도와 강도가 달라지고, 군중의 에너지와 에비타의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이 무대 전체로 퍼져나간다.
반면 〈데스노트〉의 주요 넘버는 솔로 중심이고, 인물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경우가 많다. 앙상블을 통해 감정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셈이다. 엘의 〈게임의 시작〉 오프닝에서 앙상블을 그림자처럼 활용해 엘의 존재감을 시각적으로 확장하는 장면은 인상적이지만, 그 외에는 알로이즈의 움직임이 드라마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리는 순간이 많지 않았다는 점은 조금 아쉽다.
특히 한국 관객에게 익숙한 테니스 장면은 런던에서도 흥미로운 방식으로 재구성된다. 두 사람 위에 비디오게임처럼 빨간, 파란색의 ‘플레이어 1’과 ‘플레이어 2’가 등장해 배치되고, 마치 게임을 플레이하듯 두 사람의 심리전을 재미있게 시각화한다. 이 장면에서 이 작품이 뮤지컬 관객이 아니라 원작 만화 독자를 정확하게 겨냥한 프로덕션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국 프로덕션에서 느꼈던 팽팽한 긴장감과는 사뭇 다른 결이었다.
실제로 런던 공연에서 느껴지는 관객층도 상당히 달랐다. 특히 객석 앞 다섯 줄에는 코스프레를 한 관객들이 정말 많았다. 본인 기준 ‘스타 배우’가 없는데도 런던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퇴근길 풍경이었고, 매진 행렬 후 이른 시점부터 재공연이 결정됐다. 만화와 게임의 언어를 적극적으로 끌어오면서 원작을 알고 있던 관객들이 극장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입구를 만들어준 것이다.
이번 런던 프로덕션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배우들의 캐스팅이다. 류크를 연기한 텔리 렁은 마이클 리와 〈앨리전스〉 브로드웨이 공연을 함께했고 <글리> 출연으로도 유명하며, 지난해 〈렛미플라이〉 뉴욕 워크숍에서는 연출을 맡았던 배우다. 소이치로 역의 파올로 몬탈반은 로저스 해머스타인 버전 <신데렐라>의 1997년 디즈니 티비영화에서 브랜디의 상대역인 왕자 크리스토퍼를 맡았던 배우다. 당시 이 작품은 브랜디와 휘트니 휴스턴, 우피 골드버그 등 다양한 인종의 배우들이 함께한 파격적인 캐스팅으로 주목받았다. 렘 역의 그레이스 모앗 역시 <식스> 오리지널 웨스트엔드 캐스트의 슈퍼스윙이자 댄스 캡틴으로 활약했고, <앤줄리엣>, <민걸즈> 등의 작품에 출연한 배우다. 하지만 동아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임에도 한국 배우가 한 명도 없다는 점은 정말 아쉽다.
또 하나 개인적으로 충격받은 점은 소이치로의 수사본부 장면이었다. 런던판에서는 여성 형사들이 존재한다! 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지자마자, 그녀들은 엘리트 수사팀 안에서의 성적 불평등 역시 세련되게 시사해 보여줬다. 한국판 〈데스노트〉에서도 언젠가 이런 변화를 볼 수 있을까?

사진: Manuel Harlan
일본·한국에서 런던으로, 또 하나의 〈데스노트〉
세 가지 버전의 〈데스노트〉를 보고 나니, 이번 런던판을 통해 오히려 한국판에서 내가 좋아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선명하게 보였다.
한국 프로덕션이 인물과 인물 사이의 관계성과 영향력에 큰 비중을 두었다면, 런던 프로덕션은 개별 캐릭터의 존재감과 주체성, 각각의 임팩트를 보다 강하게 전면에 내세운다. 미사는 자신의 욕망을 직접 행동으로 옮기고, 라이토는 힘에 빠르게 매료되며, 사신들의 욕망과 목적도 뚜렷하다. 각각의 인물이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로 더 강하게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인 나에게는 그 변화가 반드시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결국 이 작품은 사람과 사람 (혹은 사신…) 사이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라이토와 엘, 미사와 라이토, 라이토와 소이치로, 렘과 미사처럼 서로 다른 인물들이 만나고 영향을 주고받고 변하는 관계가 〈데스노트〉의 정서적인 중심이라고 느껴왔다. 그래서 관계성이 줄어들고 개별 캐릭터의 임팩트가 강해질수록, 오히려 인물에게 감정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지는 조금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어느 버전이 더 낫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새 버전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전 버전에서 무엇이 좋았는지를 다시 발견할 수 있었고, 동시에 한 작품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배웠다. 같은 장면도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덜어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인물과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고, 특히 같은 음악도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특히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권을 오가며 작품을 만나다 보면, 하나의 작품이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전달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곳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던 장면이 다른 곳에서는 낯설 수 있고, 반대로 이전에는 주변에 있던 요소가 새로운 관객에게는 작품을 발견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입구가 될 수도 있다. 이번 런던판에서 기존의 씨어터 관객이 아닌, 원작 만화의 팬들이 극장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그 사실을 더욱 실감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작품의 원래 모습을 얼마나 충실하게 지키느냐만은 아닐 것이다. 그 작품이 새로운 곳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관객이 자신의 방식으로 이야기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찾아주는 것. 런던판 〈데스노트〉는 그 길을 만화와 게임의 언어, 개별 캐릭터의 강한 주체성, 새롭게 구성된 음악과 무대를 통해 찾아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관객의 반응으로 돌아왔다. 연일 이어진 매진과 빠르게 결정된 재공연은 새로운 언어로 다시 만들어진 〈데스노트〉가 새로운 관객에게도 충분히 가닿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작품을 여러 버전으로 본다는 것은 결국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보는 일이 아니다. 그 작품이 걸어갈 수 있는 다른 많은 길을 발견하고 배우는 과정에 가깝다. 이번 런던의 〈데스노트〉 역시 그중 하나의 길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 길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든, 결국 관객에게 닿는 순간 하나의 새로운 〈데스노트〉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