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의 모든 이야기는 객석 앞에 놓여 있는 네모난 무대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신데렐라에게 부려진 마술처럼 마차도 왕자도 무도회장도 모두 무대 위에 나타나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실제인 것처럼 그리고 더하고 깎아내어도 무대 위 세트는 허구에 불과한 것이지만, 주인공이 속하는 공간은 어떤 형태로든 무대 위에 존재한다. 그리고 주인공의 움직임에 따라, 관객이 보는 앞에서 무대 위의 시공간도 바뀐다. 일상에서 활보하는 공간부터 실제로 경험할 수 없는 공간까지 무대 위에서 모든 걸 보고자 하는 욕망은 관객과 창작자 모두를 자극하고, 그런 바람은 무대에 감쪽같고 아름다운 마술을 부려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이도록 부추기고 있다. 막을 내리기 전까지 그 마술이 유효하도록, 관객이 속고도 그들의 감각이 이성을 제어하도록 무대 기술은 점점 진화하고 있다.
기본적인 공간 변화 방식
극장의 무대 상부에는 기본적으로 배튼(Batten)이 구비되어 있다. 배튼은 장치 걸이대로 조명이나 세트, 배경막을 걸기 위해 이용된다. 배튼에 배경막을 설치하고 수동, 또는 전동 방식으로 승하강시키면 가장 기본적인 장면 전환이 가능하다. 극장 내 구비량과 설치물의 하중, 장면 전환에 필요한 속도와 시간을 계산하여 배튼의 사용량과 방식이 정리된다.
브리지(Bridge)는 무대 상부에서 내려와 새로운 공간을 창출한다. 브리지는 단어 그대로, 무대 양쪽의 큰 기둥 사이를 연결하며 매달려 있는 다리이다. 이것은 <오페라의 유령>에서 팬텀과 크리스틴이 지하 미궁을 향해 내려갔던 경사진 계단을 떠올려보면 된다.
무대 하부, 즉 바닥이 전환되는 형태는 뮤지컬을 좀 본 관객이라면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왜건(Wagon) 또는 트럭(Truck)이라 칭하는 이동 무대는 무대의 양옆과 뒤에서부터 중앙 쪽으로 이동하여 작품 속 공간적 배경을 바꾼다. 암전 상태에서 무대 크루가 직접 이동 무대를 밀고 나오기도 하고, 트랙 위에 세트를 올리고 모터를 이용해서 자동으로 이동시키기도 한다. 극장별 설비 상태에 따라서, 본 무대 위로 세트를 실은 트럭이 들어오기도 하고, 본 무대가 아래로 내려가면 새로운 무대가 본 무대가 있었던 위치로 삽입되는 방식으로 무대의 전환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오페라는 각 막에서 장면의 전환이 많지 않고 하나의 배경에서 극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서, 막별로 완성된 세트가 준비되어 있다가 무대의 양옆 또는 뒤에서 통째로 들어오고 나가는 방식을 주로 사용한다. 이 경우 관객에게 노출된 무대 좌우에 관객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대 크기만큼의 공간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어야 가능하다. 대부분의 극장에는 이를 소화할 만한 공간적 여유가 없지만,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는 이에 적합한 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오페라 상연이 가능하다.
무대 바닥이 위로 올라가거나 아래로 내려감으로써 세트나 대도구, 또는 배우가 등퇴장하는 형태를 종종 볼 수 있는데, <빌리 엘리어트>의 마지막 부분에서 무대 뒤쪽의 일부가 하강하면서 빌리의 아버지를 포함한 마을 어른들이 지하 탄광으로 내려가는 모습이 연출되었고 <금발이 너무해>에서는 엘의 부모님과 친구들 또는 캘러한 교수가 무대 아래에서부터 등장하거나, 아래로 사라져 재미를 더했다.
무대라는 정지된 공간에서 연기해야 하는 한계에서 벗어나 동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회전 무대가 사용되기도 한다. 회전 무대는 방향과 속도를 달리하거나 승강 장치의 도움으로 나선형 무대로 변신함으로써 배경 전환과 공간 연출에 큰 전시 효과를 준다. 회전 무대는 자전거 바퀴가 체인으로 굴러가는 방식을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자전거가 선 채로 움직인다면, 무대 아래의 체인은 눕혀진 상태에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듯하다. <명성황후>, <잭 더 리퍼>, <서편제>, <피맛골 연가> 등 최근 많은 작품에서 회전 무대를 활용했다.
