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기다렸다. 2003년 초연 이후 9년째 브로드웨이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블록버스터 뮤지컬 <위키드>가 마침내 국내 관객들을 만난다. 화려한 무대 메커니즘과 그래미상을 받은 음악, 유쾌한 동화와 그 속에 담겨 있는 진지한 메시지가 환상의 조화를 이루는 <위키드>는 전 세계 3천만 명 이상의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들이며 초록 열풍을 일으켰다. 200억여 원의 제작비를 투입해 선보이는 이번 공연은 지난해 12월 싱가포르에서 시작된 아시아 투어 공연의 일환으로, 2008년부터 3년간 호주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마친 <위키드> 프로덕션이 직접 내한한다.
Photo by Andrew Ritchie
뮤지컬의 원작 소설 『위키드』
뮤지컬 <위키드>는 그레고리 맥과이어가 1995년에 발표해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 『위키드: 사악한 서쪽 마녀의 삶과 시간들(Wicked: The Life and Times of the Wicked Witch of the West)』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위키드』는 1900년에 발표된 이후 영화, 뮤지컬, 연극 등으로 끊임없이 재창조되면서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아온 『오즈의 마법사』의 숨겨진 이야기를 다룬다. 『오즈의 마법사』는 태풍에 실려 ‘오즈’로 날아온 캔사스 소녀 도로시가 두뇌 없는 허수아비와 용기 없는 사자, 심장 없는 양철인간, 그리고 강아지 토토와 함께 오즈의 마법사를 찾아나서는 여정을 그린, 주디 갈란드 주연의 영화로 특히 유명하다. 소설 『위키드』는 『오즈의 마법사』의 배경과 인물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원작의 숨겨진 이면을 보여주기 위해 작가의 상상력을 더했다. ‘오즈의 마법사’는 사실 잔혹한 폭군 독재자이고, 도로시의 물벼락을 맞고 녹아버린 서쪽나라 초록 마녀 엘파바는 약자의 편에 서서 마법사의 독재에 대항하는 의협심 강한 아웃사이더들의 영웅이며, 착한 금발 마녀 글린다는 꾸미고 주목받기를 좋아하는 공주병 환자라고 설정한다.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진한 도로시가 알고 보니 엘파바의 동생이자 사악한 동쪽 마녀라 불리는 네사로즈를 죽게 한 일을 사과하기 위해 엘파바를 찾아 나섰다는 것 외에도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숨은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 있다. 원작의 영향을 받은 작품답게 주인공 엘파바(Elphaba)의 이름도 『오즈의 마법사』의 저자 L. 프랭크 봄(Lyman Frank Baum)의 첫 글자 발음에서 가져왔다.
소설 『위키드』의 매력은 고전을 단순히 패러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즈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게 한다는 점이다. 그 중심에 초록색 피부를 갖고 태어난 엘파바가 왜 서쪽 마녀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놓여 있다. 남들과 다른 피부색과 날카로운 유치를 갖고 태어난 초록 소녀 엘파바는 저주받은 불길한 존재로 여겨졌다. 부모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받기보다는, 자기 때문에(엄마가 더 이상 초록색 아이를 낳지 않기 위해 밀매 약품을 먹은 탓에) 양팔 없이 태어난 동생 네사로즈를 위해 희생할 것을 요구받아야 했다. 그녀는 독립적이고 어른스러웠지만, 자신을 설교에 활용한 목사 아버지의 영향으로 기성 체제와 종교, 이상이나 구원 등에 대해서는 냉소적이고 투쟁심 강한 여인으로 성장했다. 가족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던 엘파바의 초록색 피부는 쉬즈 대학에 진학한 이후에도 친구들이 따돌리는 이유가 되지만, 화려한 외모에 허영심 강한 룸메이트 글린다와 함께 지내면서 묘한 우정을 나누게 된다. 외모 말고는 남들과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살아가던 엘파바의 삶을 변화시킨 것은 동물 이동 금지령을 저지하는 연구를 하던 염소 딜라몬드 박사의 의문스러운 죽음이다. 인간과 다름없이 말하고 지적 활동을 하며 살아가는 동물들의 지능과 언어 능력을 빼앗아 노예로 전락시키고 오즈 전역을 병합하려는 마법사의 음모를 알게 된 엘파바는 학교를 뛰쳐나와 동물들의 생존과 권리 보호를 위한 지하 조직에 가담한다. 하지만 독재자에 대한 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짧았지만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피예로는 그녀 대신 죽음을 맞는다. 이후 7년여를 수녀원에서 보낸 엘파바는 피예로의 죽음에 대한 용서를 구하기 위해 그의 유족을 찾아 나서고, 그동안 잊고 지냈던, 언제나 약하고 억압받는 소수자의 입장에서 세상과 맞섰던,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간다. 그리고 독재를 꿈꾸는 마법사로부터 오즈를 구하기 위해 서슴없이 ‘사악한 서쪽 마녀’가 되어 싸운다.
