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일, 조아뮤지컬컴퍼니가 준비하던 뮤지컬 <라이프>가 개막을 2주 남겨놓고 돌연 공연이 취소되었다. ‘투자사와의 계약 문제로 공연을 계속 추진하는 것이 무리라는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 제작사 관계자의 설명. 즉 투자금을 유치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2000년 이후 10여 년간 국내 뮤지컬 시장의 비약적인 발전을 일으켰던 거대한 금융자본들, 특히 600억 원에 달하는 뮤지컬 투자 펀드가 조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금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작품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 이에 대해 업계는 ‘이미 예측했던 일’이라면서 ‘뮤지컬 시장의 거품이 빠질 때가 왔다’는 반응이다. 경기침체와 맞물린 성장 하락세의 위기 앞에 놓인 뮤지컬 시장은 금융자본마저 활력을 잃고 있다.
창투사(벤처캐피털 또는 창업투자회사, 신기술 금융회사)와 자산운용사가 운용하는 금융자본이 뮤지컬 시장에 들어온 것은 IMF 이후 삼성영상사업단 등의 대기업이 빠져나가면서부터다. 코스닥의 장기 침체와 더불어 벤처 열풍이 가라앉으면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던 차에 문화산업분야가 새로운 수익모델로 떠오른 것. 영화 시장에의 투자가 봇물처럼 이뤄지고 있던 중에 영화 제작 투자를 목적으로 모은 펀드의 일부가 2000년부터 서서히 뮤지컬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미래에셋창투에서 만든 코리아픽처스가 <렌트>에 지분 참여하고, 일신창투에서 독립해 만든 튜브엔터테인먼트가 창작뮤지컬 <러쉬>에 전액 투자한 것이 그 시작이다. 2001년 사전 제작비 50억 원 전액을 투자자본으로 채운 <오페라의 유령>이 110억 원 규모의 총제작비에도 불구하고 코리아픽처스와 산은캐피탈 등의 투자자들에게 적지 않은 순이익을 남기면서 창투사들의 관심을 모았다. 여기에 대박을 꿈꾸며 수십억 원을 투자한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 <예스터데이>, <아 유 레디?> 등의 잇따른 흥행 참패가 창투사들이 공연시장으로 눈을 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자금 회수 기간이 1~2년인 영화에 비해 투자부터 정산까지 6개월 안에 진행되는 뮤지컬은 단기 투자처를 찾지 못한 펀드들에게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2001년에는 100억 원의 유용 자금을 확보한 세종기술투자의 자회사인 SJ엔터테인먼트가 뮤지컬 사업에 진출해 제미로, 쇼이스트 등의 투자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일신창투와 한솔창투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2002), 게임 제작·유통업체 엔플렉스가 <델라구아다>, <사랑은 비를 타고>, <아가씨와 건달들>, 선우엔터테인먼트와 디스커버리창투, CJ창업투자가 <싱잉 인 더 레인>, 미시건 벤처캐피탈이 <미녀와 야수>에 투자 참여했다. <그리스>, <지킬 앤 하이드>, <미녀와 야수> 등에 투자한 KTB네트워크는 2004년 KTB엔터테인먼트에 30억 원을 증자해 뮤지컬 배우 매니지먼트사 액트원을 설립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뮤지컬 시장 진출을 꾀했다.
