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usical

더뮤지컬

magazine 국내 유일의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이 취재한 뮤지컬계 이슈와 인물

뮤지컬&컬처 | [REVIEW] 동병상련, 그리고 약간의 부러움, 부끄러움? <디에> [No.68]

글 |이영미(대중문화평론가) 사진제공 |NDPK 2009-06-01 6,145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말이 있다.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불쌍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자신만이 겪는다고 절망했던 고통과 고민을 똑같이 겪는 사람을 볼 때, 그만큼 이해도 잘 되고 공감도 깊어지게 마련이다. 창작뮤지컬만 주로 대상으로 해온 이 코너에서 중국의 뮤지컬 <디에>를 평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뮤지컬 창작의 어려움을, 같은 아시아권 국가인 중국도 비슷하게 겪고 있을 것이라는 짐작, 그것을 과연 그들은 어떻게 타개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 그네들의 약점을 통해 우리가 돌이켜 배울 점을 찾을 수 없을까 하는 타산지석(他山之石)의 마음, 뭐 이런 생각들이 애초에 <디에>를 보러갈 때에 갖게 된 생각이었다.


작품은 ‘역시나’였다. 무엇보다도, 드라마나 영화 등 다양한 작품으로 재창작된 중국의 ‘양축설화’(양산백과 축영대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담은 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의 내용이 납득되지 않았다. 어느 나라나 이루어지지 못한 슬픈 사랑 이야기야 널리고 널린 것인데도, 도대체 이 작품의 내용은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원래의 양축설화는 이러하다. 여자인 축영대가 남장을 하고 남자들만 다니는 학교에 다니면서 가난한 선비 양산백과 우정을 쌓고 결국 사랑까지 하게 되며, 부모의 반대로 결혼이 무산되고 양산백이 먼저 죽는데, 축영대가 시집을 가다가 양산백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자 무덤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두 영혼이 두 마리의 나비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너무도 쉽게 이해된다. <디에>는 이를 변형하여, 사람이 되고 싶은 나비 인간들의 사랑 이야기로 바꿔 놓았다. 물론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동물의 이야기 역시, 이해할 수 있는 흔한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우렁각시 이야기나 중국의 백사전(白蛇傳) 등은 얼마나 익숙한가.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인간과 동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다. 그런데 <디에>는, 저주를 받아 나비 인간으로 사는 이들이 저주를 풀고 싶어 인간에게 나비 인간 족장의 딸 축영대를 정략결혼시키려 하고, 이곳에 우연히 들른 나비 인간 나그네인 양산백이 축영대와 사랑하여 도망치는, 나비 인간들끼리의 사건으로 만들어놓았다. 양축설화의 러브스토리와 나비 소재를 엮어 판타스틱한 시공간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하지만 뭐, 그것까지도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아시아 설화의 익숙함을 과감한 창작으로 탈피하게 되면, 납득할 수 있는 설정으로 관객을 이해시키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나비 인간의 정체가 무엇인지, 나비 인간에게 씌워진 저주가 무엇인지, 족장이 자신의 딸을 바치는 ‘검은 거래’를 했다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등에 대한 설명이 도통 없다. 심지어 주인공 양산백이 나비 인간인지 그냥 인간인지조차 작품 중반에 이르도록 파악되지 않는다. 계속 등장하는, 엄마 찾는 나비소녀의 정체도 모호하며, 역시 나비 인간인지 아닌지가 불분명했던 ‘취객’은 말미에 난데없이 축영대의 생모로 밝혀진다. 길게 설명했지만, 한마디로 말해 인물과 사건의 설정 자체가 충분히 객관화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인물과 사건의 설정이 잘 안 되는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주 기본적인 극작술로만 이야기하자면, 인물이 사건을 통해 구축된다는 극작의 기본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즉 사건이란 갈등·대립을 의미한다. 해설자의 설명이 곁들여질 수 없는 연극에서는, 인물들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인물들의 정체와 관계, 성품 등이 드러난다. 이것을 인물들이 직접 말로 ‘설명’해버리면 다소 맥이 빠진다. 그런데 이 작품은 여러 장면이 흐르도록 인물들 간의 대립축이 설정되지 않을 뿐 아니라, 설명조차도 친절하게 해주지 않으니, 관객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극의 초반부에 대립축이 빨리 설정되지 않으면, 인물의 설정도 제대로 안 될 뿐 아니라 극 전체가 긴장감을 갖지 못하고 늘어진다. 