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각인시키다, 윤형렬
윤형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지난 2년간의 공백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군 복무를 마치고 갓 무대에 복귀한 그가 의기충천해 있으리라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 가능하리라. 윤형렬 스스로는 오히려 “캄 다운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했지만, 굵직한 목소리 덕에 그는 들떠 있기보다 차분해 보였다. 의욕만 앞서 그 힘을 과시하는 하수가 아니라 속으로 차곡차곡 필살기를 다지고 있는 고수처럼.
언제고 허투루 사라지는 시간은 없나보다. 무대를 떠나 있는 동안 온전히 관객의 자리에 있었던 윤형렬은 다른 시선으로 무대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가 참여할 수는 없지만 욕심났던 신작들을 보며 무대를 더욱 열망했고, 배우들이 각자의 역할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해낼 때 작품이 균형 있고 조화롭게 완성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 2년은 배우가 아닌 다른 삶을 경험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배우와는 사뭇 다른,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고 반복되는 일상을 체험하면서, 그가 선택했던 또는 선택당했던 배우로서의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것인지 알게 됐다고 하니, 그가 무대에 서며 느꼈던 만족감이 얼마나 컸는지 알 만하다.
윤형렬은 제대하자마자 입대 전에 마지막으로 맡았던 <모차르트!>의 콜로레도 대주교 역을 다시 연기하게 되었고, 국내 초연작인 <두 도시 이야기>의 주인공 시드니 칼튼 역까지 거머쥐었다. 많은 것이 빠르게 생산되고 소비되고 버려지는 시대에, 연이은 캐스팅 결과는 공백에 따른 불안을 씻어줬을 뿐만 아니라, 잊히지 않았다는 안도감 또는 자신감을 심어주었을 듯하다. 조금은 심술궂었던 기자의 의중을 읽은 듯, 그는 복귀에 대한 불안함이 있었기에 더욱 사활을 걸고 준비했다고 고백했다. 복무 중 <두 도시 이야기>의 오디션 공고를 본 후 원작과 캐릭터 연구를 했으며, “최선을 다해 따낸 역할이기에 더욱 가치 있다”고.
윤형렬이 연기할 시드니 칼튼은 프랑스 혁명 당시 귀족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와 항거의 결과로 사형을 선고받은 찰스 다네이를 대신해 단두대에 오르는 인물이다. 찰스 다네이는 시드니가 사랑했던 루시의 남편이다. 여기서 모두가 의아해할 질문에 답하는 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과제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다. 아무리 숭고한 죽음이라 할지라도 관객이 공감하고 납득하지 못하면 감동이 없을 터, 시드니가 죽음을 선택하는 당위성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시드니는 세상을 염세적이고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다. 루시가 그런 그에게 따뜻하고 진심어린 손길을 내밀었고, 그녀 덕에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달라졌다. 루시는 찰스와 결혼을 하고 그들 사이에는 딸이 있는데, 루시뿐만 아니라 리틀 루시도 시드니를 잘 따라서 시드니는 한번도 제대로 갖지 못한 가족을 만난 듯했다. 루시 가족의 행복을 위해, 아니 자신의 가족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었을 거라는 윤형렬의 이야기를 들으니, 시드니의 실루엣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건장하고 패기 넘치는 윤형렬의 외양에서 슬프고 애절한 모습을 찾기는 힘든데, 데뷔작에서의 강렬한 이미지 때문인지 자존감이 낮은 비련의 남자 주인공이 그에게 곧잘 주어졌다. 그런데 더 의아한 것은 그가 그런 역할을 원한다는 것. “누구나 마음속에 숨겨두고 있는 열등감 또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상처를, 무대 위에서 꺼내 보여줬을 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있어요.” 무대에선 연기인 척 스스로를 드러내고 객석에선 내 것인 척 그에 공감하는 이 역할 놀이의 진짜 배우는 누구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윤형렬은 지금까지 연기한 캐릭터들도 좋지만, 전과는 전혀 다른 부드럽고 밝은 역할이나 완전히 ‘깨는’ 연기도 하고 싶다고 했다. 스스로 되게 웃기는 사람임을 자처하니, 윤형렬의 코믹 연기도 기대해보게 된다.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으로 주목받으며 매일 밤 객석을 뒤흔들어 놓았던 <노트르담 드 파리> 때가 배우 윤형렬에게는 잊지 못할 시절이다. 하지만 이제 갓 서른을 넘긴 그가 훗날 되돌아봤을 때 너무나 눈부시게 반짝여서 잊지 못할 시절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시간 속에 있기를 바란다. 배우로서 남자로서 새 출발을 하는 현재, 그의 몸과 마음에 아로새겨진 다짐은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 너무 흔한 결심이지만, 그의 목소리로 들으니 희한하게 남다른 의지가 느껴졌다. 인터뷰 내내 느껴진 그의 열의대로라면, 곧 윤형렬의 전성기를 다시 볼 수 있을 듯하다.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7호 2012년 8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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