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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잃어버린 얼굴 1895> 차지연, 배우보다 ‘좋은 사람’이 먼저다 [No.121]

글 |송준호 사진 |심주호 2013-10-08 6,553

지난 4월 막을 내린 <아이다> 이후 차지연의 행방은 한동안 묘연했다.
인터넷에도 지난해 출연했던 <불후의 명곡>과 관련해
몇 개의 기사가 나와 있을 뿐이다. 그렇게 자취를 감췄던 그는,
그로부터 5개월 후 명성황후로 조용히 돌아왔다.
다시 만난 차지연은 마지막 무대나 TV에서의 다소 무거워 보였던 느낌 대신,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푸하하’ 하고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몇 달간의 공백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프리랜서로 다시 찾은 ‘배우의 길’

돌이켜 보면 차지연은 매년 쉴 새 없이 작품을 해왔다. 데뷔 이후 풍부한 성량과 흡인력 있는 가창력으로 금세 주가를 끌어올린 그는 몇 년 만에 뮤지컬계의 블루칩으로 주목받았다. 소속사도 생기면서 일정은 더 많아졌고, 오랜 꿈이었던 가수의 길도 TV 출연을 통해 자연스레 열렸다. 기존 가수들의 무대를 압도하는 파격적인 공연으로 ‘과연 차지연’이라는 찬사도 이끌어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더 이상 가수 활동에 미련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엄청난 스트레스가 있었다.
“너무 힘들었어요. 뮤지컬은 작품 안에 명확한 역할이 있어서 제 것을 덧입히기만 하면 되잖아요. 하지만 가요계는 ‘너만의 색깔이 뭐야’라고 묻더라고요. 소속사는 대중적인 무대를 바랐지만 전 제일 잘하는 걸 하겠다고 해서 싸웠죠. 그때 깨달았어요. 나는 어떤 상황이 있는 상태에서 노래하는 걸 좋아하고 편안해 하는 사람이라는 걸.”
가수로서 차지연이 이름을 알린 무대는 반대로 ‘배우 차지연’의 길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올해 <아이다>를 하는 동안 그는 계속 이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소속사를 떠나 홀로 활동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배우의 길을 가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해를 거듭하면서 저만의 단단한 뿌리가 생긴 것 같아요. 이제는 대중적인 인지도보다는 좋은 작품, ‘뮤지컬 배우’보다는 ‘배우’라는 두 글자에 집중하고 싶은 생각이 커요.”
<아이다>를 마친 차지연은 자체 휴가를 계획해 한 달간 뉴욕의 브로드웨이에 머물며 12편의 연극과 뮤지컬을 섭렵했다. 데뷔 이후 한번도 한 달 이상 쉬어본 적이 없었던 그에게는 유익한 재충전의 시간이었다. “돈 모아서 외국에 나가 본 게 처음이에요. 원 없이 공연을 보면서 자극도 받고, 배우로서 어떻게 살지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죠.”
자유로워진 차지연이 가장 먼저 극복하고 싶은 과제는 ‘대극장 작품만 하는 뮤지컬 배우’라는 이미지다. 그동안은 소속사와의 관계 때문에 주로 대작에 출연하며 스스로도 그런 이미지를 만드는 데 일조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차지연이 정말 하고 싶었던 건 규모나 장르와 상관없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틀 안에 저를 가두고 싶지 않아요. 사실 전 중·소극장 작품이나 연극이나 음악극도 좋아하거든요. 다양한 무대에서 드라마에 강한 배우로 살아남고 싶어요. 물론 그렇게 하면, 먹고사는 게 좀 힘들어지겠지만.(웃음)”
‘배우’라는 타이틀에 욕심이 생기면서 그의 관심사는 노래보다 연기에 좀 더 무게가 실리게 됐다. “뮤지컬을 하는 거니까 물론 노래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연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심이 많아요. 무엇보다 저는 뮤지컬 ‘가수’가 아니라 뮤지컬 ‘배우’니까요.” 그래서 그가 뉴욕에 다녀와서 참여한 것이 공연예술 창작산실 지원사업 선정작인 <미드나잇 블루>였다. “발표 날이 토요일이라 공연이 있는 배우들은 시간이 다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할게요!’ 하고 참여했는데 창작뮤지컬의 매력에 푹 빠졌어요. 그동안 라이선스 작품을 하면서 눈치를 많이 봤는데 이번엔 젊은 출연진, 제작진끼리 왁자지껄하게 즐기니까 좋더라고요.”
이제는 계약이나 출연료 협상 등 민망한 과정도 직접 해야 하는 프리랜서 배우가 됐지만, 차지연은 지금의 상태에 크게 만족한다. 무엇보다 작품을 고를 때 어떤 제약이나 규제도 받지 않아서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는 점이 행복하다. <잃어버린 얼굴 1895> 역시 프리랜서였기에 할 수 있었던 작품이다. 차지연은 당분간은 이런 상태를 유지하면서 연기의 폭을 넓히는 데 주력할 계획이다. “배우로서 발전할 수만 있다면 연극이나 영화처럼 어떤 장르, 어떤 역이든 다 좋아요. 그런데 연락이 오지 않네요. 저 이제 소속사도 없어서 싼데.(웃음)”

