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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Culture In Musical] 젊은 왕자님들의 불행 [NO.110]

글 |김영주 2012-12-04 4,151


<오페라의 유령>에서 삼각관계의 한 축을 이루는 라울 드 샤니를 설명할 때 흔히들 왕자님 캐릭터라는 표현을 쓴다. 오등작 중 네 번째 지위인 자작에 불과한 그를 ‘왕자’라고 칭할 때, 문자 그대로 왕의 아들인 계승자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다. 이 경우 ‘왕자님’은 동화나 로맨스 소설 속에서 소녀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달콤한 연인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최고의 교육을 받고 성장한, 용모나 재능이나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한 젊은이를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뮤지컬 작품 속에 등장하는 진짜 직업 왕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들이 흔히 말하는 ‘왕자님 캐릭터’와는 꽤나 다른 인간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왕자님의 경우를 살펴보자면 <황태자 루돌프>와 <엘리자벳>의 루돌프, <바람의 나라>의 해명태자, <피핀>의 피핀이 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의 유일한 적통 계승권자로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지만 황태자 루돌프에게 인생은 초반부터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성장기에 받은 교육은 학대라는 표현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혹독한 것이었고 타고난 성정과도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강경한 보수주의자로서 군인에 가까웠던 부왕 프란츠 요제프의 묵인하에 루돌프는 아동교육에 대한 아무런 이해도 없는 장교에게 맡겨져 사관생도들이나 받을 법한 고된 훈련을 받아야 했다. ‘황실의 유일한 사내’라는 엄청난 별명으로 불린 대공비 조피는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 며느리 엘리자베트가 미래의 황제가 될 루돌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몽상가이고 자유주의자이며, 황후라는 직위에 따르는 자신의 의무를 지긋지긋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는 며느리 엘리자베트가 금지옥엽 손자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할머니의 우려는 어느 정도 상식적이다. 그렇다고 해도 어린아이에게서 어머니를 떼어놓은 것이 미래의 황태자가 건강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리 없다.


부모 뜻대로 되는 자식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황태자 루돌프는 어린 시절의 교육이 무색하게 사상적으로나 기질적으로 아버지보다는 어머니 쪽에 가까웠다. 자유주의자였던 그는 엄격한 전제군주인 황제 프란츠 요제프와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절대 권력을 쥔 국왕에게 왕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받고 이어갈 소중한 후계자이자, 동시에 자신의 왕권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자이기도 하다. 왕과 대립하는 정치 세력에게 가장 든든한 구심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란츠 요제프는 자신의 제국을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기를 원하는 후계자를 권력의 중심으로부터 소외시켰고, 손발이 묶인 루돌프는 필명으로 진보적인 신문에 정부를 비난하는 칼럼을 기고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가 절망감과 굴욕감에 사로잡힌 것은 예상 가능한 일이다. 여염집에서라면 아버지와 아들의 세계관이 다르다고 해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아침 밥상머리에서 분위기가 살벌한 정도겠지만, 아비가 왕이고 아들이 왕자라면 부자가 서로 죽고 죽이는 골육상쟁의 참혹한 비극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기도 한다.


<바람의 나라>에서 아들을 두려워하고 질투한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해 자결한 해명태자의 최후를 보면 권력의 잔혹한 속성에 소스라치게 된다. 적국의 왕조차 흠모하는 고결한 성품의 태자를 아비로서 자랑스러워하기에는 유리왕의 왕좌가 지나치게 불안했다. 유리왕이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 배경에는 기구한 성장사로 인한 뿌리 깊은 열등감과 열패감이 있었으리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아비 없는 자식으로 핍박받다가 뒤늦게 아버지 동명성왕을 찾아서 계승권을 약속받지만 취약한 정치적 배경 때문에 번번이 왕권을 위협받았던 그에게 만인의 숭상을 받는 태양 같은 아들은 뿌듯하기보다는 인정하기가 버겁고 두려운 존재였다.


절대 권력자인 아버지의 콤플렉스 때문에 죽음을 당한 또 한 사람의 왕자라면 단연 사도세자가 생각이 난다. <화성에서 꿈꾸다>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은 잠시 언급되지만 아들 정조의 일생을 지배하는 한으로 작품 전체를 장악한다. 칼 위를 걷는 것 같은 궁의 긴장 속에서 버티지 못하고 왕의 눈 밖에 난 아들이 그 권력의 무게에 짓눌려 광기에 사로잡히고, 그 광기에서 부정하고 싶은 자신의 천한 핏줄을 본 아비는 증오심에 사로잡혀 아들을 뒤주에 가둬 말려 죽이는 참혹한 사건을 벌이고 만다. 노론의 힘으로 왕위에 오른 아버지가 왕권을 무력화시키는 노론 세력에 반감을 가진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는 점에서 또 한 가지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궁의 중심부에서 왕과 왕자의 갈등이 결코 봉합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을 둘러싼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와 관련된 사람들의 욕망 때문이기도 하다.

 

 

 


밥 포시의 뮤지컬 <피핀>은 처음부터 작정하고 키치한 농담 같은 스타일을 고수하는 작품이라, 사를마뉴 대제라는 익숙한 이름이 나온 후에도 주인공 피핀이 실존 인물이라는 사실을 쉽게 눈치채기 힘들다. 정식 혼인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곱사등이였기 때문에 계승권에서 제외되었던 샤를마뉴 대제의 장남인 그는 잘생긴 얼굴과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매력적인 성격 때문에 인기가 많았고, 본의 아니게 역모의 얼굴 마담이 되기에 이르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역모는 발각되고 관련자는 모두 처형당했지만 피핀은 아버지의 동정심을 사서 수도원으로 쫓겨나는 처벌만 받고 살아남는다. 이 역사 속의 실제 사건은 뮤지컬 <피핀>에서는 엉뚱한 방식으로 그려진다. 피핀은 백성들에게 부당한 권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직접 살해하고 왕이 되었다가 직접 해보니 자신도 별수 없음을 깨닫고 아버지를 되살려 왕관을 돌려준다. 그런 후 자신은 또 다른 인생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찾는 것이 가능한지 실험하겠다고 천연덕스럽게 나선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는 클래식 발레와 마찬가지로 잘 알려진 동화를 원작으로 하지만 매튜 본이 왕자 캐릭터를 만드는 데 가장 강렬한 영감을 준 인물은 영국의 해리 왕자였다고 한다. 그는 왕실에서 겉도는 천덕꾸러기이자 사고뭉치인 해리에게서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모두 맡길 수 있는 이상적인 남성상을 애타게 갈망하는 왕자의 이미지를 끌어냈다고 밝힌 바 있다.


뮤지컬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실존 왕자들 중에 백마를 타고 와서 내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줄 만한 인물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개중에 그나마 믿고 인생을 맡길 만한 왕자라면 <라이온 킹>의 심바 정도? 하지만 제 인생 하나 건사하기도 버거운 이 왕자님들을 주인공으로 한 극이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서 기대하는 드라마는 꼭 신데렐라의 신분 상승만은 아닌 것 같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0호 2012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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