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9일부터 11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대한민국 최초 뮤지컬 <살짜기옵서예>의 오디션이 진행됐다. 이 자리에는 <살짜기옵서예>와 뜻깊은 인연을 가진 특별 심사위원이 있었다. 바로 지난 2월에 은퇴 선언을 한 가수 패티김이다.
패티김은 1958년 미8군부대에서 데뷔해 1962년 ‘초우’로 첫 앨범을 냈다. 음악인생 54년 중에는 뮤지컬 출연 경력이 있다. 미국에서 <플라워드럼송>에, 귀국 이후 1966년 예그린악단이 초연한 <살짜기옵서예>에 주인공인 애랑 역할로 곽규석, 김성원 등과 함께 출연한 것이다.
1966년 <살짜기옵서예> 공연당시 패티김과 곽규석(왼쪽), 공연전 출시음반(오른쪽)
<살짜기옵서예>는 고전소설 배비장전을 원작으로 하는 대한민국 최초의 뮤지컬로 김영수 극본, 최창권 작곡으로 만들어졌다. 1966년 초연 당시 미대통령의 방한으로 닷새만에 막을 내려야만 했다. 단 7회의 공연이었음에도 1만6천명을 동원하는 흥행을 거뒀다.
46년만에 다시 공연하는 <살짜기옵서예>는 2013년 2월 15일부터 3월 30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의 개막을 예정으로 하고 있다. 이번 리메이크는 바뀐 시대 흐름에 맞게 세계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바뀐다. 무대메커니즘에도 3D, 홀로그램 등을 도입한다.
이 공연을 위해 무대에 설 배우들을 선발하는 최종 오디션 첫 날이었던 9일에는 애랑, 방자, 장비장 등의 배역에 12명의 배우들이 참여했다. 이날 패티김은 까마득한 후배들의 노래와 연기에 귀를 기울였다. 다음은 오디션 전과 후에 가진 패티김과의 일문일답.
Q) 애랑 수식어가 매번 붙었는데 애랑이란 캐릭터는 어떤 인물로 해석했는지? 나는 어떤 애랑이었다고 생각하는지?
애랑은 절개를 지키는 그런 여자였어요. 그러면서도 기생이니까 요염하면서도 그러면서도 굉장히 자존심이 강한 의지가 있는 그런 역이었어요. 참 재미있는 역이고 역시 노래를 좀 잘해야 되고. 제 경우에는 춤에는 별로 소질이 없었기 때문에 춤을 안 췄지만 몇 씬에는 다같이 춤추는 것도 있었고. 그때는 한복이니까 제가 자랑하고 싶은 스타일을 자랑을 못했어요. 다 가려가지고. 저 경우에는 주로 가창력으로 애랑이 역을 많이 했고.
Q) 초연 당시에도 어떻게 캐스팅이 된 건지?
오디션 안봤어요. 그때는 인기 있는 사람들을 뽑은 거죠. 패티김이 한창 최고로 인기 있을 때니까 일단 주연 배우가 이름이 있어야 티켓팅을 할 수 있는 거고. 제안이 들어왔는데 재미있을 것 같아서. 캐스팅이 굉장했죠. 강부자씨가 내 어머니고. 그 때는 다른 사람은 오디션을 봤는지는 몰라도 주연급은 그때 네임밸류 가지고 다 픽업했었던 것 같아요.
Q) 46년전에 초연 때는 닷새만에 막을 내렸는데 아쉬운 점은 없는지?
그때만 해도 정부에서 굉장히 많이 제재를 했을 때예요. 대사도 같은 것도. 노출이 있는 것도. 그런 상황 안에서 했기 때문에 5개월 그렇게 연탄 끌어놓고 보리차 끓여 마시면서 연습하고는 닷새하고 (미국) 대통령 온다고 막 내리는 건 우리나라밖에 없었어요, 그건 아무리 못가도 한 달은 갔어야 되잖아요, 그리고 그때 굉장히 센세이셔널 해서 티켓이 없고 그럴 정도였는데 그 시대가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 점은 두고두고 참 안타까워요.
1963년 <플라워드럼송> 출연 당시 보도된 자료들과 모습(오른쪽)
Q) 미국에서 처음 뮤지컬을 접했는데?