 

`좋은 배우`에 대한 고민
차지연은 신인 때부터 시원시원한 외모와 안정된 노래 실력으로 무대를 장악해왔다. 하지만 차지연에게 무대는 아직도 두려움의 영역이다. 특히 창작뮤지컬에서 그 공포는 더 커진다. 그런데도 여러 선택지들 중에서 <잃어버린 얼굴 1895>를 택한 까닭은 무엇일까.
“대본을 봤을 때 아주 오래된 나무의 뿌리가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것 같은 힘을 느꼈어요. 읽자마자 못하겠다고 생각했죠.(웃음) 내공이 없으니까.” 그때 그를 설득한 것은 이지나 연출이었다. “제가 <서편제>를 선택했던 것처럼 또 한번 배우로서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어보자고 말씀하시는데, 제가 그만 훅 넘어갔죠.”
이지나는 배우의 장점을 끄집어내는 데 일가견이 있는 연출가다. 이번에도 그는 차지연이 작품에서 가장 빛날 수 있게 많은 도움을 줬다. 특히 ‘여자 뮤지컬 배우’라고 하면 떠오르는 일반적인 이미지 대신, 차지연은 자신만의 색깔을 지닌 배우로 성장했으면 좋겠다고 독려하기도 했다. 차지연은 그에 부응하듯 <잃어버린 얼굴 1895>에서 배우로서 한 단계 성장했다. 가장 큰 건 뮤지컬을 보는 시야의 확장이다. “예전에는 노래나 안무가 제때 안 나오면 ‘스태프들은 도대체 뭘 하는 걸까’ 했었는데, 이번에는 크리에이티브 팀과 함께 노래나 안무에도 참여하면서 뮤지컬의 결을 읽게 된 것 같아요.”
이 작품도 <서편제>처럼 한국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음악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서편제>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그 정서를 표현해야 하는 것이 ‘노래 잘하는 배우’ 차지연이 떠안은 과제였다. “여기서 내는 소리는 구음의 일종인데, 한스럽게 들리면서도 최대한 판소리처럼 들리지 않는 게 중요해요. 음계 자체도 국악 음계를 쓰지 않아요. 그래서 인도나 아랍계 소리까지 가져와 반음계를 나름대로 만들어보기도 했죠.”
<잃어버린 얼굴 1895>는 명성황후보다는 개인 민자영의 인생과 심리에 초점을 맞추면서 차별화를 노린 작품이다. 고종, 대원군, 전봉준, 김옥균 등 모든 인물들이 고르게 주목을 받기도 하지만, 극 전체를 이끌고 가는 것은 역시 민자영이다. 작품의 성패는 차지연이 ‘여자 민자영’의 회한과 슬픔을 얼마나 생생하게 전달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타까운 인물이에요. 어쩌다 보니 왕비가 돼 있고, 자식을 잃고, 가장 가까운 남편에게마저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 정치에 관심 없던 사람이 정치판에 들어갔을 때 그 사람의 ‘비포-애프터’ 사진을 비교하면 얼굴이 너무 다르잖아요. 무언가 그 사람의 모습이 일그러져버린 거죠. 민자영도 해맑은 소녀 시절이 있었을 텐데 후대에 전해지는 모습은 무시무시하죠. 이게 과연 그가 원한 것이었을까 생각하면 정말 안타까워요.”
