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력을 가진 흉측한 녹색 괴물이 악당의 머리와 팔다리를 잔인하게 뽑아내면서 동시에 정의감에 불타는 영웅적인 노래를 부른다. 과연 웃길까? 그렇다. 일단 웃긴다.
뮤지컬 <톡식 히어로>(연출 이재준, 원제 The Toxic Avenger)는 1984년 미국 B급 컬트영화의 본산인 트로마 엔터테인먼트가 만든 동명의 영화를 각색한 것이다. 원작 영화가 그랬듯이 이 작품은 신체 절단, 자학, 슬랩스틱, 섹스 조크, 크로스드레싱, 블라인드 유머 등 B급 코미디가 갖추어야 하는 다양한 코드를 구비했다. 무대로 옮겨지면서 녹색 괴물 톡시와 도서관 사서 사라의 사랑 이야기는 대폭 강화되었고, 원작에서 남자였던 시장은 뮤지컬에서는 주인공의 어머니 역을 함께 맡으면서 여자로 바뀌었다. 동네 건달, 사라의 수다스런 여자 친구들을 포함해 나머지 전체 조연들은 무대 위에서 2명의 남자 앙상블로 축약되었다. 뮤지컬에서는 도합 5명의 정예 멤버들로 추려져서 공연 내내 전천후 웃음 폭탄을 쏟아놓는다. 삼성역에 위치한 KT&G 상상아트홀에서 새롭게 개막한 라이선스 공연은 오랜만에 실컷 웃으며 볼 수 있는 뮤지컬이다.
배경은 맨해튼 서쪽을 흐르는 오염된 허드슨강 너머에 위치한 뉴저지 주의 가상 도시 트로마빌이다. 여기에서 뉴저지는 뉴욕 맨해튼에서 배출한 유독성 폐기물의 집결처로 묘사된다. 상황만 보면 마치 1980년대 서울의 난지도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실제로 뉴저지에 그런 곳은 없다. 오히려 뉴욕 코미디의 단골 소재인 ‘뉴저지 유머’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나이트라이프를 즐기는 뉴요커들에게 뉴저지 주민들은 전혀 쿨하지도 패션 감각도 없는 귀찮은 손님들인 데다가 주말마다 뉴욕에 차를 끌고 나와서 식당이나 클럽의 물을 흐리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이 작품은 한술 더 떠 뉴저지를 아예 유독성 폐기물 집합소로 비유한 것이다. 뉴저지 유머가 이제는 지겨울 만도 하지만 어쨌든 유머 너머에 환경 오염으로 인한 재앙을 경고하는 등 적절한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가미했기에 아직은 수용할 수 있는 유머 코드의 하나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여하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뉴저지 트로마빌의 시장은 주지사 출마의 꿈을 위해 자신의 도시를 맨하튼에서 배출되는 더러운 유독물 처리장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운다. 한편 정의감에 불타지만 나약한 심신을 가진 환경 운동가 멜빈은 시립 도서관에서 찾아낸 비밀 서류에서 유독물질을 배출하는 회사의 사장이 다름아닌 시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멜빈은 그녀의 더러운 계획을 막기 위해 싸우다가 시장의 하수인들에 의해 유독물질을 담은 커다란 탱크에 빠지게 되고 외모가 흉측한 녹색 괴물로 변한다. 한편 시립 도서관에 사서로 근무하는 아름다운 사라는 진지한 멜빈에게 호감을 가졌지만 이제는 자신을 위험에서 구해준 ‘영웅’ 톡시에게로 그 사랑이 옮겨간다. 볼 수 없는 그녀는 사실은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눈알이 떨어지고 녹색 오물을 뒤집어 쓴 헐크와 슈렉을 합한 외모의 흉측한 괴물과 항상 책을 가까이하며 사랑을 꿈꾸는 아름다운 사서이다. 이쯤되면 이 커플은 프랑스 소설 ‘미녀와 야수’의 주인공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게다가 앞 못 보는 사라에게 톡시는 상상 속의 멋진 프랑스 남자이니 말이다. 그렇다 해도 부족함이 많은 두 사람은 여전히 로맨틱 주인공으로서 적합하지 않게 보인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창조한 괴물이 이미 한 세기 전에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훔쳐간 이래, 이런 괴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외모가 아니라 내면이기에. 결론은 예상대로 정의의 승리다. 시장의 계획은 좌절되고 두 사람은 외모를 초월한 사랑에 이르게 되니 말이다.