60년대 초에는 뮤지컬이란 게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고 있었다가 미국에 가서 각 도시를 다니면서 뮤지컬 하는 것에 제가 캐스팅돼서 그때 처음으로 뮤지컬에 대한 흥미, 관심, 매력을 느끼게 됐죠. 또 한 번 제가 좌절한 것이 그 당시만 해도 인종차별도 심했고 출연할 수 있는 작품이 없었어요. 남태평양, 왕과나, 플라워드럼송(정도). 동양여자나 남자들은 하인이나 무슨 셋째, 넷째 부인 역이나 하고 그런 것밖에 없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뮤지컬에 굉장히 심취돼있었어요. 그래서 오디션도 많이 보고 그랬는데 결론적으로는 제가 설 무대가 없었죠. 해서 꿈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우연히 <살짜기옵서예>를 했고 춘향전까지 하게 됐죠. 그 이후도 저는 뮤지컬에 대한 향수는 많이 있어요. 항상 새 관객하고 만나서 한다는 게 참 즐겁잖아요.
Q) 뮤지컬 출연 제의를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의외로 많이는 안받았어요. 제가 어려워서 그런지. 까다롭다는 소문 때문에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살짜기옵서예>를 하고. 그러고 68년에 다시 대춘향전을 했어요. 그 후에 한 번 다시 하고 싶다 했는데 섭외가 별로 안 들어왔고 돌아가신 신상옥 감독께서는 약속을 했었어요. 자기가 징키스칸을 뮤지컬로 하고 싶은데 징키스칸 어머니 역을 맡아달라고. 쾌히 오케이를 했는데 실천에 옮기기 전에 신상옥 감독이 돌아가셨죠.
Q) 기존 뮤지컬 작품 중 내가 했으면 좋았겠다는 작품들이 있었나?
패티김 스토리를 뮤지컬로 한 번 만들고 싶단 제의는 많이 받았어요. 그건 한 번 하고 싶어요. 이제 와서 제가 어떤 뮤지컬에 나가서 1장부터 끝까지 할 수는 없는 거니까 한다하면 젊은 시절은 대역을 하고 제일 끝에 쯤에 제가 한 번 팍 나타나는 거. 잘만 스토리를 꾸미면 정말 재미있는 뮤지컬이 되지 않을까. 우선 노래가 많으니까. <맘마미아>같이 알려진 곡을 계속 하니까 객석하고 그냥 하나가 돼서 참 좋았었거든요. 만일 제 스토리를 뮤지컬로 한다고 해도, 주로 80%가 노래로 해야겠죠. 관객하고 같이 노래를 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의. 그러면 더 흥미롭지 않을까 해요.
Q) 이번 공연 관람 계획은?
(초연한) 후에 몇 년마다 다시 <살짜기옵서예>를 재연한 건 알고 있어요. 그 당시 스케줄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한 건 한 번도 가보진 못했어요. 요번에 구스타보 (자작이라는) 외국 분이 연출을 하니까 이번엔 관람을 하려고 하죠. 어떻게 변하나.
Q) 심사위원 말고 <살짜기옵서예> 자체에 참여할 의사는?
그런 건 없어요. 재연을 한다고 해서 저는 사실 기뻤어요. 오늘은 제가 애랑이 역, 특히 심사도 한 것이지만 앞으로라도 제 도움이 필요하다든가 저의 의견을 필요로 한다면 얼마든지 협조해드릴 의향은 있습니다.
Q) 이번 공연은 어떻게 바뀌었으면 좋겠는지?
좋은 노래도 많았기 때문에 후회 같은 것도 없고 참 잘했었다고 생각하고, 우리 캐스트들이 다 잘했고. 이제 할 건 아무래도 조금 더 모던화 되겠죠. 연출자가 외국 사람이고. 거의 80%이상은 오리지널 그대로를 살리려고 한다. 아마 그래야겠죠. 그렇지만 의상이나 무대장치나 여러 가지가 예전에 46년 전에 하던 것과는 달라지겠죠? 애랑이 역도 좀 더 활발하고 화려한 애랑이가 되지 않을까.
Q) 오디션을 지켜본 소감
전체적으로 마음이 안타까웠어요. 내 앞에서 노래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럽겠어요. 잘하지만 자기네 기량을 훨씬 지금 발휘들을 못했을 거예요. 분위기가 사실 이런 데서 정말 웬만한 배짱 아니면 자기 발휘 다 못하죠. 누구라고는 얘긴 못하지만 소질 있고 잘하는 배우가 있어요.
Q) 이렇게 오디션 본 경험이 있는지?
뉴욕에서 1964년에 나도 이렇게 오디션보러 다녔거든요. 그때는 이런 장소가 아니고 거의 조그만 소규모 극장인데 심사위원이 안보였죠. 무대에 딱 서고 피아노 하나 놓고 거기서 딱 1분 20초 했어요. 딜라일라(Delilah) 부른 톰 존스도 같이 했었고. 그땐 많이 오디션 보러 다녔어요. (옛날 생각) 물론 났고. 재미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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