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석이 <벽을 뚫는 남자>의 감초 캐릭터 듀블에 캐스팅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미지 자체로 이미 반은 이긴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코믹한 이미지를 잘만 활용한다면 크게 어려울 게 없는 역할일 테니까. <벽을 뚫는 남자>에서 그가 보여준 것은 예측 그 이상의 연기다. 고창석은 그의 장점을 살려서, 코믹한 캐릭터를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이번 무대에서 제대로 보여줬다.
2009년 <보이첵> 이후 꽤 오랜만에 무대에 서는 거죠? <벽을 뚫는 남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어요?
소개로? 하하. 더 늦기 전에 공연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제작사에서 제의를 받았어요. <벽뚫남>은 초연 때 재미있게 본 공연이었는데, 마침 제게 듀블 역을 제안하더라고요. 듀블이면 지금 대중들이 제게 기대하는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잖아요. 관객의 기대를 충족하면서 플러스알파의 매력을 보여드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하게 된 거죠. 그런 사람들 많이 봤거든요. 이미지 변신한다고 했다 피 보는 사람들.(웃음)
대중적으로 인지도를 얻고 나서 무대에 서는 게 부담스럽진 않으세요? 게다가 뮤지컬은 처음 해보는 거기도 하고요.
물론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 하는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는 분들도 있겠죠. 실제 그런 부담감 때문에 연극배우 출신들이 무대로 못 돌아오는 경우도 봤어요. 그런데 저는 연기 외적인 부분에서 부담감을 느끼는 편은 아니에요. 부담감이나 책임감은 배우를 망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을 하는 거고, 사람들 반응은 별로 신경 안 써요. 뭐 어쩔 거예요. 출연료 뱉으라고 할 거예요? 허허허. 그리고 많이 안 알려져서 그렇지 영화를 한 시간보다 공연을 했던 시간이 훨씬 길어서 무대가 부담스럽진 않아요.
그런데 영화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공연 작업에 참여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제가 계속 무대에 서겠다고 하는 이유는, 연극을 엄청 사랑해서, 또는 공연을 엄청 사랑해서가 아니에요. 배우는 장기 레이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래도록 이 일을 잘하기 위해 하는 거죠. 영화나 드라마는 내가 가지고 있는 걸 꺼내 쓰는 느낌이라 소모적인 부분이 있거든요. 그런데 공연은 생산적인 느낌을 받아요. 똑같은 대사를 수천수만 번씩 반복하는 동안 뭔가를 새롭게 깨닫거든요. 지금 공연하는 것도 즐겁지만 연습을 하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몸은 조금 힘들었지만 힐링이 되는 기분이었죠.
어떤 면에서 힐링이 되는 걸까요?
스포츠로 따지자면 영화는 사격이나 양궁과 비슷해요. 슛이 들어가면 감독이 “레디 액션”에서 “컷”을 외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짧으면 10초, 정말 길어야 5분이에요. 순간 집중해서 ‘빵’ 쏘는 거죠. 쏘고 나면 감독이 그래요. “10점, 0점, 1점, 2점.” 그런데 공연은 동료들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거잖아요. 축구 같죠. 만날 총만 쏘다 오랜만에 열한 명이 축구할 때의 기쁨이랄까, 그런 게 있어요.
연습을 해보니 기대와 달랐던 점은 없었나요?
어떤 장르나 환경은 비슷한 것 같아요. 크게 이질감을 느끼진 않았어요. 하나 놀라웠던 건, 이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들 한 명 한 명이 다 프로구나 하고 느꼈던 거예요. 극단 생활 할 때는 후배들을 가르쳐야 할 때도 있는데, 여기선 열두 명의 동등한 파트너를 만난 듯한 기분이랄까. 그것만큼은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이 친구들이 노래 연습하는 걸 듣는 것만으로도 내 실력이 느는 것 같고,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 기분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거죠.
