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의미를 알게 해준 <갓스펠>
개그맨이 되겠다는 부푼 꿈을 가지고 입학한 서울예대 연극영화과. 그런데 개강 한 달 반 만에 학교의 꼬임에 넘어가 얼떨결에 조명 담당으로 진로를 급선회하게 된다. 공연 한 편 본 적 없는 내가 조명에 대해 뭘 알았겠나. 선생님이,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정신없이 한 학기를 보내고 나서, 이듬해 조명 담당으로 참여하게 된 첫 번째 뮤지컬이 <갓스펠>이다. 1982년 당시 뮤지컬이 어느 만큼 낯선 장르였느냐면, 서울 시내에 뮤지컬을 공연 중인 극장을 찾아보기 힘들었을 정도다. 다행이 양정인 선생님이 연출하신 <갓스펠> 이화여대 공연 실황 녹화 비디오 자료가 있었던 덕에 간접적으로나마 뮤지컬을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엔딩곡 ‘피날레’ 장면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죽음을 상징하는 붉은 색 조명이 꽝, 꽝, 꽝 비트에 맞춰 움직이는 거다. 음악과 빛이 동행하다니! 이때 사용된 건 겨우 네다섯 대의 조명기. 좋은 조명 디자인을 위해 꼭 많은 조명이 필요하지 않으며, 상징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여기서 얻은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학교 공연에 사용했다. <갓스펠> 학교 공연에서 선과 악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한쪽은 따뜻한 색, 다른 한 쪽은 차가운 색의 조명으로 무대를 이등분 했고, 이는 좋은 반응을 받았다. 이처럼 <갓스펠>을 통해 상징적인 조명 기법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또 호기심을 갖게 됐으니, 내 인생을 바꾼 작품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직접 공연을 관람하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작품이 있다면, 유학 시절 브로드웨이에서 처음으로 본 <미스 사이공>이다. 유명한 작품이라는 정도만 알고 사전 정보 없이 관람했는데, 우리나라에는 무빙 라이트가 없었을 때라 빛이 움직이는 걸 처음으로 봤다. 머릿속으로만 상상했던 입체적인 빛을 눈앞에서 실제로 보게 됐을 때의 충격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특히 <미스 사이공>의 조명 디자인이 대단하다고 느꼈던 건, 평면적인 그림을 조명을 통해 입체적으로 표현한 점이다. 그때의 경험이 어떤 특정한 작업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없지만, <미스 사이공>을 보고 난 후 입체적인 빛을 표현하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느꼈다. 10년간의 유학생활 끝에 국내에 돌아와 조명 디자인을 맡게 된 <블루 사이공>. 그때 역시 무빙 라이트가 보편화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전쟁 신에서 무대 옆에서 무대 크루들에게 조명기를 들고 흔들게 한 웃지 못할 일화가 있다. <미스 사이공>이 디지털이었다면, 우리는 아날로그였지만 결코 뒤지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여건이 뒤받쳐 주지 않는다면, 한계점을 극복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고민을 하는 수밖에 없고, 바로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성장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3호 2012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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