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들에게 극장은 제2의 집 같은 공간이라고 하면 너무 과장된 말일까. 극장이 친숙한 공간임은 사실일 것이다. 여섯 명의 배우들에게 좋아하는 극장과 극장의 주변, 그 중에서도 특별한 장소를 물었다.
서범석
대학로 낙산공원에 자주 가요. 2000년인가, 2002년인가 대학로에서 공연을 하던 때였는데 낙산공원이 어딘가 싶어 천천히 올라가 봤더니 아주 좋더라고요. 그 이후에 대본이 잘 안 풀릴 때나 마음이 답답할 때면 올라가요. 거기 팔각정이 있는데, 거기서 탁 트인 대학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 마음이 개운해지고, 머릿속이 시원해져요. 최근에도 <미드 썸머> 연습을 하다가 잘 안 풀려서 올라갔는데, 새로운 에너지를 받고 왔죠.(웃음) 1시간 코스로 땀 흘리며 올라갔다 내려오기 딱 좋아요. 아, 나만의 공간으로 남겨두고 싶었는데!
안유진
분장실 안에 있는 화장실!(웃음) 정말 중요해요. 전 목을 풀 때 화장실에서 풀거든요. 어렸을 때 집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은데, 언니들이 시끄럽다고 해서 늘 화장실에서 노래를 부르곤 했어요. 저만의 공간이었던 거죠. 또, 제가 까마득한 후배였을 때도 연습을 많이 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공간이 화장실 밖에 없었죠. 그렇게 화장실에서 오래 연습을 하다 보니, 화장실이 제일 중요해졌어요.(웃음) 새로운 공연장을 가면 화장실부터 본다니까요. 변기 앞에 보면대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 화장실에서 목을 푸는 저만의 비법이 있어요. 허리를 90도 이상 숙여서 발끝을 보면서 목을 풀면 근육들이 거꾸로 올라와서 금방 잘 풀려요. 사실 저만의 비법인데, 뭐 다들 노래 잘 하면 좋죠, 하하.
이율
제가 제일 좋아하는 극장의 공간은…, 명동예술극장이에요. 콕 집어서 명동예술극장의 어느 공간이 좋다기보다는 이 극장 자체가 좋아요. 재개관한 지 좀 된 걸로 알고 있는데, 제가 종로나 명동 일대에 나올 일이 별로 없어서 얼마 전에야 처음 와봤네요. 제가 이 극장을 좋아하는 이유는 극장의 기운이라는 걸 이곳에서 처음으로 느껴봤거든요. 그 기운에 완전히 압도당했다고 해야 하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에요. 많은 선생님, 선배님들이 서신 최고의 극장이라 이 무대에 선다는 게 너무나 영광이에요. 그래서 다른 때보다 유난히 더 긴장되지만 긴장이 되는 만큼 두 배의 에너지를 쓰고 있어요.
박정환
충무아트홀 건물 오른쪽에 작은 휴식 공간이 있는데, 볕이 참 잘 들어오는 곳이다. 작은 사각형의 공간에 삼면은 벤치로 둘러져 있어서, 배우들이나 관객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광화문 연가> 연습을 시작했을 때가 봄이 시작될 즈음이었던 것 같다. 꽃샘추위로 여전히 쌀쌀했지만 따뜻한 햇볕에서는 봄기운이 감돌았다. 연습 도중 나와서 바람을 쐬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서 이영훈 작곡가에 관한 책을 읽기도 했는데, 그곳이 나는 참 좋았다. 거기서 쉬고 있으면 다른 공연 팀 사람들도 만나곤 했다. 충무아트홀은 극장과 연습실이 여러 곳이라 많은 스태프와 배우들이 모이는 곳이니까. 예전에 한두 번 본 적이 있지만 별로 친하지 않았던 류정한 씨와도 조금 더 가까워졌고, 홍록기 선배님도 여기서 처음 뵙고 인사했다. 왜 흡연자들은 추위를 무릅쓰고라도 야외에서 일정 시간을 보내야 하지 않나. 그러다보면 담배 피러 모인 사람들끼리 ‘너도 나왔구나’라는 공감에서 더 친밀감을 느끼게 되곤 한다.
양준모
<오페라의 유령> 때 장기 공연을 하다 보니 샤롯데씨어터에 거의 매일 출근했다. 당시엔 집이 극장과 가까워서 30분 정도 걸어서 극장에 가곤 했다. 나는 항상 공연 5시간 전에 극장에 갔는데, 그 시간은 어느 스태프나 배우도 오기 전이다. 내가 먼저 불을 켜고 극장에 들어서서, 백스테이지의 분장실 위층에 있는 연습실에 간다. 아무도 없는 극장의 연습실에 앉아서 조용히 공연을 준비하는 시간이 내겐 참 소중했다. 전날의 공연을 되돌아보고 대본 연습이나 노래 연습을 하기도 하고, 공연 때마다 개인적으로 쓰는 배우 노트에 일기를 쓰기도 했다. 다른 때는 그렇지 않지만, 공연 전만큼은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 아무도 없는 극장의 연습실이 내게는 편안하고 소중한 공간이다.
정동화
화장실! 어느 극장이든 극장 안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은 화장실이에요. 세면대 말고, 문 닫고 들어가는 곳 있잖아요. 하하. 이렇게 말하면 좀 웃겨 보이려나.(웃음) 2008년 <형제는 용감했다> 초연 때부터 생긴 버릇이 있어서요. 바로 공연 전 화장실에 앉아 있기. 제가 집에서 독립해 나와 살아서 그런지 혼자 조용히 있는 게 마음이 편하거든요. 그래서 분장을 다 마치면 집중도 할 겸 항상 화장실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어요. 이건 저만의 마인드 컨트롤 법이랍니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1호 2011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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