본격적인 금융자본이 영입되면서 전에 없는 호기를 맞은 뮤지컬 시장에는 <델라구아다>, <미녀와 야수>, <맘마미아> 등 100억 원대 규모의 대작들이 잇따라 국내에 상륙했고,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 가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많은 해외 작품들이 앞다퉈 국내에 선을 보였다. 2004년 한해 서울에서 올라간 뮤지컬 편수가 70여 편이었던 것이 2005년에 110편으로 늘었고, 2006년 115편, 2007년에는 160편으로 늘어났다. 2006년 이후 작품 편수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것은 다양한 공연펀드들이 출시되면서 많은 자금이 뮤지컬 시장에 흘러들어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2004년 하나은행은 국내 최초의 뮤지컬펀드인 25억 규모의 사모펀드 ‘아이다 펀드’에 이어 2006년에 한일투신운용과 제휴해 러시아 현지에서 공연하는 뮤지컬 <태양이라 불리는 별>에 12억 원을 투자하는 뮤지컬 2호 펀드를 출시해 눈길을 모았다. 이후로는 자산운용사들이 운용하는 사모펀드들이 활기를 띠었다. 투자자가 최대 30명을 넘지 않는 사모펀드는 강남의 거액 자산가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는데, 투자뿐만 아니라 문화 사업에 동참한다는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상품이었다. 마이애셋자산운용은 특별 자산 사모펀드를 운용해 프랑스 뮤지컬 <십계>에 45억 원을 모아 투자했고, <로미오와 줄리엣>에 58억 원을 투자하는 등 뮤지컬, 연극, 전시 분야에 600여억 원을 운용했다. CJ자산운용은 자산운용업계 최초로 240억 원 규모의 공모형 엔터테인먼트펀드를 내놓았고, 인터파크는 골든브릿지자산운용과 함께 국내 최초로 100억 원 규모의 공연관련전문 투자 펀드를 설립해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여기에 2006년부터 시작된 모태펀드 열풍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펀드에 투자하는 펀드’를 의미하는 모태펀드는 2006년 문화산업진흥기금 폐지 이후 문화 활성화를 위한 민간재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주)한국벤처투자에서 관리 및 운용을 진행하고 있으며, 모태펀드에서 출자된 정부자금과 조합원들의 민간자금을 합쳐서 투자조합을 결성, 2007년 1월부터 운영을 시작했다. 현재 공연에 펀드를 운영하고 있는 투자조합은 정부 지원금 60억 원이 포함된 150억 원대의 엠벤처투자와 정부 지원금 50억 원이 포함된 125억 원대의 미시간벤처캐피탈, 각각 정부 지원금 40억 원이 포함된 100억 원대의 스톤브릿지캐피탈(구 IMM인베스트먼트)과 일신창업투자다. 이들 투자조합은 ‘문화산업과 관련된 분야에만 투자할 수 있으며, 공연예술을 포함한 문화산업에 조합 결성금액의 50퍼센트 이상 투자, 창작공연예술 분야에 30퍼센트 이상 투자’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 각 투자조합의 존속 기간은 5~7년. 올해로 3년차에 들어서고 있는 이들 조합의 투자 규모는 지난 2월 기준으로 약 40건, 200억 원 정도이다. 일반적으로 투자조합의 성과를 예측하기까지는 최소 3년 이상의 시간이 걸려 어떤 성과를 논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지만, 수익성 보장이 힘든 창작뮤지컬이나 중소뮤지컬 제작사보다 해외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이나 유명 제작사의 투자로 흘러가는 듯한 분위기다.
한때 ‘마음만 먹으면 제작비 100퍼센트를 투자받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금융자본이 뮤지컬 시장에 유입되었지만 현재까지 활성하게 운용되는 자금은 많지 않은 듯하다. 현재 인터파크INT(<드림 걸즈>, <영웅을 기다리며>, <시카고>, <맘마미아>), KTB캐피탈(<드림 걸즈>), 엠벤처투자(<그리스>, <삼총사>, <사랑은 비를 타고>), CJ창업투자(<삼총사>), 이수창업투자(<카페인>) 정도만이 뮤지컬 제작투자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 금융자본은 왜 뮤지컬 시장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것일까? 경기 침체가 미친 영향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금융자본이 뮤지컬 시장에서 기대했던 수익률을 얻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뮤지컬 산업에 대한 창투사들의 이해 부족은 낮은 수익률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뮤지컬 투자는 손실이 나면 최대 30퍼센트까지도 나는데 수익은 고작해야 5~10퍼센트 정도이기 때문이다. 펀드는 정해진 시간 내에 최대의 수익을 내는 것이 목표이고, 저축이 아닌 투자를 하는 이상 은행 이자 이상의 이윤을 남겨야 하는 숙제가 주어진다. 연속성을 가지고 장기 투자를 하기보다는 수익 내기에 급급한 한탕주의적인 투자를 주로 해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흥행 가능성이 있는 대형 뮤지컬이나 유명 배우가 출연하는 작품에 투자가 몰리고, 흥행을 장담하기 힘든 중소형 뮤지컬들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거나 아예 투자가 이뤄지지 않을 때가 많은 이유도 마찬가지다. 