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영화, 희곡, 드라마, 소설, 만화, 게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수많은 작품들이 뮤지컬로 다시 만들어진다. 뮤지컬 각색에서 자주 등장하는 공식과 방법들을 찾아보았다.
괜찮아, 잘될 거야
뮤지컬에 대해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이미지 중 하나가 대중이 원하는 달콤하고 화려한 판타지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뮤지컬 각색 과정에서 원작의 무게감이나 심각한 분위기를 덜어내는 경우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버나드 쇼의 시니컬한 희곡 『피그말리온』과 <마이 페어 레이디>의 결말이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보라. 하지만 뮤지컬의 결말 변경은 안데르센의 가장 슬픈 동화를 완벽한 해피 엔딩으로 바꾸어놓았던 디즈니의 용감무쌍한 전례와는 다른 경우가 많다. 뮤지컬의 판타지가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뮤지컬의 결말 각색은 셰익스피어와 푸치니의 비극을 디즈니 동화로 바꿔놓기보다는, 관객들이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의 희망을 남겨두는 정도가 일반적이다. 원작에서는 뒤돌아볼 틈도 없이 이승과 결별했던 줄리엣과 미미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렌트>에서는 죽음의 늪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화해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매우 현실적이고 묘하게 어두운 판타지 물인 <위키드> 역시 남자 주인공 피요르에게 비극적인 죽음 대신 다른 존재로서 살아갈 기회를 주면서 주인공 엘파바에게 힘을 실어준다. <캣츠>는 원래 각각의 고양이들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하는 열다섯 편의 연작 시가 병렬식으로 이어지는 작품이다. 삶의 희로애락을 우화로 풀어낸 환상적인 분위기의 원작을 앤드루 로이드 웨버는 ‘다시 태어나기 위한 선택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한 경연’으로 설정하고 늙고 병든 창부 고양이 그리자벨라의 구원을 작품의 실질적인 결말로 배치했다.
쵸쵸상과 킴, 루돌포와 로저, 줄리엣과 주리혜
원작의 시대적 · 공간적 배경을 현대 영미권의 관객에게 익숙하게 바꾸면서, 주요 등장인물의 성격과 관계, 이야기 구조는 유지시키는 방식은 뮤지컬과 가장 유사한 장르인 오페라를 원작으로 한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나비부인>과 <미스 사이공>, <라보엠>과 <렌트>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원작이 음악극이기 때문에 생기는 특징은 송 모멘트와 노래의 목적이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나비부인>의 쵸쵸상이 미국으로 떠난 남편이 돌아와 재회하는 그 날을 꿈꾸면서 부르는 ‘어느 멋진 날’은 <미스 사이공>에서 같은 역할을 하는 곡 ‘I Believe’가 된다. <렌트>는 <미스 사이공>보다 원작에 충실한 각색이라, 음악을 배제하고 보면 가사까지 <라 보엠>의 ‘번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각색은 원작의 명성과 무게감을 업고 가면서, 이미 검증된 작품의 구조에 기댈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한 세기 전에 완성된 오페라에서 이야기하는 시대정신이나 모티프가 시간의 벽을 넘어서 절묘하게 맞아떨어질 때, 삶의 보편성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할 수 있다.
극중극과 그 반영
잘 알려져 있는 원작을 극중극으로 사용하면서 그 극중극이 반영된 스토리로 전체 극을 이끌어 나가는 <맨 오브 라만차>나 <키스 미 케이트>, <뒤돌아보는 사랑, 오르페오>도 자주 볼 수 있는 고전 각색의 예다. <맨 오브 라만차>처럼 장대한 원작을 가진 경우 극중극의 내용까지 대폭 각색이 되고, 작품 안에 또 하나의 작품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주제에 맞는 몇 개의 신이 선택적으로 삽입된다. 이 경우에 성패는 굵직한 큰 그림을 그리면서 과감한 선택과 집중을 하는 과정에서 원작에 익숙한 관객들을 얼마나 설득시킬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특히 <맨 오브 라만차>의 경우, ‘한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과 같은 구조를 가진 세르반테스의 원작이 가지고 있는 스토리와 주제 의식을 모두 살리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했기 때문에, 가지를 쳐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주요 캐릭터만 같은 새로운 이야기 하나를 만드는 방식을 선택했다.
원작의 권위에 정면으로 맞서라
대부분의 각색자들은 열렬한 팬을 거느리고 있는 원작에 손을 대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원작의 팬이란, 열두 자짜리 자개농 앞에 한쪽 무릎을 세워서 앉은 예비 시어머니 못지않아서, 까다롭게 바라는 것도 많고 작품에 대한 확신도 강하다. 그런 의미에서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는 진정 놀랍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이자 가장 열렬한 독자를 거느린 책을 원작으로 하면서 그 원작을 사랑하는 팬들이 질겁할 만한 파격적인 각색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고 결국 승리했다. 사실 이런 도발적인 방식의 각색은 보수적인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대극장 뮤지컬에서 흔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퓨전 장르나 작은 규모의 실험적인 작품에서는 드문 일도 아니어서, 매튜 본의 댄스 뮤지컬 <백조의 호수> 역시 파격적인 시도로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가 성경 속 유다에게 발언권을 준 것처럼 <인당수 사랑가>의 작가는 오랜 시간 동안 악역의 대명사였던 <춘향가>의 변학도에게 엄격하지만 내 여자에게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성숙한 남성의 매력을 선사했다. 이런 형태의 각색은 패러디의 영역과 겹쳐 있는 경우가 많다.
압축과 생략
한곡의 노래는 한 권의 책만큼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뮤지컬 각색의 핵심은 책이나 영화, 드라마 원작에서 구구절절하게 보여주었던 극적 상황들을 얼마나 잘 압축해서 음악극답게 형상화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각색 과정에서 자칫 잘못해서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식의 멋없고 공허한 나열식 겉핥기 곡으로 극 중 상황을 훑고 지나가버리면서, 뮤지컬을 원작의 맛없는 통조림 버전처럼 느끼게 할 수도 있다. 그 압축-변형의 예는 <지킬 앤 하이드>에서 야수 같은 하이드의 연쇄살인, <레 미제라블>의 바리케이드 신, <몬테크리스토>의 경우 귀양지에서 돌아온 백작의 복수 행각, <바람의 나라>에서 고구려와 동부여의 전쟁이 한 곡의 노래와 몇 마디 대사, 또는 안무로 처리되는 것에서 볼 수 있다. 뮤지컬은 사실 관객들이 몰랐던 이야기를 구구절절하게 해주기에 적합한 장르가 아니라, 관객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음악극이라는 양식 안에서 새롭게 보여주는 것으로 승부해야하는 장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중요하지 않은 순간들을 노래 한 곡에 몰아넣어서 대충 훑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갈등과 서사를 강렬한 노래와 춤으로 형상화해야만 원작에서 독립한 별개의 뮤지컬 작품으로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3호 2011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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