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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Culture In Musical] 엠마와 그 자매들의 삶 [No.88]

글 |김영주 2011-01-15 5,905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가 영국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서 출발한 작품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만 이 소설은 정독한 사람에 비해 줄거리만 아는 사람이 현저히 많은 작품이라, 우아한 귀족 영애 엠마 커루 양이나 불운한 거리의 여인 루시가 원작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상당수다. 사실 원작 소설에서 헨리 지킬은 의학 박사이자 민법학 박사이며 법학 박사이자 왕립협회 회원씩이나 되는 연륜 있는 인물로, 아리따운 여인들과 사랑의 고뇌에 빠지기에는 이미 나이가 적잖다. 게다가 원작자는 헨리 지킬의 여성 관계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주인공이 고결한 영혼과 희생정신을 가졌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파멸하고 만 비극적인 영웅이라면, 원작 소설의 지킬은 완벽한 신사이고자 하는 오만한 자기애와 어두운 욕망이 양쪽 다 너무 강해서 위선의 가면으로도 타협을 할 수 없었던 남자다. 원작 소설이 어둡고 음습한 자아 분열을 통해 영국식 위선의 이면을 철저하게 까발리는 데 몰두하고 있는 사이에, 브로드웨이의 닥터 지킬은 매력적인 두 여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임상 실험 부작용에 몸부림친다.


엠마와 루시의 기원이 되는 여성 캐릭터는 태평양 건너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흑백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영화화된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는 보통 요조숙녀인 피앙세와 요염한 팜므파탈이 한 명씩 등장하는데, 이름도 제각각이지만 약혼녀는 ‘미스 커루’일 때가 많고, 팜므파탈은 ‘아이비’라는 이름을 많이 쓴다. 초창기 <지킬 앤 하이드>에서는 지킬의 약혼녀 이름이 리사 커루였는데, 아무래도 엠마 쪽이 댄버스 커루 경의 따님에게 더 어울리는 고전적인 이름이기는 하다.

 

 

 


엠마는 관객들의 흥미를 모으는 장치인 삼각관계로 드라마를 강화하기 위한 캐릭터지만, 작품의 배경이 된 빅토리아 시대 상류 사회의 분위기와 여성의 삶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역할도 한다. 첫 등장부터 귀한 댁 아가씨임을 알 수 있는 엠마는 그 유명한 아리아 ‘원스 어폰 어 드림’의 선율만큼이나 온화하고 우아한 공주님 타입으로 그려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사실 그녀의 대사나 주요 설정을 보면 오히려 개화기의 ‘신여성’에 가까운 강단 있는 여인이다. 좋게 말해서 강단이 있다는 것이지, 당시 기준으로는 이단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 남편감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인데 그 상대가 기이한 발상으로 악명 높은 정신과 의사, 게다가 아버지가 정신병자로 감금되어 있는 남자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19세기에 정신질환이란 격리와 추방으로 사회에서 지워버려야 하는 치욕적인 천형으로 여겨졌다. 어쩌면 엠마는 고딕 취향을 가진 위험한 여자라는 악성 루머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원작이나 뮤지컬이나 시대적 배경은 정확히 명시되지 않고 18xx년, 또는 19세기로만 묘사되는데 작품이 발표된 해가 1886년이었으니 그즈음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후기 빅토리아 시대에 해당하는 이 무렵 남자 이름 뒤에 숨어서 소설을 발표해야 했던 샬롯 브론테가 아이를 낳다가 목숨을 잃었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게 될 버지니아 울프가 태어났다. 상류층 여성이면서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결혼 상대를 스스로 결정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직업을 가졌던 여인으로는 그림 동화  『피터 래빗』으로 유명한 베아트릭스 포터가 있었다. 


반세기 전보다는 여성에 대한 억압이 다소 헐거워졌다지만, 세상은 여전히 남자들의 선택에 따라 움직였고 여성의 미덕은 오직 순종, 의무는 출산과 육아에 한정돼 있었다. 여성은 신체적으로나 금전적으로 부당한 일을 당하더라도 남편의 이름으로만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고, 대부분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없었으며, 투표를 할 수도, 공적인 직위를 가질 수도 없었다. 영국에서 가장 고귀한 단 한 사람의 여성만이 예외였는데, 그녀의 직위는 여왕이었다. 영국의 주인이자 인도의 여제인 빅토리아 여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명목상의 지배자이자 도덕적으로 완벽한 가정의 안주인으로서 온 나라가 본받아야 할 모범이었다.

 

 

 


시대의 보편적인 규범에 저항하고도 불행해지지 않은 베아트릭스 포터의 승리가 가능한 시기였지만, 베아트릭스 포터 외에 그런 ‘승리자’가 누가 있었는지 한참을 헤아려도 더는 생각나는 이름이 없을 만큼 암울한 시대였다. 상류층 여성들은 공개된 자리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흉이 될 만큼 온갖 인습에 얽매여 있었고, 신사들은 그런 정숙한 아내와 함께 존경받을 만한 삶을 살아가는 틈틈이 창부들과 놀아났다. 어떤 시대보다 보수적이고 도덕적이었던 19세기에 매춘부의 수는 오히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산업화와 성차별이 맞물린 결과였다.


산업혁명 초기에 속수무책으로 착취당했던 노동자들은 서서히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연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성은 그 과정에서도 소외되어 있었는데 이는 여성 고용인의 임금이 남성 고용인의 임금의 절반이나 최저 1/20에 불과했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교육을 받을 기회와 일할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가난한 집 딸들은 어린 시절부터 재봉사나 하녀로 부림을 당했고, 공장이나 광산에서 과도한 노동력을 착취당하면서 척추뼈가 휘고 어깨가 굽는 직업병을 갖게 된다. 이런 참혹한 현실 속에서 음지에서 성행하는 윤락업소는 어린 소녀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었다. 그곳에서는 위선에 찬 신사들과 광기에 사로잡힌 연쇄 살인범들이 기댈 곳 없는 가난한 소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러내 보이는 나와 진짜 나 사이에 간극이 생기는 것은 사회화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이 분열이 도를 지나치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런던의 뒷골목에서는 긴 코트 안에 몸을 숨긴 하이드 씨와 면도날을 휘두르는 스위니 토드, 결코 정체를 들키지 않는 잭 더 리퍼가 사람의 형상을 갖게 된 시대의 광기인 양 날뛰고 있었다. 엠마는 이 위선의 시대 한복판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면서도 나름의 의지와 판단력을 가지고 운명을 선택한 여성이었으나, 그녀가 선택한 남자와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달콤한 명제를 증명할 수는 없었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8호 2011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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