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0803 살인마와의 조우
뮤지컬 햄릿 월드버젼을 준비하면서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햄릿 프로듀서에게 정말 괜찮은 작품이라면서 DVD 한 개를 받았다. 체코 뮤지컬 공연실황이었는데, <살인마 잭> 이었다. 체코에서는 꽤 흥행한 고정 레퍼토리 란다. 플레이어에 넣고 돌려서 보다가… 잤다. 일은 일인지라, 일어나서 다시 돌려봤다. 이번엔 끝까지 봤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성불구라는 이유로 매춘부들에게서 조차 조롱 받는 잭. 잭에게 악마가 찾아와 제안을 한다. `살인을 할 때마다 너에게 힘(?)을 주겠다.` 그래서 잭은 매춘부와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대신 그 매춘부를 죽여야 했다. 범인을 잡지 못해 쫓겨날 판인 담당 형사 앤더슨은 희생자의 언니인 글로리아와 사랑에 빠진다. 글로리아는 앤더슨이 경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고위 경찰과 결탁하여 매춘부로 위장해 수사를 돕는다. 앤더슨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글로리아를 매춘부로 오해하고 경멸한다. 한편 잭은 글로리아를 죽이려다가 지나가던 미친 여자를 죽인다. 경찰들이 현장에 나타나자 잭은 강물로 뛰어들고, 이후 런던에는 살인마가 나타나지 않는다.
흠… 하지만 분명 매력적인 요소는 있었다. 이중 회전무대, 그리고 몇몇 장치들, 프로듀서에게 전화해서 물어봤다. “얼마만큼 바꿀 수 있어요?” 프로듀서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글쎄.” 그렇게 난 이 살인마와 조우했다.
200804 살인마 잭, 꽤 유명한 놈이었다
이 작품을 한 달 정도 잊고 지내다가 5월에 <삼총사> 관련해서 체코에 가게 되었다. 마침, <살인마 잭> 한국공연 회의도 있을 거라 해서 수정사항들을 논의하자 했다. 수정이라… 그래서 이 살인마를 조사했다. 유명한 놈이더군. 근대 역사상 최초의 연쇄살인범… 백과사전에도 올라와 있다.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는 1888년 8월 31일부터 11월 9일까지 2개월에 걸쳐 영국 런던의 그리니치에 위치한 화이트채플 가에서 최소 다섯 명이 넘는 매춘부를 엽기적인 방법으로 잇따라 살해한 연쇄 살인범을 말한다. ‘잭’은 특정 인물의 이름이 아니라 영어권에서 이름이 없는 남성을 가리킬 때 쓰는 이름이다. 한국에서는 흔히 ‘칼잡이 잭’, ‘면도날 잭’, ‘살인마 잭’, ‘토막 살인자 잭’ 등으로 불린다. 이 살인마가 살인을 하던 시기는 과학 수사가 매우 뒤떨어진 시대였고 지문확보 조차 되지 않아 많은 이들이 경찰에게 잭 리퍼 검거 방법을 써 보내었고 심지어 당시 영국 여왕 빅토리아 여왕까지 검거 방법을 보내었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잭 리퍼는 검거되지 못했다. (위키백과)
더 유명한 이유는 이 살인마가 신문을 통해 예고살인을 한 것이었다. 국내 웹에서 동호회가 있을 정도로 유명하긴 한데, 내 취향은 아니다. 씹던 라면을 뱉었다. 퉤.
200805 <삼총사> 때문에 놈을 잊었다
체코에 가서 2009년에 공연할 <삼총사>를 보았다. 삼총사에 내정되어있던 모 배우와 함께 공연을 보았는데… 절망이었다. 그런데, 눈을 감고 보니 음악은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눈을 감고 근 3시간이 흘렀다. 모 배우는 제안을 했다. 강아지 탈을 씌워 아동뮤지컬을 하자고. 그날 체코 한국식당에서 먹은 소주가 참 썼다.
1년 후, 200905 다시 만난 살인마
우여곡절 끝에 <삼총사> 충무아트홀 공연이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원작 음악에서 멜로디를 가져와 편곡 했고, 극본과 가사를 새로 썼다. 무대디자인, 조명디자인, 의상디자인 모두 한국 디자이너가 새롭게 작업했다. 체코 원작자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엠뮤지컬컴퍼니 대표님은 결단을 내렸고 결국 체코에서 음악의 멜로디만 가져온 창작뮤지컬을 만들었다. 팸플릿에 극본 왕용범으로 올라가 있지만 많은 관객들은 이 작품을 그저 체코 뮤지컬인줄로만 안다. 상관없다. 많은 사람들의 호응 속에 상반기 뮤지컬 1위를 했으니.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섬뜻한 그림자가 서 있는 게 아닌가? 잭 더 리퍼! 이 놈이 내 등에 칼을 꽂을 양 노려보고 있었다. 11월에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공연될 <살인마 잭> 연출 계약서가 내 앞에 놓여졌다. 난 긴 한숨과 함께 펜을 들었다. 젠장.