사람은 죽는 날까지 성장한다고 하지만, 일정한 나이대를 지나면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걸 느끼기 쉽지 않잖아요. 그 자체로 무척 소중한 경험이었겠네요.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죠. 배우로서의 가장 큰 욕심이 지금처럼 죽을 때까지 하는 거예요.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신선한 재료로 남아있고 싶은데, 그게 생각보다 어렵단 말이죠. 이야기하신 것처럼 경력이 늘어날수록 자극을 받고 ‘내가 성장하고 있구나’ 하고 느끼는 게 힘드니까. 이번엔 참 운이 좋았어요.
가족들은 이번 공연을 봤나요? 뭐라 그러던가요?
네, 집사람과 딸아이, 두 사람 다 봤습니다. 열두 살 난 우리 딸은 공연은 재미있게 봤는데 아빠는 미친 사람 같았대요.(웃음) 집사람은 저보고 물 만난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기분 좋은 반응이죠.
고창석 씨가 연기한 듀블을 보면서 좋았던 건, 코믹한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관객들을 웃기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듀블이라는 과장된 캐릭터가 무척 자연스러워 보였죠.
작품마다 원작자가 정해놓은 반드시 웃겨야 하는 타이밍이 있어요. 그럼 그 부분은 어떻게 해서라도 관객을 웃겨야죠. 하지만 그 외에는 관객 반응에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젊은 배우들이 코미디를 할 때 흔히 하는 실수가 이런 거예요. 관객들의 반응이 좋으면 신나서 오버를 하게 되고, 반응이 안 좋으면 당황해서 오버하게 되는 거. 그런데 관객들은 굉장히 무섭고 정확하단 말이에요. 공연 중에 사람들이 막 웃어서 ‘나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하고 후기를 보면 ‘오버 하고 있네’ 이렇게 써있어요. (웃음) 관객과 교감하는 건 중요하지만, 관객에게 어필을 하려고 하거나 타협하기 시작하면 끝이에요. 그럼 배우도, 공연도 무너지죠.
관객 반응에 대해 괜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내가 할 몫만 해야 한다는 얘기네요? 사실 이게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캐릭터마다 그 역할에서 요구하는 정서가 있어요. 연출자가 오디션에서 어떤 배역을 뽑을 땐, 다른 게 아니라 그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배우를 찾는단 말이죠. 그래야지 전체 드라마가 연결되니까. 그런데 많은 배우들이 정작 역할에서 필요로 하는 정서는 안 보여주면서, 울었다, 웃었다, 내가 얼마나 훈련이 잘된 배우인지에 대해서만 어필해요. 자신이 좋은 배우라는 것만 계속 어필하려고 할 때, 상대방은 피곤함을 느끼거든요. 내가 여기서 해야 하는 게 이거라면, 그게 아주 작은 것이더라도 그걸 보여주면 돼요. 공연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배우가 애쓰는 게 보이면 관객도 금세 지치기 마련이죠. 이번 공연만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작품을 보면, 고창석이라는 배우는 괜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인상이었어요. 무언가를 만들어서 더 하려고 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요.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웃기지 말라 그래요. 연습은 연습이고 실전은 실전인 거예요. 무슨 말이냐면, 연습 때는 말이 되는 거, 안 되는 거 용쓰면서 다 해봐야 해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들이 구분되니까. 공연 땐 그걸 바탕으로 스스로 의심하지 않고, 순간 분위기를 잘 챙겨가면서 가볍게 ‘툭툭’ 쳐내는 것처럼 보여주는 게 좋지 않나 하고 생각해요.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요.
듀블 역시 포인트를 잡아서 그 부분을 탁탁 살려주는 느낌이 좋았어요. 다만 한 가지 아쉬웠던 건, 초연 때 김성기 배우가 연기한 듀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거예요.
