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오디션을 할 때 배우들이 ‘On My Own’이나 ‘Star’, ‘Empty Chair Empty Table’ 등을 부르면 ‘그만 좀 하지’ 싶었는데, 연습을 하는 요즘 가장 많은 감동을 받게 된다. 명곡의 힘이란! <레 미제라블>은 뮤지컬 작곡가들에게 바이블로 통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굵직한 테마는 10~11곡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그것들을 다양한 템포와 편곡, 여러 캐릭터들의 노래로 반복해 들려주니 중독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 주옥같은 넘버들에 혁명의 감동이 묻힌 것 같아 아쉬움도 있다. 자유를 외치다가 한 명씩 죽어갈 때 얼마나 눈물이 나는지…. 캐릭터에 적합한 배우들이 들려주는 음악에 감탄하는 것도 좋지만 그들이 만들어내는 감동의 장면들도 눈여겨봐 주길 바란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레 미제라블>의 음악 얘기를 해보자.
<레 미제라블> 음악의 특징은 주인공들의 주요 테마들을 다른 캐릭터들도 조금씩 갖고 있다는 점이다. 굵직한 테마들을 어느 시기에 어떻게 선보이는가를 너무나 잘 선택한 셈이다. 에피타이저를 미리 맛보게 해서 메인 테마가 나왔을 때 감탄할 수 있도록 말이다. 작품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다양한 에피타이저들을 발견할 때마다 한 방 먹은 듯한 느낌이다.
첫 곡 ‘Prologue_ Look Down’은 죄수들의 신음소리로 노래가 시작된다. 노 젓는 속도와 ‘어허’ 하는 음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할 즈음 장 발장과 자베르가 등장한다. 우리가 좋아하는 ‘On My Own’은 장 발장의 첫 장면에서 가장 먼저 나온다. ‘나는 자유 바람 좋고’ 하는 장 발장 노래의 베이스 음으로 이 멜로디가 연주되는데, ‘나 홀로’라는 의미에 연계성을 주려는 의도인 것 같다. 병원에서 죽어가는 판틴에게 코제트를 돌봐주겠다고 약속하는 ‘Fantine`s Arrest’ 말미의 장 발장의 멜로디나, 죽어가는 판틴이 코제트를 떠올리며 부르는 ‘Fantine`s Death’, ‘Epilogue’에서 죽어가는 장 발장과 코제트, 판틴의 영혼이 부르는 멜로디에도 ‘On My Own’ 테마를 사용한 것을 보면 작품 안에서 가장 중요한 곡이라는 생각도 든다. 세상은 나 홀로 극복하고 정체성을 찾아가야 하는 곳이라는 작가의 의도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떼나르디에 부인의 주요 테마도 프롤로그에서 먼저 등장하는데, 가석방된 장 발장을 쫓아내는 여관 주인 아내의 노래가 바로 그 곡이다. 들쑥날쑥한 멜로디를 연기하면서 부르기가 쉽지 않은데, 리허설 하는 동안 한 호흡에 성공한 적이 거의 없을 정도다. 알고 보니 이 멜로디는 전작에서 쇤베르크와 인연이 있었던 떼나르디에 부인 역의 배우가 어려운 노래 좀 부르게 해달라고 해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녀 덕분에 지난 27년간 수없이 많은 배우들이 고생해야 했지만, 이런 어려운 곡들이 있기 때문에 편안한 멜로디들이 더 돋보일 수 있었던 것 같다.
관객들이 처음으로 감동을 느끼게 되는 포인트는 사실 주교 비숍의 노래다. 그런데 그가 부르는 첫 소절이 ‘Empty Chair Empty Table’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장 발장에게 자비와 사랑을 깨닫게 해주는 주교에게 ‘빈 의자’를 연결시키다니 얼마나 문학적이고 감동적인가. 이어 나오는 경찰관의 멜로디는 자베르의 메인 테마다. 굉장히 딱딱하고 불편하지만 활기차고 강렬한 이 테마는 심지 곧은 자베르의 의지를 보여주듯 정확한 템포로 거침없이 앞으로만 쭉쭉 뻗어간다. 이건 비밀인데 <맘마미아>의 ‘Money Money’와 템포가 똑같아서 연주 중에 박자가 안 잡힐 땐 가끔 ‘Money Money’를 생각하곤 한다. 물건을 훔치고 달아난 자신을 용서한 비숍의 감동적인 멜로디가 이어지면, 드디어 마침내 전 세계 장 발장들의 오디션 곡인 ‘Valjean`s Soliloquy’가 흘러나온다.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겠다는 장 발장의 의지를 표현하는 곡인 만큼 쉽게 소화하기 힘든 음역에 열여섯 마디나 되는 긴 호흡을 요구한다. 덕분에 전 세계적으로 장 발장들이 이 음을 얼마나 길게 끄느냐가 화제가 되기도 한다.
