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지도, 넓지도 않은 한국 뮤지컬의 역사에서 학전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단체이다.
뮤지컬이 달콤한 환상의 구름 위에 지어진 화려한 성채라고 믿는 이들에게 한없는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이 극단은
외따로 서서 고집스럽게 뿌리내린 나무 한 그루처럼 지난 20년을 버텨왔다.
뮤지컬이 공연 산업의 꽃으로 각광받으며 화려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했을 때도, 정신없이 몰려들던 자본이 모래처럼
흩어질 때도, 학전은 아랑곳하지 않고 애초에 붙잡고 있던 숙제에만 몰두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인 뮤지컬이 아니라, 넋을 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닫힌 세상 속에 질문을 던지는 뮤지컬이 가능하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학전이 지난 20년간 풀고 있는 숙제다.
학전의 영광은 그들이 배출한 스타 배우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해외 공연과 4000회 공연을 기록한
<지하철 1호선>의 기적 같은 성과에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위기와 고난에도 여전히 현실에 대한 꿈을 붙들고 있는
한 사람의 진심과 의지, 그리고 그 한 사람과 함께 꿈꾸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있다.
지난 3월 10일 막을 올린 학전 20주년 기념 공연을 중심으로 정리한 이번 기획에서는 이 유일무이한 단체를
이끌어가는 김민기 대표와의 인터뷰, 그의 지기이자 대중문화평론가인 성공회대 김창남 교수의 기고문, 그리고
공연 준비 과정과 뒤풀이 현장까지 담아낸 화보를 정리했다. (편집자 주)
동숭동의 대학로가 그 이름을 갖게 된 건 오래 전 그 자리에 서울대 문리대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리대란 존재가 가졌던 어떤 이미지, 이를테면 젊은 대학생의 낭만과 이상, 현실 비판적 지성 같은 것들이 그 이름에 담겨 있는 셈이지만 지금 대학로에서 그런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온갖 화려한 자본주의 소비문화의 복잡한 진열장처럼 보이는 그곳이 그래도 여전히 대학로다운 색깔을 한구석 가지고 있다면, 그건 갈피갈피에 자리 잡고 있는 소극장, 공연장들 때문이다. 요즘은 그나마도 싸구려 유흥물과 그리 다르지 않은 부박한 공연물들이 넘쳐난다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지성과 예술의 이름에 값하는 공연들이 그 속에 살아 있고 대학로란 이름의 상징성은 그들로 인해 빛을 유지하고 있다. ‘학전’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무겁게 빛나는 이름이다. 한국 사회가 우여곡절을 겪으며 변화하고 대학로가 소비문화로 물들어 가는 동안 학전은 시종 재미있으면서 의미 있고, 트렌드를 빗겨가지 않으면서 무거운 문제의식을 던지는 공연을 지속해 왔다. 그 세월이 올해로 20년을 맞는다. 지난 20년 동안 학전은 가장 믿을 수 있는 공연 브랜드로 자리 잡아왔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학전이란 브랜드 뒤에는 김민기란 이름이 있다. 김민기는 학전소극장과 극단 학전의 대표이자 학전의 거의 모든 레퍼토리를 직접 기획, 번안, 연출해 온 학전의 역사 그 자체다. 학전이란 브랜드가 자리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김민기라는 브랜드에 대한 신뢰가 뒷받침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김민기 대표와 오랜 친분을 갖고 있다. 그를 김민기라는 객관적 호칭으로 부르는 건 내게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내게 혈육이나 다름없는 ‘민기 형’이다. 민기 형과의 인연 덕에 나는 지난 20년 동안 학전을 자주 들락거렸고 거기서 벌어지는 많은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학전의 20년은 한국 공연 문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지켜보며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었던 나 자신의 소중한 20년 역사이기도 하다.
학전소극장이 처음 문을 연 건 1991년이다. 당시에는 뮤지션들의 작은 콘서트가 주로 열렸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나 김광석, 안치환, 조규찬, 장필순 등의 포크 콘서트를 비롯해 재즈, 클래식, 국악 등 TV에서는 보기 어려운 다양한 음악들이 이 무대를 통해 대중을 만났다. 당시만 해도 뮤지션들의 콘서트가 소극장에서 열리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럴 만한 무대도 많지 않았고 주로 대형 강당이나 체육관에서 단기간에 콘서트를 여는 게 일반적이었다. 대형 무대와 소극장 무대는 객석의 규모만이 아니라 뮤지션이 음악과 관객을 대하는 태도나 분위기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관객의 호흡을 몸으로 느끼게 되는 소극장의 작은 공간에서 뮤지션들은 자신의 음악성에 대해 좀 더 디테일하게 고민하게 된다. 학전 이후 대학로를 중심으로 소극장 무대들이 늘어났고 뮤지션들의 소극장 콘서트가 크게 늘었다. TV를 비롯한 매스미디어가 문화 권력을 장악한 시대에 소극장 무대는 음악성 있는 뮤지션들이 관객을 만날 수 있는 마이크로한 대안적 무대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그런 대안적 무대는 TV에 조금이나마 영향을 주며 새로운 시도를 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학전 초창기 소극장 콘서트 무대의 의미를 크게 부각시켰던 것이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다. 학전에서 시작된 이 음악회는 결국 TV무대로 진출했고 이후 라이브 음악을 들려주는 심야 음악 프로그램의 시초가 되었다.
