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지만 호랑이 가죽에 필적할 만큼 존재감 있는 이름을 남기고 죽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름이란 그저 사람들에게 편하게 불리는 일반명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비해 자신의 이름을 고유명사로 남긴 사람들도 있다. 위인이거나 악당이거나. 이들의 이야기는 누구의 것이 됐든 흥미롭다. 악당으로 자신의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위인은 누가 봐도 위대한 행위를 남기지만 악당은 악의 역설적 의미를 남기기 때문이다. 모든 역설에는 깊이가 배어있다.
뮤지컬 <보니 앤 클라이드>의 주인공이 딱 그렇다. 연애행각과 강도 기록으로만 보자면 이들의 이야기보다 더 극적인 예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그리고 뮤지컬을 통해 다시금 살아나는 이름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니라, 보니와 클라이드이다. 대공황 시대를 살았던 그들의 이름이 특별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평범했던 그들이 2인조 강도 보니와 클라이드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기까지의 과정이 뮤지컬 <보니 앤 클라이드>의 가장 큰 줄기일 거다.
이름을 향한 선입견
그런데 이 작품에는 보니와 클라이드의 이름보다 더 앞서는 이름이 두어 개 있다. 첫 번째 이름은 프랭크 와일드혼. 팸플릿에도 작가나 연출가보다 더 앞에 있더라. 이 작품의 정체성과 경쟁력을 어디에 두는지 알 수 있는 지점이다. 하지만 이런 설정이 이 작품을 설명하는 데 그리 효과적인 전략은 아닌 듯싶다. 뮤지컬 <보니 앤 클라이드>는 음악적 분위기가 극을 이끌어가는 작품이라기보다는 작가의 주제의식이 짙은 드라마 위주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물론 프랭크 와일드혼의 음악이 지니는 서정적 면모, 그러니까 분명하도록 감성적인 선율과 잘 짜인 이중창의 조합은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 존재감을 지닌다. 당시 미국 대중음악의 장르를 다양하게 활용한 그의 음악은, 최근의 <스칼렛 핌퍼넬>과는 다르게, 극의 분위기와 잘 어우러져 극의 드라마틱한 면모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킨다. 그러니까 그의 음악이 그리 도드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의 음악이 새삼 진부해서가 아니라 이 극의 주안점이 드라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프랭크 와일드혼의 음악으로만 이 작품의 가치에 접근하는 것은 그의 이름의 선입견에 붙잡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작품보다 앞선 이름에는 제작사 엠뮤지컬컴퍼니도 있다. 대중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엠뮤지컬컴퍼니의 전작들은 제작사 고유의 취향이 각인된 작품으로 관객에게 인식되어왔다. 여러 작품에 공통적으로 반복 적용되는 대중적 코드의 활용, 예를 들어 아이돌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는 전략적 기획에서부터 전형성과 과장됨의 경계를 살짜쿵 넘나들면서 대중의 취향에 안전하게 접근하는 연출적 특성 등등 엠뮤지컬컴퍼니의 작품은 나름의 분명한 특성을 구축해왔음이 사실이다. <보니 앤 클라이드>도 전작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색깔의 작품일 것이라는 예상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아이돌의 캐스팅이 많고 여타의 전작에 출연했던 배우들도 많이 등장하니까 이런 예측은 충분히 가능할 터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그런 예측이 조금 빗나간다. <보니 앤 클라이드>는 경쾌한 은행강도액션활극처럼 보이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사뭇 다른 면모가 숨어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름을 증명하기
이러한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해주는 주역들은 ‘연기하는 배우들’이다. 이 작품의 배우들은 자신의 역할에 성실하다. 긴장되지 않은 유연한 호흡에 소년성이 어우러져 클라이드라는 인물의 여유로움과 위태로움을 잘 그려낸 한지상과, 허영과 순수함이 섞인 보니의 내면을 과장되지 않게 그려냄으로써 이제는 노래 잘하는 배우에서 연기 잘하는 배우로 영역을 확장한 리사, 그리고 이정열, 주아, 김법래 등. 주조연을 막론한 모든 배우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미덕이 있으니 그건 그들의 연기에 역할을 넘어선 과장이 없다는 점이다. 역할이라는 틀거지의 구획을 배우의 욕망이 넘어서지 않도록 자신을 구획하는 배우들의 성실한 연기는 공연의 집중력을 만들어낸다. 이들은 연기하는 배우로서의 자신의 이름을 증명한 셈이다.