여기서 조금 더 진화한 것이 <맘마미아>의 자동화 무대이다. <맘마미아>의 세트는 겉보기엔 굉장히 간단하지만 무대 바닥 아래에 유선형, 에스자형 등의 트랙이 굉장히 복잡하게 설치되어 있다. 그 위에서 곡선의 두 벽이 유연하게 움직인 결과, 관객들은 다양한 공간으로 자동 변신하는 무대를 즐길 수 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내부 배튼 시설 샤롯데씨어터 무대 내부
엘 우즈는 무대 아래서 상승하는 무대로 첫 등장한다 <빌리 엘리어트> 지하 탄광으로 내려가는 무대
자동화 기술의 발전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자동화 기술이 발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엄청난 인건비와 협소한 극장 공간 때문이다. 인력으로 대규모의 세트와 배경막을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무대 양옆에 세트를 보관해둘 공간과 더불어 무대 크루들이 대기하고 움직일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다. 그다지 크다고는 볼 수 없는 대부분의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방대해지는 세트의 크기와 수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기계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벽의 전면과 후면의 이미지를 달리하고 회전시켜서 세트의 수를 감소시키고, 일부 세트는 무대 아래에 넣어두었다가 필요할 때만 꺼내 쓰는 등의 방법으로 경제적인 공간 운용이 가능해졌다. 무엇보다 자동화된 세트는 인력 낭비를 막는다.
작품의 규모와 성향에 맞게 무대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나, 과거에 비하면 많은 뮤지컬들이 무대의 기계화와 자동화를 도입하고 있다. 자동화 무대를 설치하는 데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고 오퍼레이터의 실수나 기계의 오류로 오작동되는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연의 질을 높이기 위해 무대 운용의 자동화를 선호하는 추세이다. 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도 눈에 보이는 인위적인 동력 없이 무대가 자연스럽게 전환되는 것을 보는 재미, 즉 관객에게 신비감을 주기 위함이다.
이미 초연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오페라의 유령>에서 무대 아래에 숨겨져 있던 촛대가 무대 위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거나, 물도 없는 호수 위로 보트가 유유히 떠내려 와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미스 사이공> 무대에는 실물 헬리콥터가 등장하기도 했다. 인간이 늘 원하는, 날고자 하는 욕망을 반영한 듯이 와이어를 이용한 플라잉 기술이 도입되어 사람이나 사물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처음 보았을 때 관객들은 그 생소함과 경외감에 탄성을 질렀을 것이다.
이동 무대 시스템
최근 무대 기술의 양상
최근의 뮤지컬 무대 기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영상의 활용이다. 공간적 제약을 극복하기 위함인데 배경막에 영상을 투사하는 것만으로도 특정 공간과 분위기를 표현해낼 수 있다. 무대에서 기능하는 모든 기술이 그렇지만, 영상 역시 단독으로 쓰이기보다는 다른 요소들과 합을 맞추었을 때 그 효과가 증대된다. 예를 들면, <영웅>의 명장면으로 손꼽히는, 기차가 등장하는 장면처럼 말이다. 스크린에 투사된 이미지는 달리는 기차를 보여주고 있다. 날리는 눈보라의 이미지와 바람이 기차의 속도감을 더한다. 어느 순간 스크린의 영상 이미지는 사라지고, 바로 그 자리에 객차 내부에서 대화하는 설희와 이토가 나타난다. 이 기차가 하얼빈 역에 도착할 때는 속도를 늦추며 플랫폼에 진입하는 영상이 보이다가, 기차가 멈추는 순간 영상은 사라지고 실제 기차 세트가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어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스크린에 영상을 투사하는 동시에 스크린이 분할하고 있는 공간의 어느 쪽 - 스크린 앞 또는 뒤 - 에 조명을 밝히느냐에 따라, 또 달리는 기차의 음향을 조절함에 따라 열차의 외관과 객차 내부가 한 무대에서 구현되었다.
<영웅> 영상과 실물이 교차했던 장면
<몬테크리스토>에서 몬테크리스토가 감옥에서 탈출하는 장면 역시 영상과 조명 기술의 협력에 플라잉 기술이 더해져 가능했다. 와이어에 의지한 배우가 물 속에서 헤엄쳐 나오는 듯이 무대 아래에서 위로 떠오르는 동안, 관객의 가장 가까이 - 무대의 가장 전면에 놓인 샤막에는 물 기포 영상이 투사되어 물 속에 있는 듯했다. 순식간에 멀리 배 한 척이 떠 있는 수면 위의 영상으로 바뀌어 몬테크리스토가 물 위로 빠져나온 듯한 효과를 주었다. 조명이 비추지 않는 곳은 관객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 조명은 와이어에 매달린 배우만을 쫓음으로써 다른 장치들이 노출되지 않도록 도왔다. 플라잉 기술과 영상, 조명의 정확한 큐가 짧은 순간이지만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장면을 완성시켰다.
