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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미덕과 함정의 손바닥 뒤집기 [No.83]

글 |정수연(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겸임교수) 사진제공 |오디뮤지컬컴퍼니 2010-08-16 5,529

지금의 청소년들에게 이상형의 표본은 아이돌 스타겠지만, 사춘기 때의 우리 세대에게 완벽한 이성의 표본은 다름 아닌 ‘교회 오빠’였다. 지금처럼 이성 교제가 자연스러웠던 때도 아니었고 남녀공학은 거의 없었던 터라 아무 규제 없이 이성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교회밖에 없었던 탓도 있겠지만, 군더더기 없이 잘생긴 외모에 진지하면서도 따뜻한 심성을 지닌 ‘교회 오빠’는 그 자체로 빛날 수밖에 없었다. ‘교회 오빠’는 우리 세대의 사춘기 여학생들에게 일종의 전형이었던 거다. 그런데 교회 오빠에게도 문제는 있었다. 그건 바로 그 잘생긴 얼굴과 따뜻한 심성 때문이었다. 잘생긴 얼굴 때문에 주위엔 항상 여학생들이 득시글득시글했고, 따뜻한 관심은 호혜의 원칙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었으니 이 짝퉁 홍익인간 때문에 마음에 상처받은 여학생이 한둘이 아니었다. 교회 오빠를 향한 딜레마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좋은 이유와 싫은 이유가 똑같으니 이걸 어쩔까나.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는 이런 ‘교회 오빠’를 닮은 공연이다. 작년에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후 바로 국내에서 공연되는 작품이니만큼 따끈따끈한 면모부터가 맘에 든다. 우선 공연의 ‘외모’를 보자. 무대와 음악, 배우에 이르기까지 어디 하나 모난 데 없이 잘 만들어진 모양새는 관객의 호감을 끌기에 충분하다. 깊이가 강조된 서재를 연상시키는 무대는 고급스러우면서도 기품이 있고, 그 무대 위에 서있는 두 명의 배우는 어느 조합이든 상관없이 무대를 꽉 채우는 존재감을 만들어낸다. 이미 뮤지컬계의 스타로 검증된 이들이니만큼 배우의 숫자는 무대의 크기와 아무 상관없음을 넉넉히 증명해 보이는 셈이다. 보이는 것의 완성도로 치자면 별다른 왈가왈부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이다.


그리고 마음씀씀이. 이 작품의 이야기는 진지하고 마무리는 따뜻하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친구와의 이야기이니 기본적인 틀은 우정을 다루는 것이다. 친구의 죽음 앞에서 둘이 함께했던 기억을 좇는 이런 소재는 감동의 재료로 이미 익숙하다. 하지만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은 전형 속에서 세밀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친구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그 친구와의 추억을 되짚는 예측가능한 길로 가면서도 창작의 문제를 슬쩍 건드리는 등 제법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도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는 눈으로 보기에도 좋고 마음으로 느끼기에도 좋은 공연이다.


이 작품이 깊이를 더하는 까닭은 이것이 단순히 우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기엔 이리저리 샛길이 많기 때문이다. 전형적으로 보이는 이야기 속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점은 이 작품이 보여주는 의외의 재미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우정으로부터 출발한다. 톰과 엘빈은 어린 시절을 함께한 단짝친구이자 형제처럼 분신처럼 모든 기억을 공유하는 사이로 성장한다. 이들의 우정은 물샐틈없이 견고해 보인다. 하지만 톰이 대학에 들어가면서,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둘의 사이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톰이 쓰는 모든 이야기의 재료는 엘빈과 함께했던 기억들이지만 톰은 온전히 글의 주인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글 안에 항상 살아 숨 쉬는 것은 엘빈이다. 톰과 엘빈은 기억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글을 쓰는 사람과 글을 읽는 사람 중에 글의 주인은 누구일까?


여기에서 이야기는 창작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셈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질문은 설익은 상태로 던져진다. 모름지기 창작이란 무슨 재료를 썼느냐보다는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초점이 있는 바, 자신이 쓴 이야기가 엘빈의 것이라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톰의 열등감은 창작에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으로서 설득력을 갖기엔 너무 빈약해 보인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이어 가기에는 이 작품의 주조가 우정에 치우쳐 있다.