장면은 계속 바뀌는데, 관객은 인물 파악조차 안 된 상태에서 극의 핵심적 사건을 찾으려고 매 장면 기대하다가 실망하게 된다. 게다가 중심적 대립축 설정의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채 극이 중반에 도달하면, 이제부터는 극의 주제 파악이 흔들리게 된다. 극의 주제는, 인물의 입을 통해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대립의 의미를 통해 구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극작의 기본이 제대로 안 된 작품은 우리 창작뮤지컬, 특히 대형 작품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로맨틱 코미디가 주를 이루는 작은 작품은 인물 수도 적고 설정도 단순한 것에 비해, 대형 작품은 많은 인물과 스케일이 큰 사건을 다루어야 하므로 극작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디에>를 보니, 완전히 동병상련, ‘안습’이다.
아시아권의 작품에서 이런 문제가 자주 드러나는 것은, 위에서 이야기한 극작술이 서구 근대극의 극작술이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전근대적 연극에서는 관객 모두에게 익숙한 이야기를 놓고 갈등·대립을 놀이화하는 것이 특징이어서, 대립축을 통해 인물성격과 주제까지를 구축하는 극작술에 익숙하지 않다. 근대극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사실주의극이 아시아에서는 유달리 지루하고 늘어지며 게다가 비사실적인 작품이 되어버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화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세계 시장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멋진 대형 뮤지컬을 보란듯이 만들어 내놓아야겠다고 과도하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경우(이 경우 대개는 공공기금이나 기관이 개입되어 있다), 이런 증상이 훨씬 더 심해진다. 민족적·전통적 소재, 화려한 무대미술과 과시적 스펙터클, 무게감 있고 멋진 넘버에 대한 집착이 우선하기 때문에, 기본 중의 기본인 대립축의 안정된 설정과 인물 구축, 주제 구현 등이 뒷전으로 밀려버리기 일쑤이다. 이럴 경우 작가와 작곡가가 하고 싶은 말은 별로 보이지 않고, 오로지 멋진 작품을 내놓겠다는 의욕만 불거진다. <디에>도 나비의 비상과 화형 장면, 음습한 공장 분위기의 무대와 대형 영상에 치중하였고, 음악과 안무 스케일 역시 매우 크고 웅장하다. 그러나 이는 부실한 뼈대에 장식품만 잔뜩 걸친 듯 겉돌아 제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작품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그러나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래도 이들이 우리보다 나은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적어도 이들은 창작의 핵심 스태프를 자국인으로 채웠다. 세계적인 뮤지컬을 만들겠다는 다짐으로 안무, 조명, 영상, 심지어 연출과 크리에이트브 디렉터까지 유럽에서 모셔왔다. 하지만 작품의 핵심인 극본, 작곡, 작사는 중국인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렇게 되면 외국인과 자국인이 한자리에 모여 협동작업을 하는 것이 불가피해진다. 즉 외국의 선진기법을 도입하되 반드시 협동작업을 통해 그 기술을 배우고, 특히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분야는 자국인이 맡아야 한다는 원칙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것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셰익스피어 희곡을 외국인 작곡가에게 의뢰하거나, 아예 한국 희곡 원작을 외국 극작가에게 개작하게 하고 작곡까지 외국인의 손에 맡기어 버린 채(이 경우 대개 작품만 문서와 파일로 오갈 뿐 직접적 협동작업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로지 제작·기획만 장악하고 한국인 배우가 출연하는 것으로 한국 창작뮤지컬이라고 내어놓는 대형 작품들을 이미 여러 번 목격한 바 있다. 극본과 작곡을 맡길 인재가 부족하니 이런 고육지책을 썼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핵심 창작 기량은 모두 내어놓고 제대로 된 교류도 없이 무엇을 배우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오히려 단기적 작품 성과에만 집착하는 성과주의가 우리를 이렇게 몰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작품을 몇 번씩 뜯어고치는 데 드는 엄청난 제작비를 감당하며 뮤지컬 창작과정을 익히는 <디에>의 제작 방식은 우리로서는 상당히 부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정작 부끄럽고 ‘안습’인 건 우리이다.

 

 

네이버TV

트위터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