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에 브로드웨이에서 첫 선을 보였으며 ‘단일극장에서 최장기 공연’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뮤지컬 <판타스틱스>. 굉장한 이력에 비하면 공연의 명성이나 인지도가 다소 부족해 보여 의아할 수도 있지만 직접 공연을 보고 나면 어느 정도 수긍이 된다. 탄탄한 스토리와 로맨틱한 사랑의 멜로디, 감동적인 스토리로 소극장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알찬 재미와 감동을 선사하며 장기공연으로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극의 두 주인공인 소년(마트)과 소녀(루이자)는 부모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순수한 사랑을 하고 있는데, 실상 부모 간의 갈등은 둘을 결혼으로 골인시키기 위한 ‘연기’였던 것이다. ‘안돼’ 라고 하면 더욱 간절해지고 좋아지는 자녀들의 습성을 이용하여, 사랑의 결실을 맺어주고자 거짓 납치극까지 꾸미는 무리수를 둔다. 둘은 자연스럽게 애정을 이어가는 듯하지만 아버지들의 속셈이 들통나고 난 후에 오히려 열정은 식게 된다. 사랑을 가로막고 있던 장애물이 사라지면서 간절함은 사그라들고 서로에게 예전과 같은 애정은 느낄 수 없다. 마트는 루이자와 헤어진 후 도시로 떠나 극단생활을 하며 갖은 고생을 하게 되고, 루이자는 납치극을 꾸몄던 악당 엘가로에게 반해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며 그를 따라 다니지만 오히려 엘가로의 속임수에 넘어가 어머니의 목걸이를 빼앗긴다. 이러한 시련의 시간을 통해 마트와 루이자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둘 사이의 애정을 확인한다.
‘Try to remember’라는 귀에 익은 멜로디로 무대의 막을 여는 이 공연은 음악이나 배우들의 의상에서 고전적인 느낌을 물씬 전달한다. 초반 두 주인공이 부모의 반대 속에서도 사랑을 키워가는 상황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자연스레 연상시킨다. 내레이터가 등장하여 해설을 하고 관객들에게 극의 진행에 대해 설명하고 질문을 던지기도 하는데, 마트와 루이자의 이야기는 극중극의 형식으로 전개된다. 배우들은 퇴장하지 않고 자신의 장면이 아닐 때에는 양 옆의 나무의자에 앉아 어둠 속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종의 브레히트의 서사극의 방식인 ‘낯설게 하기’로 관객들로 하여금 무대 위의 상황과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무대 위에서는 ‘뮤트’ 라는 인물이 들고 있는 지팡이만으로 허구의 세트인 벽을 만들었다. 벽은 일종의 환상을 빚어내는 매개체가 되는데, 그 ‘벽’이 곧 부모들의 거짓 작전의 표상이기도 하다. 벽을 사이에 둔 연인들의 사랑은 더 없이 신비롭고 아름답게 묘사되고, 사랑에 빠진 연인의 기쁨과 환희 또한 경쾌한 대사와 노래들로 표현된다. 벽이 존재할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마트와 루이자가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데 그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사라지고 난 후에는(부모들의 계획이 드러난 후) 사랑은 식게 된다. 서사극적 형식과 더불어 판타지의 허상을 드러내는 이야기를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극에 몰입하기 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현실과 판타지의 관계에 대해 재고해 볼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여백이 많은 무대는 상징적인 도구로 세트를 대신하게 하여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환상을 증폭시키게 했다. 남녀를 사랑으로 이끌게 한 판타지가 사라지고 난 후에는 절망과 고난이 그 자리를 대신하지만 덕분에 그들은 세상을 더 경험하게 되고 스스로의 힘으로 진정한 인생과 사랑의 참맛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판타지는 희망과 긍정을 주었지만 그 토대가 단단하지는 않아서 언제 부서질지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견고하게 그 자리를 메워나가는 과정에서 또 다른 인생의 깨달음을 얻게 될 수도 있다.
배승길과 최보영은 소년, 소녀와 같은 풋풋한 이미지를 보여주었고, 1인 2역을 소화한 오대환과 김지훈은 몸을 사리지 않는 코믹 연기로 관객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다. 김태한과 강인영도 노련하게 각자의 캐릭터를 소화하여 작은 공연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납치극과 마트가 극단생활을 하며 방황하는 장면들이 다소 길어서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단순한 사랑이야기로 보이는 공연이 의외로 판타지의 허위와 현실을 충만하게 하기 위한 깨달음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번 공연은 뮤지컬 넘버인 ‘Try to Remember’ 를 번역하지 않고 원곡 가사 그대로 부르면서 배우들이 스케치북에 적힌 글귀로 가사 내용을 전달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래를 감미롭게 들을 수 있어 좋지만, 그 외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넘버가 없어서 아쉽다. 가볍게 즐기기도 좋고 은근히 전해지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와 성장이라는 테마를 덤으로 느낄 수도 있는 공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