학전의 라이브 콘서트를 이야기할 때 김광석을 빼놓을 수는 없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동물원을 거쳐 솔로로 나선 김광석이 자신의 진가를 보여줄 수 있었던 가장 좋은 무대가 학전이었다. 그는 매년 이 무대에 서면서 스스로 빼어난 가수임을 보여주었고 라이브 콘서트 1,000회 기록 역시 이 무대에서 세웠다. 학전 무대에서 통기타를 메고 관객들에게 특유의 너스레를 들려주며 열창하던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런 인연으로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학전을 중심으로 김광석기념사업회가 만들어졌고 민기 형이 대표를 맡았다. 지난 2008년에는 학전블루 소극장 앞에 그의 생전 모습을 새긴 추모비가 세워짐으로써 김광석이란 이름은 학전의 역사에서 뗄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학전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린 작품은 <지하철1호선>이다. 독일 그립스 극단의 원작을 번안한 이 작품은 이후 조금씩 설정과 내용을 시대에 맞게 변화시키며 장기 공연되었고 마침내 4,000회 공연이란 기록을 세우며 한국의 공연 역사를 새롭게 써냈다. 나는 이 작품을 정확히 몇 번 보았는지 기억도 못할 만큼 여러 번 관람했는데 볼 때마다 가장 놀라웠던 건 도무지 외국 작품의 번안물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한국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지방 공연 중 만난 록밴드 가수와 사랑에 빠진 시골 처녀가 그를 찾아 서베를린을 찾는다는 원작의 설정을, 백두산 관광단의 일원으로 연변을 다녀간 청년을 찾아 서울로 온 연변 처녀라는 설정으로 바꾼 내용도 기발하지만, 더 놀라운 건 작품 속의 모든 음악과 노랫말이 마치 오리지널 창작물처럼 입과 귀에 짝 달라붙도록 자연스럽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민기 형이 뮤지컬 연출가 이전에 뛰어난 싱어송라이터였다는 점을 새삼 일깨우는 대목이다. 2000년, 이 작품이 독일보다 먼저 1,000회 공연을 돌파했을 때 독일산 맥주 한 드럼을 들고 축하차 방문한 이 작품의 원작자 볼커 루드비히와 작곡가 비르거 하이만은 “이 작품은 이제 우리 것이 아니다. 이건 김민기의 것이다”라며 더 이상 저작권료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한국 공연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렇듯 한국화된 <지하철 1호선>은 원작의 고향인 독일은 물론 일본, 중국 등에서 호평을 받으며 한국 공연 문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인정받은 바 있다.
<지하철 1호선> 이후 <모스키토>, <의형제> 등이 속속 무대에 올려지면서 학전은 한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뮤지컬 극단이자 공연장으로 자리잡았다. 두 작품 모두 외국 작품이지만 역시 번안의 흔적을 느낄 수 없을 만큼 한국화된 작품으로 평단과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이런 대표 레퍼토리들이 공연되면서 방은진, 설경구, 황정민, 조승우 등 최고의 연기자들이 배출되었고 학전은 ‘스타의 산실’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지금도 학전의 뮤지컬은 능력있는 배우를 발굴하고 키워내는 최고의 무대로 인정받고 있다.
최근 민기 형은 어린이용 뮤지컬 작품에 집중하고 있다. <우리는 친구다> <고추장 떡볶이> <슈퍼맨처럼> <분홍병사> 등 학전의 어린이 뮤지컬은 어린이들에게 우정에 대하여,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하여, 생명과 평화의 소중함에 대해 조근조근 이야기해주는 교육적인 내용의 작품들이다. <지하철 1호선> 상설 공연을 끝내고 어린이 뮤지컬에 집중하면서 학전의 살림은 많이 어려워진 것으로 보인다. 허접한 뮤지컬들이 넘쳐나는 와중에 민기 형이 지치지 않고 고군분투하며 만들어낸 작품들이 그에 합당한 호응을 얻지 못하는 건 옆에서 지켜보는 내 입장에서도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학전 무대에 한국적이면서 교육적이고 재미있으면서 현실의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는 작품들이 계속 선보일 것임을 의심해 본 적은 없다. 이건 학전의 지난 20년이 우리에게 준 믿음이고 민기 형에 대한 내 믿음이기도 하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1호 2011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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