<아이 러브 유>, <올 슉 업> 등 코믹한 작품들로 잔뼈가 굵은 조 디피에트로가 대본을 맡았다. 그는 올해 토니상에서 <멤피스>의 작가로 생애 첫 토니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작곡은 본 조비 밴드의 키보디스트 출신의 데이빗 브라이언이 맡아 전형적인 1980년대식 파퓰러 록 사운드를 들려준다. 그 역시 <멤피스>로 음악상을 받았는데 이 작품이 이들 협동 작업의 전초전이었던 셈이다. 조 디피에트로가 현재 작가 인생의 절정기를 달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B급 영화를 각색한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내용 면에서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다. 전체적으로 알란 멘켄의 완벽한 음악과 하워드 애쉬먼의 촌철살인의 대사가 있는 <리틀 숍 오브 호러스>나 <리퍼 매드니스>에 미치지 못하고 반전이 없어 쉽게 예측 가능한 스토리도 뒷심이 부족하다. 그나마 오프 무대에서 인기 요인으로 꼽힌 것은 쉬운 록음악 멜로디와 기지가 빛나는 라임을 활용한 가사에 있다. (‘Get the Geek’ 같은 노래 제목과 ‘macho’와 ‘gazpacho’를 라임으로 잇는 구성 등) 이 작품의 오프브로드웨이 연출은 <유린타운>으로 토니상을 받은 존 랜도가 맡았는데, 그는 대사에서 손드하임의 <애니원 캔 휘슬>의 일부분을 차용했고, 무자비한 살육 장면에서는 <스위니 토드>를, 정치 집단과 싸우는 시민의 이야기에서는 자신의 <유린타운> 등을 연상시키는 장치를 도입했다.
이번 한국 라이선스 공연에서는 기본 플롯의 문제는 여전했지만 배우들의 코믹 열연은 발군이었다. 비록 무대 위에 위치한 4인조 라이브 밴드의 거센 음량과 뉴저지 유머 등의 정서적인 차이로 인해 내용 면에서 전달력이 떨어지는 점이 아쉬웠지만, B급 무비의 기본인 현실도피와 상상의 공간에 빠뜨리는 즐거운 쇼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코믹 연기의 핵심은 역시 멜빈/톡시 역을 맡은 오만석이다.(더블캐스트 라이언) 오만석은 극의 초중반부터 불편한 분장을 하고서도 특유의 유머 감각을 잃지 않고 자연스러운 애드립을 적절한 타이밍에 표출시켜 재미를 배가시키며 제대로 물 만난 물고기처럼 무대 전체와 객석까지 종횡무진한다. 사라를 연기한 최우리(더블캐스트 신주연)도 맹인 지팡이로 남자의 사타구니를 가격하고, 듀엣을 부르다 바깥으로 나가고, 엉뚱한 양념을 끼얹는 블라인드 유머를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다. 시장과 어머니를 함께 맡은 김영주(더블캐스트 홍지민)의 2중 연기는 <지킬 앤 하이드>의 변신 장면을 도입하고 대역과 순간적인 의상 퀵체인지를 적절히 활용해서 눈 깜짝 할 사이에 연기 변신을 이루어내 이 작품의 백미를 만들어낸다. 또한 임기홍, 김동현 두 사람은 수많은 역할을 소화해내는 멀티 듀엣이다. 임기홍은 사건 해결에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과학자부터 걸 그룹 가수, 헤어드레서까지 폭넓게 연기한다. 김동현 역시 깡패나 경찰 역을 소화하는것은 물론이고, 그 자신이 전설인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제스처를 패러디한 포크록 넘버 ‘톡식 히어로의 전설’까지 부르며 멀티 연기를 이어간다.
무대 위에는 폐기물 드럼통을 형상화한 커다란 고정 세트가 놓여있고 중앙의 구조물이 180도 회전하면서 도서관, 시장 집무실, 멜빈의 집, 사라의 집 등 다양한 공간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오프 브로드웨이의 무대 디자인과도 유사하다. 다만 좌우 객석 너비가 긴 상상아트홀에서 대부분의 동선이 중앙에 집중되다보니 전체 관객들의 시각선에 대한 배려가 조금은 필요해 보인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의 미덕은 감정의 굴곡을 유발시키는 애매한 신파적인 요소를 도입한다거나 하는 무리수를 처음부터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령 흉측하게 변한 아들의 얼굴을 처음 본 어머니는 ‘넌 항상 나를 실망만 시키는구나’라고 쌀쌀맞게 말한다. 이 대사만으로도 이 작품은 B급 정서를 포기하지 않고 초지일관 유머를 추구한 일관성이 보인다. 하지만 1시간 40분 공연이 끝났을 때 아쉬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마치 패스트푸드점에서 최고급 메뉴를 맛본 기분이랄까.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4호 2010년 9월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