12분이 넘는 프롤로그가 지나면 우악스러운 공장 여자들 사이에서 한 송이 꽃처럼 살포시 서있는 너무나 아름다운 판틴을 만날 수 있다. 이 장면을 보면 왜 그렇게 다양한 이미지의 앙상블을 캐스팅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무대 전환과 맞물려 ‘One Day More’ 테마가 들려오는데, 이 테마는 자기 대신 감옥에 갇히게 된 남자의 얘기를 들은 장 발장이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다 부르는 ‘Who Am I’와, 코제트와 마리우스가 처음 만나는 ‘Robbery’에서도 흘러나온다. 판틴의 테마곡인 ‘I Dreamed a Dream’도 ‘One Day More’와 같은 곡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넘버이기도 하다. 이번 공연에서는 전주 없이 바로 노래가 진행될 예정이다. 공장 여자들과 격렬한 몸싸움 끝에 쫓겨난 판틴이 격한 호흡 상태에서 시작하길 바란 연출가 로렌스 코너의 의지였다고 한다. 공장 노동자들이 부르는 ‘At The End of the Day’는 ‘at the end of the day you`re another day older’를 ‘해는 떨어져 또 하루 또 우린 늙어’로 바꾸는 등 딱딱거리는 어감과 라임이 돋보이는 가사에 귀 기울여 감상해보길 권한다. 전문 파이터의 도움을 받아 연출한 판틴과 공장 여자들의 다이내믹하고 에너지 넘치는 몸싸움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판틴의 테마는 공연 중에 연주와 노래를 합쳐서 5~6번 정도 나오는데, 법정에 나타나 자신의 신분을 밝힌 장 발장과 자베르의 대결 장면인 ‘The Confrontation’ 후반에는 배경음악으로 흐르고, 코제트를 찾으러 간 여관에서 마담 떼나르디에와 장 발장이 부르는 ‘The Bargain’에서도 사용된다. 마치 판틴과의 약속을 상기시키듯 판틴의 테마가 장 발장을 끌고 가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장 발장 스스로 노래를 이어가는데, ‘오늘 이후 평생토록 코제트를 키울 거요. 절대 버리지 않겠소’ 하며 코제트를 품에 안을 때 판틴의 멜로디가 확신을 더한다. 드라마적으로나 음악적으로 너무나 훌륭한 이런 규칙들이 작품의 힘을 더해 주는 것 같다.
시간이 흘러 파리 거지들의 모습이 나온다. 프롤로그에서 들었던 ‘Look Down’이 다시 리프라이즈되지만 지저분하고 가난한 하층민의 생활을 보여주기 위해 템포가 전보다 느려진다. 이 장면에서 마리우스와 앙졸라, 가브로쉬 등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한다(이 배역의 배우들은 1막에 등장하는 앙상블 배우들 사이에서 먼저 만날 수 있다). 코제트를 보고 한눈에 반한 마리우스에게 ‘Who Am I’의 네 소절을 준 것은 두 사람의 만남이 의미심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정확히 공식화할 수는 없지만, 이때 에포닌에게 코제트를 찾아달라고 부탁하는 마리우스의 노래가 실은 그의 품에서 죽어가는 에포닌이 부르는 ‘A Little Fall of Rain’의 멜로디와 같다는 게 무척 놀랍다. 에포닌한테 너무 가슴 아픈 얘기를 그녀의 멜로디로 부를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이후 떼나르디에와 장 발장, 자베르가 등장하는데,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듯 자베르의 테마의 음역이 전보다 낮아지고 차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자기 눈앞에서 장 발장을 놓친 자베르는 ‘별들이 계절이 되면 늘 제자리를 찾듯 나도 늘 그 자리에서 너를 찾겠다’는 내용의 ‘Star’를 들려준다. 이 멋진 노래 뒤에 가브로쉬의 뒷담화가 이어지는 것은 참 와 닿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신념이 흔들린 자베르가 죽기 전에 부르는 ‘Javert`s Suicide’가 완결되지 않은 코드로 끝나는 것을 보면 ‘넌 결코 정당하지 않았다’는 작곡가의 의도 같기도 하다. 재밌는 것은 이 곡이 장 발장의 ‘Who Am I’와 같은 멜로디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스러워 하는 테마를 이 곡에 둔 것 같다. 마지막 부분에 다시 흘러나오는 ‘Star’는 무척 감동적이다.
드디어 혁명을 꿈꾸는 학생들의 의지에 찬 ‘ABC Cafe/Red & Black’ 장면이다. 혁명을 다짐하고 사랑에 빠진 마리우스의 고백에 충고하던 학생들은 그들의 정신적 지주인 라마르크의 서거 소식을 듣고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을 부르며 거리로 뛰쳐나가 시민들과 합류한다. 이때 마리우스는 군중들 속에서 빠져나와 코제트의 집을 찾는데 이 장면에서 ‘In My Life’가 등장한다. 잦은 변박으로 열아홉의 두근거림을 표현하는 예쁜 곡인 동시에, 코제트와 마리우스와 에포닌이 각자의 위치에서 ‘내 삶에(in my life) 이런 적 없었어’ 하며 노래하는 라임을 잘 활용한 곡이다. 1막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One Day More’는 작품 안에서 꿈꾸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한 곡이다. 장 발장의 ‘Who Am I’, 마리우스와 코제트, 에포닌의 ‘I Dreamed a Dream’, 혁명을 꿈꾸는 마리우스의 ‘Red & Black’, 떼나르디에 부부의 ‘The Innkeeper`s Song’ 등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해 있는 인물들의 테마가 결합되어 나타난다.
2막에서 중요한 테마는 혁명군에 합류한 장 발장이 마리우스의 안전을 기도하며 부르는 ‘Bring Him Home’이 아닐까 싶다. 배우와의 호흡이 굉장히 민감한 노래인데 마치 정성화와 듀엣을 하는 느낌으로 연주하는 곡이기도 하다. 이 테마는 혁명에 가담한 학생들이 하나둘씩 죽어가는 장면에서 잠깐잠깐 등장하다가 앙졸라의 시신이 객석을 향하는 순간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에필로그에서 다시 등장하는 판틴의 테마가 흐르는 가운데 ‘그들을 지켜주소서’ 하는 메시지를 각인시켜 준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0호 2012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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