듀블이란 캐릭터에 대해 모르고 오는 관객들도 있겠지만, 보통은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 공연의 스타트를 끊는단 말이죠. 그럼 듀블에 대해 기대하는 게 있어요. 그건 제작사도 마찬가지예요. 그렇기 때문에 캐릭터를 바꾼다는 건 큰 공사예요. 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연출하고 싸워야 하고, 제작사하고도 싸워야 하고, 나중엔 관객들하고도 싸워야 하죠. 아마 극단 작업이었다면 새롭게 해봤을 거예요. 선배님이 했던 건 일부러라도 더 안 했겠죠. 그런데 이것은 그렇지 않아요. 뮤지컬은 대중예술이잖아요. 관객들의 기대치를 충족시켜주면서 거기에 플러스알파를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생각지도 못했던 예능 프로그램 출연이 인기를 얻으면서 고창석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객석의 분위기가 달라지죠. 그런 반응이 연기하는 입장에선 어떠세요?
좋죠. 관객 반응이 좋은 건 나쁜 게 아니고 좋은 거잖아요. 주위에서도 그래요. “형은 아무것도 안 해도 사람들이 웃잖아요.” 그러면 전 속으로 그러죠. “근데 내가 만약 못해봐, 그 분위기 어쩔 거야.” 문제는 그다음인 거죠. 사람들이 ‘와’ 하고 반겼는데, 제가 연기를 시작하는 순간 ‘어?’ 하는 반응이 나오면 끝이에요. 관객 반응이 인기발인지 연기발인지는 스스로 정확하게 판단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요즘처럼 연기력보다 스타성이 중요시되는 시대에, 연기력이라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배우의 영역에는 연기를 잘하는 것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해요. 대중에게 사랑받고 싶다면 연기를 잘하는 것과 더불어 다른 무엇이 필요하죠. 그런데 이 모든 게 길게 보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가 20년 연기를 했는데, 이순재 선생님처럼 되려면 앞으로 40년을 더 해야 해요. (혼자 되뇌며) 40년… 그때도 살아있을지 어떨지.(웃음) 그때까지 연기하려면 그게 실력 없이 스타성으로 되나요. 그 자리는 금방금방 바뀌는데.
만약 대중에게 더 이상 호응을 받지 못하면, 과감하게 연기를 그만둘 생각도 있으세요?
아뇨. 전 살면서 대중에게 열광을 받아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동료들에게는 항상 사랑받았어요. 대중에게 사랑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동료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제게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건 동료니까. 설령 관객들은 내가 뭘 하는지 모르더라도, 연출자는 내가 전체 공연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안단 말이죠. 연출이 내게 준 임무를 찰떡같이 잘 수행해내는데 안 쓸 거예요? 스타가 꼭 필요한 작품은 못할지 몰라도, 그것 말고도 할 게 얼마나 많은데요.
고창석이라는 배우는, 어디에도 없는 캐릭터잖아요. 오래도록 연기를 하면서 후배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게 있으세요?
어떤 후배들이 내 연기를 따라하겠어요. 항상 주인공을 꿈꾸는 아이들인데. (웃음) 저는 배우를 꿈꿨던 적도 없고, 우연히 연기를 시작하게 된 사람이에요. 근데 연기가 정말 재미있었어요. 정말 재미있어서, 그래서 배우를 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대중적으로 사랑받는다고 해도, 연기하는 내가 고통스럽기만 하다면 못할 것 같아요. 배우는 ‘내가 언젠간 뜰 거야’ 하는 생각만 가지곤 절대 할 수 없어요. 너무 고통스럽거든요. 그런데 연기하는 게 재미있으면 조금 서럽더라도 버티고, 버티고, 또 버텨야 해요. 저희 형이 하버드를 나왔어요. 제가 이걸 방송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 방송이 나가고 나서 제 딸이 이런 댓글을 보여주더라고요. “네 형이 하버드에 간 것보다 네 얼굴로 배우를 한다는 게 더 대단하다.” 그걸 보고 전 웃었어요. 어떻게 보면 그게 힘을 주는 거잖아요. 나 같은 놈도 하니까, 네가 재미만 느낀다면 너도 할 수 있어, 그런 힘을 주고 싶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2호 2013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