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로서 내 몫이 여기에 있다
한아름 작가의 작품에는 우리 역사를 배경이나 소재로 삼은 것이 많다. <왕세자 실종사건>과 <호야>는 조선 시대 궁중을 배경으로 쓴 작품이고 <청춘, 18대 1>은 해방 직전 동경을 무대로 뜨겁게 살다가 이름 없이 사라져간 청년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뮤지컬 <영웅>은 안중근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었다. 연이어 비슷한 시대적 배경을 다루는 작품을 쓰면서 일제 시대를 온몸으로 맞서 살다 간 이들에 대한 작가의 관심도 깊어지고 있는데, 서울예술단의 신작 <윤동주, 달을 쏘다> 역시 그러한 시선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윤동주 하면 ‘별’이 떠오른다. 유일한 시집 제목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이고, 「별 헤는 밤」, 「서시」 등에도 별이 나온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유난히 달의 이미지가 강하다.
윤동주는 사건으로 풀어갈 수 없는 인물이다. 그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은 고민하고 사색하고 글을 쓰는 시인의 모습인데, 이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극을 관통하는 이미지가 하나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걸 찾던 중 「달을 쏘다」란 윤동주의 산문을 보고, 달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윤동주가 잠 못 이루고 고민하면서 시를 쓸 때, 달은 항상 그를 따라다니며 묵묵히 지켜본다. 초승달로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무대를 압도할 만큼 거대해지는 달은 그만큼 윤동주의 고뇌가 커지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윤동주 스스로의 비난과 자책의 무게이기도 하다. 그리x고 마지막 장면에서 달을 향해 돌팔매를 하고, 온 힘을 다해 활을 쏘는 모습에서는 윤동주가 무사의 마음으로 글을 썼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폭탄을 들지는 않았지만 그는 늘 전쟁터에 나가는 마음으로 시를 썼을 것이다.
뮤지컬 <영웅>에서는 안중근이 주인공이었고, 이번 작품에서는 윤동주다. 항일 운동가를 다룬 작품을 연이어 쓴 셈인데, 우연의 일치인지 스스로의 선택인지 궁금하다.
서울예술단에서 근현대 가무극의 작품 의뢰가 왔을 때, 내가 먼저 윤동주를 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본래 역사를 좋아하긴 했지만 항일 운동가에 각별한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닌데, 확실히 아는 만큼 보이는 것 같다. <영웅>과 <청춘, 18대 1>을 쓰면서 일제시대 자료들을 많이 찾고 연구하다 보니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러면서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갔던 인물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깊어졌다. 요즘은 지하철 벽면에 붙어있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열심히 읽고 있다.
작품을 쓰면서 일제 시대와 항일 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더 깊어졌을 듯하다.
안타까운 것은 그분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보훈이나 보상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에 대한 정당한 사회적 인식이나 기억이 없다는 게 슬프고 화가 난다. 안중근을 만나고 <청춘, 18대 1>을 만들고 또 이번에 윤동주에 대해 쓰면서, 근현대사 속에 스러져간 그 시대의 사람들을 알리고 무대 위에서나마 살려내는 게 작가로서 내 몫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 이 주제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보니 쓸 때도 집중이 잘된다.
윤동주에 관한 자료는 남겨진 것이 거의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집필 과정에 어려움이 많았을 듯하다.
자료 부족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의 삶에 스펙터클한 드라마가 없다는 점이었다. 만주와 연해주를 오가며 무장투쟁을 했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사형당한 안중근에 비하면 윤동주의 삶은 겉으로 드러나는 사건이나 갈등이 없어서 극화 시키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처음에는 가짜로 사건을 만들었는데, 이게 윤동주의 서정적인 면과 부딪히니 이상해져서 결국 다 들어냈다. 드라마를 포기한 대신, 윤동주라는 한 지식인 청년이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
우리에게 윤동주는 대체로 「서시」에서 연상되는, 투명하고 창백한 지식인의 인상으로 남아있다. 작품을 쓰기 전과 쓰고 난 뒤, 그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변했는가.
나도 전에는 그냥 여린 서정 시인의 이미지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자료를 찾다 보니, 윤동주가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죽었다고 송몽규가 증언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그는 대체 뭐라고 외친 것일까. 사람답게 살고 싶었고, 시인이 되고 싶었던 한 젊은이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죽음을 맞았다. 생의 마지막에서 윤동주는 그동안 꾹꾹 눌러두었던 본능을 밖으로 드러낸 것이 아닐까. 사실 20대면 한창 호기심 많은 젊은이였을 텐데, 우리에게는 그저 창백한 이미지밖에 남아 있는 게 없다. 작품을 쓰면서 윤동주의 청년다운 부분은 밝게, 시인으로서 고민하는 부분은 시인답게, 그리고 때로는 짐승처럼 고통스러워하는 모습까지 담아보려 했다.
윤동주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기보다 동무들과 함께 그리려는 의도가 강하게 느껴졌다. 특히 감옥에서 생의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송몽규와의 우정은 남녀 간의 사랑보다 애틋할 정도다.