자신이 원치 않는 길을 가면서 괴로워했던 민자영의 삶은, 비슷한 길을 갈 뻔하다가 간신히 제자리로 돌아온 차지연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될 성싶었다. 이번의 공백기도 자신의 ‘잃어버린 얼굴’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의 시간에 다름없었다. 그런 그가 이제 갖고 싶은 얼굴은 ‘좋은 사람’이다. “뮤지컬 배우로서의 삶은 지금도 어느 정도 만족하고 감사해요. 제게 더 큰 문제는 좋은 사람으로 끝까지 남는 거예요. 그건 굉장히 어려워요. ‘좋은 척’이 아니라 정말 ‘좋은 사람’으로 남는 거. 내 안에 남은, 순수함을 지키는 거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은 차지연이 전에도 했던 말이다. 왜 ‘좋은 배우’가 아니라 ‘좋은 사람’일까. “무대에서 진정성을 표현하려고 하는데, 개인 차지연의 삶에 때가 묻어서 관객에게 가닿지 않을까봐 두렵거든요. 그 순수함을 잃는다는 건 배우로서 생명이 끝났다는 걸 의미해요. 그다음부터는 그냥 노래만 들리는 거죠. 단지 고음이 어디까지 올라가고 의상이 어떻고, 이런 피상적인 부분만 보이게 될까봐, 그런 배우가 될까봐 겁이 나요.”
강박에 가까운 차지연의 ‘좋은 사람’론은 결국 세인의 ‘좋은 배우’론과 일맥상통하는 듯했다. 결국 그가 꿈꾸는 좋은 배우는 연기와 노래로 관객들을 따뜻하게 위로해줄 수 있는, 엄마 같은 느낌을 지닌 배우다. 늘 자신을 지지해주는 팬들에게 미안하다며,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꼭 써달라고 부탁하는 모습도 그런 신념에 충실한 태도였다. 하지만 평소 밝고 쾌활한 차지연의 모습이 이런 진지한 모습에 가려 있는 것은 아쉽기도 하다. 죽고 버림받는 캐릭터만 자꾸 맡는 것도 어쩐지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저 정말 밝고 신나는 코미디하고 싶어요. <시스터 액트>나 <스팸어랏> 같은 거요. 그런데 안 써주시네요.(웃음)”
하지만 다가올 작품들을 통해 차지연의 이미지도 조금은 바뀔지도 모르겠다. 차기작으로 정해진 <카르멘>에서는 처음으로 ‘춤추는 차지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단지 플라멩코 때문에 작품을 선택했다는 그는 “발톱이 빠져라 출 거예요”라며 강한 의욕을 드러낸다. 그가 개인적으로 욕심을 내는 작품 중엔 <원스>도 있다. “안 해봤던 스타일이기 때문이에요. ‘뮤지컬 배우스러운’ 것들을 다 빼야 하는 연기거든요. 발성도 고음 자랑보다는 섬세한 매력 발산이 중요한데, 이 큰 체구에도 가능하다면, 감히 도전해보고 싶어요.” 곧 다가올 오디션이 기다려진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이지나 연출이 말했듯 국내 어떤 여자 배우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개성과 존재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1호 2013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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