플라잉 기술은 수동식과 기계식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띄워야 하는 사람 및 물체의 하중에 따라 어느 정도의 힘이 필요한지 가늠한 후 사람의 힘으로 하기도 하고 기계의 힘을 빌리기도 한다. 좀 더 섬세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하기 위해 사람이 직접 조종하는 경우도 있다. <빌리 엘리어트>의 ‘Dream Ballet’ 장면에서는 발레리노가 된 미래의 자신과 춤을 추던 빌리가 하늘을 나는 모습을 연출해 빌리의 꿈을 환상적으로 그려냈다. 와이어 장치를 몸에 매단 빌리를 서서히 공중으로 띄워 날개 단 듯 하늘을 날도록 만든 것은 모두 사람의 힘이다. 무대감독이 와이어의 상승과 하강을 조정할 때, 성인 빌리는 좌우로 날 수 있도록 어린 빌리의 몸을 직접 들어 날려 보낸다. 이들과 더불어 어린 빌리가 수많은 연습을 한 결과 유려하게 ‘Dream Ballet’ 장면을 만들어냈다. 무대 바닥에 트랙을 깔듯이 무대 상부에도 트랙을 설치하면 와이어의 움직임을 상하좌우로 모두 조종할 수 있다. 플라잉의 방향이 획일적일 때는 기계의 도움을 받는 편이 효과적이지만, 감정과 정서를 부합시켜 움직여야 할 때는 아직까지도 사람의 힘이 이용된다.
<남한산성> 와이어 기술을 표현한 청 황제의 위용
사람이 공중에 뜰 때 말고도 와이어 기술이 사용된다. <남한산성>에서 조선을 침략한 홍 타이지의 위협적인 후광을 형상화했던 장면을 떠올려보자. 반원형으로 펼쳐진 살 하나하나에 와이어가 연결되어 있었고, 기계로 조종하여 붉은 천 하나하나가 쫙 펼쳐졌다가 다시 반대편으로 끌려들어 가도록 고안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시선을 압도하는 붉은 천이 무대 위를 가득 채워 청나라 황제의 위압적인 태도를 표현했다.
다양한 무대 기술들을 사용할 때 가장 주의해야할 점은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무대 장치의 움직임은 조명과 음향, 특수 효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드라마, 음악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내부에 어떤 기계 장치가 숨어있으며 어떤 트릭을 썼는지 드러나면 재미가 반감할 터, 무대 안에 숨겨진 기술들을 필요한 순간에만 공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보다 우선적으로 드라마와 음악에 관객을 몰입시키되, 무대 장치는 극을 뒷받침하는 기술로써 활용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국내 기술력의 진화
뮤지컬의 경우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서 우리보다 앞선 기술을 갖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들의 작품은 물론 무대 기술까지도 수입하고 있다. 전수받은 무대 기술은 창작 작품에 도입되어, 우리 손으로 만든 작품의 수준을 높인다. 무대 기술 운용에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전문 공연 제작사 쇼텍라인(대표 김석국)은 해외의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무대 기술 장치를 개발하고 있다. 2009년에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최한 콘텐츠 페어에서 직접 개발한 오토 왜건을 선보이기도 했다. 오토 왜건 기술은 무대 위의 정해진 위치로 이동하도록, 즉 A에서 시작하여 B를 지나 C까지 몇 초 안에 어떤 방향으로 이동해야 하는지 명령을 입력하고 무선으로 지시했을 때 기계가 알아서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다. <오페라의 유령>에서 지하 미궁에 도착한 보트를 이끌었던 기술과 같은 것이다. 오토 왜건은 직선, 사선, 회전, 유선 등으로 움직이며 무선으로 컨트롤 가능하다. 그 위에 사람이나 대소도구를 올려놓고 자동으로 이동하도록 활용할 수 있다. 2010년 연극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에서 침대와 사람을 이동시키는 데 쇼텍라인의 기술을 사용한 바 있다. 하지만 외형적인 내구성, 안전성, 기계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여전히 문제점을 개선하는 중이다. 더 정확하고 안전하게 기능하도록 미흡한 부분을 보완하고 나면 국내 기술의 오토 왜건이 상용화될 것이다.
쇼텍라인에서 추가로 개발할 계획을 갖고 있는 기술은 3D 와이어 플라잉 기술이다. 현재 무대에서 사용되는 플라잉 기술은 수직 또는 수평으로 2차원적인 것이다. 앞으로는 어떠한 공간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3D 와이어 플라잉 기술을 개발 중이다. 얼마 전 브로드웨이에서 화제 속에 개막한 <스파이더 맨>에서 스파이더 맨 특유의 자유자재의 비상을 도와준 것이 이 3D 와이어 플라잉 기술이다. 3D는 스크린에서도 빠르게 도입되고 있는 추세이니, 뮤지컬에서 많이 활용하고 있는 영상 기술에 곧 3D 영상이 추가되어 입체감 있는 볼거리를 제공하리라는 기대도 해봄직하다.
성장하는 로봇도 쇼텍라인의 목표점이다. 나무나 식물이 자라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포부이다. 이런 기술이 개발되면 무대 위에서 아주 작은 나무가 점점 커서 꽃이 피고, 그 꽃이 지고 나서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까지 볼 수 있다. 기계로 자연을 표현한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라, 얼마나 현실감 있게 표현될지 미지수지만 쇼텍라인은 무대에서 새로운 기술을 선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최하는 문화기술 CT(Culture Technology) 지원 사업에 응모해 채택된 사안으로, 2010년 5월부터 3년 계획으로 개발 진행 중이니 곧 새로운 기술을 직접 경험할 수 있을 듯하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8호 2011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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