핍박과 혼란의 시대를 살면서 시를 쓴다는 것,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 그 지독한 불안과 외로움 속에 살아갔던 그들에게는 서로의 존재 자체가 위안이 되고 의지가 되었을 것이다. 예술은 동지가 필요하다. 나를 이해해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하고, 시는 공감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윤동주의 시집은 그가 죽은 뒤 정병욱이 온 가족을 동원해 원고를 숨기고 지켜서 간신히 출간될 수 있었다. 그는 왜 자기 목숨을 걸면서까지 윤동주의 시를 지키려 했던 걸까. 또 송몽규와 윤동주는 감옥에서 돌멩이를 두들기며 서로 살아있음을 확인했다. 아마도 저 벽 너머 서로가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며칠이라도 더 살게 만들지 않았을까. 이들의 모습을 통해 우정 이상의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극 중 이선화는 유일하게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인데, 작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완전히 허구는 아니고, 윤동주가 하숙한 집의 딸이 이화여전을 다녔는데 서로 호감을 느낀 것 같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인물이다. 원래는 좀 더 중요한 인물로 그리려고 했는데, 작품을 쓰다 보니 가상의 인물과 사건을 만드는 데 부담이 컸다. 여기에 억지로 사랑 이야기를 끼워 넣기에는 윤동주가 이미 가지고 있는 짐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원래의 역할 대신 윤동주에게 작은 위로를 주는 인물로 대폭 축소하게 되었다.
흔히들 윤동주를 ‘저항 시인’이라고 부르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안중근에게 최선의 선택은 이토를 죽이러 간 것이었고, 윤동주에게는 우리말로 시를 쓰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가 죄책감을 벗는 유일한 시간이 바로 시를 쓰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작가이다 보니 어떤 면에서는 안중근보다 윤동주에게 더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지금도 글 쓰는 것을 사치스러운 직업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은 더 했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말이 사라지고 나라가 없어지는 상황에서 시를 쓰기 위해서는 얼마나 고군분투해야 했을까. 그 상황에서 끝까지 우리말로 시를 쓴 것은 분명한 저항이다. 후에 윤동주는 일본에 가기 위해 창씨개명을 했고, 그것 때문에 「참회록」을 썼다. 이 시를 보면 그가 얼마나 심리적으로 혼란스러웠는지 알 수 있다. 다른 시들과는 정서 자체가 다르다. 서정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 처음엔 해석이 잘 안 됐는데, 자꾸 읽다 보니까 그가 자기 마음을 시로 전달할 수 없을 만큼 힘들고 혼란스러웠다는 게 읽혀서 마음이 아팠다.
작품 안에 윤동주의 시가 여러 편 인용되었는데, 여기엔 따로 노래를 붙이지 않고 그대로 낭독하게 만들었다. 특별한 의도가 있는가?
시에는 고유의 운율이 있기 때문에 시로 읽히는 게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유족들은 시로 노래를 만드는 데 동의했지만, 작가로서 그의 시는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노래를 만든답시고 괜히 멜로디를 붙이거나 노랫말로 만든다고 시어를 다듬기보다는 낭송을 통해 그의 시를 그대로 전하고 싶었다. 이 작품에서는 윤동주의 시를 온전히 듣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서시」나 「별 헤는 밤」은 알지만, 다른 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런 시들을 한번 들어보고, 윤동주의 시 중에 좋은 게 참 많구나 생각할 수 있다면 작품의 목적 중 하나를 이루는 셈이다.
가무극이라는 특성상 극을 쓰면서도 고려할 부분이 많았을 듯한데, 집필 과정에서는 어디에 중점을 두었는가?
일단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하는 작품이다 보니 대극장 무대에 맞게 장면이나 군무의 규모를 크게 만들었다. 사이즈를 채우는 것도 작가의 몫이니까 연극적으로만 욕심낼 수는 없었다. 합창이나 군무, 몹신은 서울예술단의 강점이기도 해서 기본적으로 그런 장면들이 부각될 수 있도록 비중을 많이 두었다.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고 옥사한 윤동주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한데.
바닷물이라는 말이 있다. 식염수를 몸속에 투입해 농도를 조절함으로써 나중에 피가 부족할 때 대체할 용액을 실험했다고 한다. 생체 실험은 731부대만이 아니라 일본 현지에서도 조선인 정치범들을 상대로 많이 자행되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윤동주 생체 실험설을 믿지 않았다. 그러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히라누마 도주(윤동주의 일본식 이름)’의 문건이 발견되면서 비로소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 또한 우리의 역사에 대한 트라우마를 보여주는 한 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픈 역사에 대해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 시대를 진심으로 아파하고 고민하지 않았기에 자꾸 피하려 하고 일그러진 기억을 갖게 된 것이다. 상처는 충분히 아파하고 쓰라린 과정을 거친 다음에 비로소 아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한동안 아버지를 생각하며 울어야 간신히 밥을 넘길 수 있다. 역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7호 2012년 8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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