리스크가 작을수록 수익률이 적고 리스크가 클수록 수익률이 높은 것이 투자의 기본 법칙. 이미 다 세팅해놓은 작품에 소액 투자를 해놓고 높은 수익률을 기대하는 것은 투자사의 욕심일 뿐이다. 여기에 새로운 공연 콘텐츠를 활용할 수 있는 시장이 한정되어 있다는 점과 인건비를 포함한 제작비가 증가한 것도 수익률을 낮추는 데 한몫한다. 영화 시장의 흥망을 경험한 투자자들의 일부는 뮤지컬 시장에서의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하기 위해 원금 보장, 더 나아가 약 15퍼센트에 달하는 수익률까지 보장해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많다. 10억 원을 투자해줄 테니 11억5천만 원을 달라는 얘기다. 제작 경험이 많고 수익성이 크고 안정된 레퍼토리를 가진 제작사들에게는 얼토당토않은, 고리대금이나 다름없는 조건이었지만, ‘대박’을 기대하며 뮤지컬 시장에 뛰어든 많은 제작자들은 이를 받아들였고 그 돈으로 뮤지컬을 무대에 올렸다. 이런 방식의 제작이 많아지다 보니 작품 편수가 급격하게 늘어났고, 제작을 하겠다는 사람만큼 투자하겠다는 사람도 늘어났다. 그러다보니 투자의 형태는 정석에서 벗어나 투자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옮겨갔고, 작품을 올려도 제작자들에게는 남는 것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부 제작사의 경우이긴 하지만 일한 만큼의 대가도 받지 못하게 되자 제작비에 포함되지 않는 회사의 인건비 등을 공연제작비에 포함시켰고 그렇게 해서 제작비가 늘어나게 되었다. 문제는 원금 보장 등의 조건을 두고 투자한 작품들이 흥행에 실패하고 제작사로부터 자금 회수가 불가능해졌을 경우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투자자들이 뮤지컬 시장을 떠났고,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서야 뮤지컬 시장을 이해한 투자자들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결국 투자자는 투자할 작품뿐만 아니라 만드는 사람들, 회사의 안정성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하며, 어느 정도의 리스크는 부담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된 것이다.
투자위축이라는 상황을 이제 막 궤도에 오른 한국 뮤지컬의 기세를 꺾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시스템을 만들어가기 위한 일종의 구조조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금융자본과의 파트너십은 성과와 손실을 골고루 나누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뮤지컬 시장이 균형 있게 발전하기 위한 자본을 계속해서 끌어들이려면 투자사들에게 뮤지컬 시장이 돈이 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국내 뮤지컬 제작사들 중 외부로부터의 수혈 없이 스스로 제작비를 마련할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되겠는가. 뮤지컬 투자 회사는 반드시 필요하다. 다행인 것은 비록 수익률이 낮다고 하더라도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대박’의 기회가 있고, 회전율이 빠르다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투자자들은 꾸준히 들어올 것이라는 점이다. 엠벤처 김지웅 이사는 “전체적인 뮤지컬 시장의 규모가 줄어든 것은 맞지만 2~3년 안에 시장이 두 배가 될 것으로 본다. 펀드 투자가 필요한 것은 초연 공연이나 창작물, 작은 제작사일 것이다. 2~3차례 앙코르 공연까지는 투자한다고 생각하고 장기 투자가 필요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새롭게 등장하는 투자사들은 작품 선택과 제작 관리를 허술하게 가져가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투자사는 준비된 시장 분석을 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를 통해 콘텐츠의 흥행성뿐만 아니라 제작사의 수익구조와 안정성 등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투자지출 부분에 대한 검토를 더욱 엄격하게 진행하려 할 것이다. 이에 제작사는 금융자본을 받아들일 수 있는 투명한 회계정산 시스템을 하루빨리 갖춰야 한다. 객관적인 데이터 수익구조가 투명하게 제시되어야 활발한 투자 시장이 마련될 수 있다. 이것은 뮤지컬 시장에 관심을 두고 있는 신규 투자사들의 진입을 이끌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펀드가 단순히 수익창출만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투자사도 제작사와 마찬가지로 시장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는 모델이 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제작사와 투자사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의 시간을 들이고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인다면 뮤지컬 시장에의 투자는 지속적으로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