200906 다시 체코로
체코로 건너가 <살인마 잭> 원작자들과 수정회의를 했다. 그런데, 극본에 대한 권리가 세 명에게 있었다. 처음 아이디어 낸 사람, 시놉시스 정리한 사람, 극본 쓴 사람. 스텝 모두가 체코에서는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작가는 체코 방송국 국장 내정자였고 작곡가는 국민가수였다. 장장 6시간 동안 설득했고, 결국 이들은 `Congratulations!`로 답했다. 내 트리트먼트를 승인한다는 뜻이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난 충분히 고민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회의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은 드라마적으로 `원작에서의 잭과 악마가 결국엔 한 인물이었으면 좋겠다`는 것과 잭의 살인이유가 성불구 때문이 아닌 다른 이유로 수정해도 못하는 허락을 얻은 것이다. 음악적으로는 자유로운 편곡을 허락받았고, 한국 공연에 음악을 추가하는 권한을 얻었다(체코 <살인마 잭>은 뮤지컬 넘버가 14곡 정도였는데 이는 대극장 공연을 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사실 이 부분이 무척 중요했다. ‘우리의 판단에 의해 음악을 추가한다.’ 음악의 수정 및 추가는 라이선스 계약에 있어 건드리기 가장 힘들지만 작품 수정을 위해선 꼭 손대야만 하는 부분이었다. 사실, 이 동의를 얻어낸 것은, 세계 뮤지컬 라이선스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드라마를 수정 발전시키기 위해서 음악의 수정, 추가가 필수요소임을 강조했고 뮤지컬 음악의 통일성을 위해 오리지널 작곡가의 기성 앨범들에서 음악을 차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작곡가의 앨범을 10개 받았는데 거기에 수록된 곡은 총 160곡 정도였다. 다행히 <살인마 잭>의 체코 프로덕션은 이전에 <햄릿> 때 함께 작업한 경험이 있는 터라 나를 믿어주었고, 나는 좋은 작품으로 답례하겠다며 악수를 했다. 회의는 이렇게 비교적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어느새 내 어깨엔 살인마가 올라타 있었다. 가뜩이나 프라하의 돌길에 발이 저려오는데 말이지.
200907 #1. 악몽이 시작되었다
프레이져 플레이스로 작업실 거처를 옮겼다. 서대문 경찰서 맞은 편에 있는 레지던스 호텔인데, 작품구상이나 극본 탈고 때 자주 이용한다. 지난 삼총사 극본 탈고를 한 곳이기도 하다. 다른 레지던스 보다 좋은 건 사우나와 수영장이 괜찮다. 머리 식히는 데는 역시 물 속에 몸 담그기. 역시나 멍하니 사우나에서 땀을 빼고, 컴퓨터를 켰다. 흠… 자판기에 손을 올려놓고 머뭇거렸다. 무엇부터 건드려야 하나…
공연오픈 까지 4개월, 연습 때까지는 2개월. 물론 이 작품을 손에 넣고 만지작거린 지는 근 1년이 넘어가지만, 아직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일단 검색을 했다. ‘살인마.’ 먼저 눈에 띄는 게 있었으니, 바로 살인마에 관한 책들이었다. 특히, 연쇄살인에 관한 책들은 베스트셀러가 꽤 많았다. 즉시 교보문고로 향했다. 그 중 눈에 띄는 서적들을 구입했다. 나는 작품 들어가기 전에 일단 관련자료부터 닥치는 데로 섭렵하는 편인지라, 그날도 가방이 끊어져라 책더미를 운반했다.
책을 읽으며 잠이 들었는데, 악몽을 꾸었다. 밤새 난, 큰 포크를 든 살인마에게 쫓겼다. 여담인데, 가장 궁금했던 <프로탐정의 테크닉>. 그러나 내용의 대부분은 불륜현장 포착에 관해 쓰여있다. 일본서적을 번역한 건데, 아마도 요즘 탐정들에게 들어오는 일이라는 게 대부분 불륜관련 일인가 보다. 한편으론 납득이 가면서도 한때 탐정이 꿈이었던 난, 또 한번 꿈과 현실의 괴리를 심하게 느꼈다.
200907 #2 대체 이 살인마에게 무슨 감동이 있다는 거지?
감동! 그렇다. 그것은 드라마가 달려나가야 할 정점이자 목표이다. 그것이 웃음의 감동이든, 버라이어티의 감동이든, 멜로의 감동이든 말이다. 난 감동이란 말을 단어 그대로 마음을 움직인다는 뜻으로 쓴다. 그렇다면 <살인마 잭>은 관객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대체 이 썩을 놈들, 살인마들에게서 관객은 어떤 감동을 받을 것인가? 정신이상자를 넘어 쓰레기 같은 이놈들에게 감동이 있기나 한 것일까?