이들의 연기를 돋보이게 하는 데는 무대와 연출의 힘이 크다. 가난하고 황량한 빈민가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목조 판넬이나, 경사면으로 겹쳐진 계단 등은 간단해 보이지만 인물들의 가난하고 불안한 삶을 보여주는 시각적 장치로 벌써부터 일하기 시작한다. 삼등분된 후막의 활용에서 보이듯이 이 작품의 무대는 연기 공간을 다양하게 만들어내는 기능성에서도 돋보인다. 일초의 손실도 없는 장면 전환이나 시공간의 중첩을 구현하는 데에서도, 그리고 앙상블을 포함한 배우들의 동선을 효과적으로 구획함으로 장면의 집중력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도, 무대의 모양새나 쓰임새가 오목조목 모자란 곳이 없다.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좋은 무대란 어떤 것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만듦새 위에서 가벼운 활극의 외피를 쓴 이 작품의 이야기는 돋보이게 마련이다. 게다가 언뜻 보이는 가벼움과 감상성이 대중의 보편적 인식과 만날 때의 쾌감도 무시할 수 없다. ‘구멍난 행복’을 설파하는 자기네 사회를 향해 자기 조롱을 날릴 수 있는 자신감이야말로 대중 장르의 도덕적 상식이 일궈내는 통쾌한 힘이 아닐까. 미국의 뮤지컬 역사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님을, 그리고 이것이 바로 미국 뮤지컬의 대중문화적 자존감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애국의 거대 서사에 머무는 우리네 대형 뮤지컬에서는 볼 수 없는 그런 자존감이라고나 할까. 뮤지컬이라는 이름이 갖는 가치일 것이다.
이야기하기를 통한 이름 얻기
또 다른 가치도 있다. 뮤지컬 <보니 앤 클라이드>는 실존했던 인물들의 이야기이니만큼, 그리고 영화로도 이미 잘 알려진 만큼,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뮤지컬에서는 이들의 놀라운 범죄 행각에 주목하기보다는 이들이 자기를 이야기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춘다. 오락적 활극에서 진지한 드라마로 중심을 이동시키는 셈이다.
자기 서사의 반대편에는 거대 서사가 있다. 법과 경제 논리라는 거대 서사에서 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범죄자이거나 실업자일 뿐이다. 그러나 자기만의 서사를 쓰기 시작할 때 부재하는 인간은 자아라는 존재를 만들기 시작한다.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자기다움. 배우를 꿈꿨던 보니가 연기를 하지 않고 시를 쓰는 것은 적잖이 상징적인 설정이다. 자기의 시를 완성하고 싶어 하는 보니의 욕망은 자기의 삶을 향한 존중이기 때문이다. 자기들의 죽음이 누구에게는 슬픔으로, 또 누구에게는 축제라고 하더라도 자기들에게는 행복일 거라는 보니의 시는 자기 이야기의 완성을 보여준다. 자신들의 삶이 맞닥뜨린 우연과 중단의 위기를 이야기로 만드는 힘. 어떤 사회학자는 이때 비로소 운명은 경험이 된다고 말한다. 운명이라는 거대 서사에조차 매이지 않고 삶과 죽음 모두를 자신의 경험으로 끌어안는 사람의 이야기는 이름으로 남게 마련이다. 이름은 곧 이야기이다. 보니와 클라이드의 이름이 거대 서사로부터 부여받은 범죄자라는 역할을 넘어서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보니 앤 클라이드>의 이야기가 단순한 액션활극이 아닌 이유이기도 하다.
어쩌면 뮤지컬 <보니 앤 클라이드>가 생각보다 흥겹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다. 1막의 경쾌함에 비해 보니와 클라이드의 회한이 자주 등장하는 2막의 드라마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캐스팅에 따라 공연 자체가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는 위험부담은 피치 못할 함정이 될 수도 있다.(이건 정말 결정적이다!) 그래도 <보니 앤 클라이드>는 가볍지 않은 이야기와 기능적인 무대연출, 서정적인 음악과 과장되지 않은 성실한 연기가 어우러진 작품이다. 단언컨대, 잘 골라서 보시길.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1호 2013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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