그래도 이런 우정의 끝에서 톰이 깨닫게 되는 것은 엘빈의 이야기가 곧 자신의 이야기였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지독하게도 써지지 않던 엘빈의 추모글이 자신의 말로 자연스럽게 쏟아져 나온다. 이 작품의 우정이 향하는 궁극적인 목표점은 추억의 재생이 아니라 자기 이야기하는 법에 대한 탐색에 있다. 톰이 되찾는 것은 엘빈과의 추억이 아니라 자기의 말로 타인을 이야기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꽤나 멋스럽다.


그런데 정작 공연은 자기 이야기 하는 법을 아직 찾지 못한 느낌이다. 이 작품이 지닌 미덕들은 종종 공연을 지루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하니 말이다. 그 일차적인 원인은 작품의 구조에 있다. 죽은 친구를 회고하는 남자의 고백으로 이어지는 극의 진행은 극적이라기보다는 설명적이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며 기억을 떠올리는 설명에 집중하기 위해 선택한 정서적 주조는 바로 따뜻함인데, 이야기의 한 축을 이루는 엘빈의 삶에 대한 묘사가 평면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나 그 죽음의 이유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은 것도 따뜻함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을 거다. 엘빈의 삶이 입체적이 된다면 톰과의 갈등이 격하게 불거질 수밖에 없을 터, 이 공연은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인 이야기가 무난한 듯 밋밋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서정적인 노래는 개입의 시기가 적절하고 또한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서정성에 비해 적잖은 가사를 듣느라 시종일관 극에 집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인극으로 쓰인 작품이고 이 이야기는 톰의 회고인데. 이건 시비 걸 ‘꺼리’가 아닌 거다. 


이 밋밋함을 해결할 용사는 바로 배우이다. 그들이 섬세한 연기력을 통해 시간의 넘나듦을 표현해준다면 많은 부분이 해결될 터다. 그런데 이 작품 속에서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보다는 존재감이 두드러져 보인다. 대형 뮤지컬에서 보여줬던 각 잡힌 화술은 듣기에 멋있지만 왠지 이 작품과 어울려 보이진 않는다. 회상과 고백의 틈새에서 묘사하는 연기와 설명하는 연기를 자연스레 넘나들기에 그들은 왠지 무거워 보인다. 그런데 이것도 뭐라 트집 잡을 수가 없다. 이 작품이 올라간 무대가 동숭홀, 꽤나 큰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큰 무대에서 두 명의 배우가 극을 이끌어야 한다면 배우는 분명 큰 존재감으로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능력자여야 한다. 관객은 배우의 연기에 열광하지만 그들의 존재감에도 박수를 아끼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큰 무대의 장점을 살리는 수밖에 없다. 그 몫은 무대의 활용에 달려 있다. 무대는 깊게 들어앉은 책의 공간과 그 앞의 빈 공간으로 분할되어 있다. 죽은 엘빈과 살아있는 톰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설정을 위한 공간의 구성이다. 그러나 공간의 깊이에 대한 활용도는 떨어져 보였다. 빈 공간에 조명을 통해 새로운 연기 구역을 설정하는 것은 기능적이었지만 이미 주어져 있는 공간 활용이 명확하지 않았던 것은 아쉬운 점이다. 그럼 굳이 큰 무대를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큰 무대에서 효과 만점인 연출이 없었던 건 아니다. 엘빈과 톰이 계속 뿌려대는 종이, 높게 흩뿌린 종이가 나풀대며 떨어지는 모습은 상징적이면서도 아름다웠다. 그 뿌려진 종이에 좀 더 의미를 부여해서 그것 자체를 하나의 무대장치로 활용했더라면 어땠을까. 눈싸움만 하기엔 너무 아까운 설정이다. 


어떻게 보면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는 불같은 흥행을 일으킬 작품이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가치는 적지 않다. 소극장과 대극장을 가리지 않을 수 있는 규모의 융통성도 그렇고, 배우들의 입장에서 보면 세밀한 연기력에 기대 관객과의 호흡을 경험하기에도 좋은 작품이다. 기억을 거스르는 극적 구조도 이야기와 공간을 마주 비벼 연출의 창의력을 발휘하기에 적절한 재료가 될 것이다. 부디 이번 공연에서 이 작품이 더 원숙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야 이런 변주도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3호 2010년 8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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