회의가 들었다. 역시 계약서에 싸인을 하는 게 아니었어. 잘 만들어봤자 결국 말초신경이나 건드리는 작품이 나오는 건 아닐까? 잭! 넌 왜 살인 따윌 해가지고 날 이렇게 애먹이는 거야!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이내 숨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작품 초고를 쓸 때마다 겪는 과정이다. 삼총사를 쓸 때도 별별 고민 속에 빠졌었다. 그래서 그때는 상념을 잊고자 시작했던 <카트라이더>에 빠져 검정장갑을 손에 넣었지 뭔가!
아직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단지, 이 지긋지긋한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스트레스가 심해지다 보니 살인을 해볼까? 라는 충동도 일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시체로 보이기도 하고, 괜한 구역질도 생기고, 내가 내가 아니다! 내가 내가 아니다?
200907 #3 퀴즈
결국 프레이져 플레이스에서 어떤 실마리도 못 찾고 나왔다. 사우나만 즐긴 셈이다. 쩝, 돈 아깝다. 아무튼 몇 가지 단서와 질문이 생겼다.
[단서]
1. 잭은 의사일 가능성이 높다 : 난도질이 정교하므로
2. 미해결인데는 배후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 잭이 당시 영국의 왕자라는 설도 있다.
[질문]
1. 잭은 왜 살인을 했는가?
2. 잭은 왜 시체를 난도질 해 장기를 꺼냈을까?
3. 왜 이 사건이 미해결 사건일까?
4. 잭은 왜 신문을 통해 살인예고를 했을까?
삼총사 지방 공연 때문에 한 배우의 차에 몸을 실었다. 조안무 하는 친구도 동승했는데, 요즘 내 고민거리를 얘기하니까 그 친구가 나에게 퀴즈를 냈다. 사이코패스에 관한 문제였는데 `어느날 아파트 베란다 밖을 보던 난 어떤남자가 여자를 무참히 살해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 그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는데, 그 남자는 나를 보더니 손을 까딱까딱 거렸다. 왜 그랬을까?` 정답은, `아파트 층수를 세고 있었다.` `재밌네.` 그래서 나도 퀴즈를 냈다. `한 살인마가 있다. 직업은 의사다. 이 살인마는 여자를 살인하고 난도질해 장기를 꺼내갔다. 왜 그랬을까? 정답은?` 퀴즈는 내가 내놓고 내가 답을 말해버리고 말았다. `정답은, 살인마는 신선한 장기가 필요했다.` `신선한 장기가 필요한 이유는?` `장기이식을 하기 위해?` 이런, 이 간단한 퀴즈를 통해 실마리가 잡히는 듯 했다. 지방공연장에 도착한 나는 인터넷을 하기 위해 PC방에 갔다.
19세기 말 장기이식을 할 수 있었는가? 본격적인 장기이식은 20세기 초라고 할 수 있지만 19세기 말에도 불법적으로 시술된 사례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당시 장기의 거래는 불법이었다. 그렇다면 그 당시 이루어진 장기이식에 쓰인 장기는 모두 불법적으로 얻어진 것이었단 말인가? 그런데 누구의 장기이식을 위해? 이야기를 좀 더 진전시켜보았다. 어떤 의사가 있는데, 사랑하는 여자가 병에 걸려 장기를 이식해야 했다. 그래서 그 의사는 장기를 구해야만 했는데 장기를 구할 수가 없었다. 의사는 결국 살인을 통해 신선한 장기를 구해 장기이식을 감행했다. 이야기의 틀거리는 나쁘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살인을 한다… 꽤 로맨틱한데? 그럼 이 남자의 이름은… 달콤한 이름… 다니엘… 그 순간 난 이 살인마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이제껏 보았던 끔찍한 살인현장의 모습들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는 내 스스로에게 외쳤다. 동정하지마! 살인마를!
200907 #4 매독의 양면성
매독(syphilis) 은 두가지 증상이 있다. 장기가 녹거나 매독균이 중추신경을 타고 뇌로 들어가 뇌가 녹거나... 내가 눈 여겨 본 부분은 두 번째 부분이었다. 매독은 몸을 녹게도 하지만 때로는 뇌를 녹여 정신이상을 만들기도 한다. 사랑하는 두 남녀, 매독에 걸린 두 남녀, 여자는 몸이 녹고 남자는 뇌가 녹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살인을 정당화시키는 지금의 구도는… 퉤. 오랜만에 라면을 뱉었다. 글로리아의 마지막 대사가 떠올랐다. `내 몸도 내 마음도 다 녹았어.`
(2편에서 계속)
<매독 발병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