Photo by Andrew Ritchie(좌) and Joan Marcus(우)
두 소녀의 우정에 초점을 맞춘 뮤지컬
방대하고 복잡한 원작을 뮤지컬로 옮긴 이는 <가스펠>, <피핀> 등으로 유명한 작곡가이자 제작자 스티븐 슈왈츠와 극작가 위니 홀즈만이다. 두 사람이 각색해 선보인 뮤지컬 <위키드>는 초록 피부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지만 자존심 강한 엘파바와 공주병 금발 미녀 글린다가 우정을 나누고 성장해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동시에, 약자에 대한 공감과 소수자에 대한 편견, 선과 악의 정의 등 원작의 무거울 수 있는 주제들을 유머와 위트로 풀어낸다.
뮤지컬 <위키드>는 서쪽 마녀 엘파바가 동생의 구두를 찾기 위해 도로시 일행을 쫓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소설과는 다르게, 서쪽 마녀의 죽음을 환호하는 오즈의 주민들 앞에 거대한 버블 머신을 타고 나타난 글린다가 자신의 옛 친구 엘파바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엄마의 하룻밤 일탈로 태어난 초록 소녀 엘파바는 다리를 쓰지 못하는 동생 네사로즈와 함께 쉬즈 대학에 진학한다. 어느 누구도 엘파바와 함께 방을 쓰기를 원하지 않는 가운데, 나서기 좋아하는 글린다가 의도치 않게 그녀와 룸메이트가 된다. 책 읽기는 좋아하나 패션 감각은 전혀 없는 엘파바와 공부보다는 겉치장에만 신경 쓰는 ‘금발 미녀’ 글린다는 부모님께 편지를 쓰며 부르는 ‘What Is This Feeling?’을 통해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낸다. 둘의 관계는 파티장에서 회복된다. 글린다가 장난삼아 준 마녀 모자를 쓰고 파티장에 나타난 엘파바가 친구들의 비웃음 속에서도 꿋꿋하게 혼자 우스꽝스러운 춤을 춘다. 글린다는 엘파바 덕분에 마술 수업을 듣게 된 것을 알게 되고, 미안한 마음에 그녀에게 다가가 함께 춤을 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조금씩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무뚝뚝한 엘파바에게 사교성을 가르쳐주며 자신의 분홍 꽃을 꽂아주는 글린다의 노래 ‘Popular’는, 마법사의 실체를 알게 된 엘파바가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오르며 부르는 ‘Defyfing Gravity’와 더불어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노래다. 중력을 넘어서 하늘을 나는 모습을 표현한 이 곡은 마법사의 독재에 맞서고 사회적인 편견과 차별, 선입견에서 벗어나고 싶은 작품의 메시지를 담은 곡이기도 하다. 각자의 길을 가게 된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음을 고백하는 마지막 듀엣곡 ‘For Good’ 역시 감동적이다.
엘파바와 글린다 외에도 <위키드>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관계는 원작과 차이를 보인다. 보크는 글린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네사로즈 곁에 머물고, 이를 알게 된 네사로즈는 보크를 영원히 곁에 두기 위한 마법의 주문을 외운다. 고향에 부인과 자식을 두고 엘파바와 불륜의 사랑을 나누었던 피예로는 뮤지컬에서 다행히 미혼의 청년으로 등장하지만 글린다와의 약혼을 깨고 엘파바와의 사랑을 확인한다. 원작에 없는 양철나무꾼과 허수아비, 겁쟁이 사자의 탄생 비화를 첨가한 것이나, 도로시에 의해 죽음을 맞았던 엘파바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결말은 뮤지컬만의 새로운 해석이다.
환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무대와 의상
환상적인 오즈의 세계를 눈앞에 펼쳐 보이며 시시각각 변하는 유진 리의 무대와 수전 힐퍼티의 화려한 의상은 <위키드>를 기대하게 하는 또 다른 매력이다. 이 작품으로 토니상과 드라마데스크상, 외부 비평가협회상이 주는 무대와 의상상을 모두 거머쥔 두 사람이 선보이는 휘황찬란한 볼거리들은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엄청난 양의 연기를 뿜어내며 위용을 자랑하는 무대 외관을 둘러싸고 있는 6미터 길이의 타임 드래곤의 시계와, 글린다가 타고 등장하는 수천 개의 비눗방울을 뿌리는 버블 머신, 오즈의 마법사를 상징하는 거대한 얼굴과 날아다니는 원숭이 등은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오즈의 나라로 빠져들도록 도와준다. 현란한 디테일과 과감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350벌의 화려한 의상 역시 마찬가지. 버블 머신 장면에서 선보이는 글린다의 화이트 드레스는 화려한 장식의 극치를 보여주며, 엘파바와 글린다가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기 위해 에메랄드 시티를 찾는 ‘One Short Day’에 등장하는 과장되고 비대칭적이며 바람을 잔뜩 머금은 듯한 녹색 톤의 의상들도 인상적이다.
5월 31일~open run /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 1577-3363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4호 2012년 5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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