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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리뷰] <에비타> 이중적 쇼의 구조로 풀어낸 에바의 삶 [No.100]

글 |박병성 사진제공 |설앤컴퍼니 2012-01-09 5,407

한 사람의 일대기를 극으로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극의 본질은 갈등이고 소위 극적이라고 할 때는 첨예한 갈등이 클라이맥스를 향해서 치달을 때를 말하는데 한 사람의 일대기는 그러한 구성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일대기를 극으로 구성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일생에서 어떤 점을 취하고 어떤 점을 버릴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이때 기준이 되는 것이 하나의 관점으로 엮어내는 컨셉이다. <에비타>에는 서른셋의 짧은 인생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갔던 아르헨티나의 국모 에바 페론의 삶이 중심에 놓여 있다. 성녀와 악녀로 이중적인 평가를 받았던 그녀의 삶은 아르헨티나의 또 다른 영웅인 체가 사회자로 등장해 비판적인 시각에서 총체적으로 드러난다.

 

 

 

비판적 시각을 일관되게 유지
상류층의 위선을 비난하고 가난한 자들과 여성, 사회적인 약자를 위한 정책을 펼쳤던 에바는 진정으로 약자들의 편에 선 성녀로 숭상받는 동시에, 출세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하고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선심성 정책으로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바닥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번 <에비타>에서는 작품 초반부터 강하게 에바 페론을 비난한다. 에바의 죽음을 애도하는 국민들에게 현실을 직시하라며 각성시키는 노래 ‘다 미쳤어 웬 난리(Oh! What a Circus)’는 한국어 곡명에서도 드러나듯 감각적이고 거칠게 표현됐다. 원제에서는 쇼하고 있네 풍의 비아냥과 조롱이 느껴진다면, 한국어 가사에서는 흥분과 비난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체의 반항적인 행동에서도 자신들을 불행으로 이끈 장본인을 인식하지 못하는 국민들의 어리석음에 분노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이번 공연은 에바의 이중적 평가를 제시하는 수준을 넘어서 에바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 일관되게 부정적인 목소리를 낸다.

 

회전 무대에 간결하면서도 심플한 무대 사용도 부정적인 목소리를 내는 태도에 힘을 실어준다. 무대에는 계단과 알전구가 박힌 거대한 거울이 상징적으로 놓여 있다. 해외 순방이나 발코니에서의 연설 장면으로 이용되는, 무대를 가로지르는 철제 통로가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을 제외하면 계단과 알전구가 무대 세트의 전부이다. 페론과의 첫 대면 장면에서 페론이 연설할 때 늘어선 군중 사이에서 에바만이 계단을 오르내린다. 작품 중 그녀가 권력의 정점에 오르는 ‘비상하라 그대(High Flying Adored)’ 장면에서는 그동안 두 개의 계단 구조물만을 사용하다가 하나의 계단 구조물을 첨가해 더 높은 곳에서 우아하게 내려오는 그녀의 모습을 부각시켰다. 이와 같이 계단은 에바의 출세욕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로 사용되고 있다. 백성을 위하고, 노동자들을 위한다는 그의 맹세가 한낱 자신의 출세를 위한 수단이었다는 간접적인 고발인 것이다.

 

알전구 역시 에바의 약자들을 위한 행동들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출세와 영예를 얻기 위한 쇼였다는 인식에서 사용된 도구이다. 에바의 죽음을 애도하는 국민들에게 체가 조롱하듯이 부르는  ‘다 미쳤어 웬 난리’의 첫 가사가 ‘What a circus, what a show’인 것처럼 그녀가 펼친 정치는 일종의 거대한 쇼였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무대 외곽에 겹겹의 알전구가 박힌 프레임을 만들어 그 안에서 에바 페론이 펼친 한바탕의 쇼를 감상하게 했다. 그래서 이번 작품에서 에바의 모습은 정치가도 야심가도 아닌 연기를 하고 있는 배우의 모습에 가깝다. 유독 눈에 띄게 노랗게 물들인 에바의 헤어스타일 역시 그렇지만 이번에 새롭게 첨가된 오프닝 장면은 에바를 배우로 보고 있다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원작의 오프닝은 영화관에서 에바의 죽음이 발표되자 국민들이 비통에 빠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지나 연출은 에바가 알전구가 박힌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장면부터 시작하도록 오프닝 장면을 바꿨다. 마치 연기를 마치고 돌아온 배우가 자신의 무대를 떠올리듯 자신을 응시하는 장면은 모든 것을 마친, 그렇지만 후회가 남는 자의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비난에서 연민으로
에바의 삶을 ‘쇼’  한 단어로 정의한 이번 공연은 그녀가 벌이는 쇼를 비유적으로 표현했는데 쇼의 화려함에 빠져들기보다는 객관적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를 원한다. 거의 빈 무대에 상징적이지만 심플하게 놓인 무대 세트는 극의 몰입보다는 이화를 요구한다.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무대와 대조적으로 실제 에바와 체에 관한 사실적 영상과 자막으로 당시 시대적 배경을 직접적으로 설명한다. 영상은 또 다른 해설자로 불친절한 성스루 뮤지컬 형식으로 전개되는 극의 이해를 돕는다.

 

또 다른 사회자로서 영상의 존재나, 일관되게 악녀로 몰고가는 전개는 결국 체의 존재감을 떨어뜨렸다. 극 초반 강렬하게 에바를 비난하던 체는 그 이후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체와 에바가 서로의 입장에서 팽팽하게 맞서야 하는 ‘죽음의 왈츠(Waltz for Eva and Che)’는 에바가 체를 정치적 생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애송이로 취급하면서 오히려 에바와 체의 관계가 역전되는 장면으로 연출되기도 했다. 이번 <에비타>는 에바의 정치적 행보를 부정적으로 규정지으면서 외부적 시선에서의 성녀와 악녀 사이의 갈등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 대신 부각되는 것은 에바의 내면적 갈등이다. 가난한 첩의 딸로 태어나 퍼스트레이디에 오르기까지 멈추지 않고 출세욕을 불태웠던 에바는 어느 순간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연민의 대상이 된다. 체의 변화도 그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오프닝 장면에서 에바는 죽음 이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회한에 젖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지나 연출은 작품의 엔딩도 원작과 다른 변화를 시도한다. 원작에서는 에바의 죽음으로 마무리되지만, 이번의 엔딩 장면에서는 에바의 죽음 이후 ‘또 다른 여정(Another Suitcase in Another Hall)’을 부르며 에바가 체의 손을 잡고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한다. 작품 내내 갈등했던 에바와 체가 화해하며 끝나는 엔딩은 체의 시선이 비난에서 연민으로 변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다. ‘또 다른 여정’은 에바가 페론을 자신의 남자로 만든 후 페론의 어린 정부를 내쫓게 되는데 그때 어린 정부가 여행 가방을 꾸리며 부르는 노래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막막한 심정이 애처롭게 담긴 이 노래는 에바가 죽은 이후 불림으로써 그렇게 악착같이 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회한에 젖게 한다.


이지나 연출이 새롭게 추가한 오프닝과 엔딩 장면은 자기연민에 젖은 에바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반성과는 또 다른 종류의 감정이다. 오프닝에서 에바가 거울에 비친 모습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은 후회스럽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던 한 불쌍한 여인의 삶이다. 체가 비난한 에바의 쇼는 선동적인 정치가의 쇼였지만, 에바가 연기한 것은 상처투성이인 여인이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결국은 자멸하고 마는 비련의 여인이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0호 2012년 1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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