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 <송산야화>와 <김종욱 찾기>, <오! 당신이 잠든 사이(이하 오당신)>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등장했을 때, 주목받은 두 얼굴이 있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시절에 만든 작품으로 소극장 뮤지컬의 전기를 마련한 장유정 작가 겸 연출가와 김혜성 작곡가가 그들이다. 장유정이 중대형 뮤지컬은 물론 영화 연출을 경험하며 활약하고 있는 가운데, 젊은 관객들의 귀를 쏙쏙 잡아끄는 선율을 선사했던 재기 발랄한 작곡가 김혜성이 몇 년간 휴식기를 가진 후 다시 대학로에 돌아왔다. 롱런 중인 <김종욱 찾기>와 <오당신>, 작곡가뿐만 아니라 연출가로 도전한 <총각네 야채가게>와 신작 <심야식당>까지 현재 김혜성이 참여한 뮤지컬 네 편이 대학로에서 공연 중이다.
연말이 공연계 성수기이긴 하지만, 대학로에서 김혜성 작곡가의 작품 네 편이 동시에 올라가고 있다. <심야식당>과 <총각네 야채가게> 두 편은 12월에 개막했으니 무척 바빴겠다.
요즘은 창작뮤지컬 한 편 만드는 데 3년여의 시간을 들이지 않나. 나는 늘 바쁘게 작업하고 있었는데, 주위 사람들은 공연이 올라가야 내가 ‘일하고 있구나, 바쁘겠구나’ 생각한다. 사실 작곡가는 오랜 시간 공들여 작품을 만들고, 공연이 개막한 후에는 특별히 바쁘지 않다. 그런데 연출가는 다르더라. 매일 공연장에 들러서 확인해야 하고, 개막 전후에 무척 정신없었다.
연출 경험은 처음이다. 직접 해보니 옆에서 보던 것과는 많이 달랐을 것 같다.
정말 많은 걸 배우고 깨달았다. 연출가는 일하는 기술과 능력도 좋아야 하지만, 인간적인 포용력과 이해력이 필요한 사람이더라. 수많은 사람들이 협력해서 뮤지컬 한 편을 만드니, 적재적소에 인력을 배치하는 것도 중요하고. 배의 선장이 되어 선원들을 이끌어야 하는 일이 정말 어렵고 힘들더라. 가장 높은 곳에서 지휘하는 게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사람들을 보듬어야 하는 일이란 걸 알게 됐다. 버거웠지만 무척 좋은 경험이었다. 다른 공연에서 내가 어떤 일을 하든, 연출가를 많이 도와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웃음)
<총각네 야채가게>는 2010년 두 번째 시즌에서 기존 작품을 대폭 수정할 때, 작곡가로 교체 투입됐다. 게다가 이번 공연에서는 연출가로도 활약했다.
초연 때는 다른 작곡가가 음악을 맡았다. 두 번째 시즌의 작곡을 의뢰받았을 때, 내가 새로 들어가서 곡을 모두 바꾸는 게 상도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못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작품을 위해 함께해 보자며, 작가가 굉장히 절실하게 부탁했다. <총각네 야채가게>는 소재가 무척 좋았다. 그 작품이 보여주는 ‘젊음과 열정’, 이 두 가지만 가지고 새롭게 바꿔보기로 했다. 그런데 음악만 달라져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대본도 완전히 수정했고, 정영 작사가와 구소영 음악감독이 새롭게 투입돼, 전혀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했고 반응도 좋았다. 하지만 길게 공연하진 못했다. 모든 창작자들이 그렇겠지만, 나 역시 롱런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공연을 만든다. <김종욱 찾기>나 <오당신>처럼 잘된 자식들을 보면 기분이 좋지만, <소리도둑>이나 <송산야화>처럼 지금 공연하지 않는 자식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제 작품이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다면, 누군들 열 일을 제쳐두고 하려 하지 않겠나. 그래서 <총각네 야채가게> 재공연의 연출을 제의받았을 때, 이 작품의 이름을 한번 더 알려보자는 모험을 해보고 싶었다. 이 작품이 좀 더 알려져서 어떤 좋은 결과를 낳을지도 모르지 않나. 내가 평소에 아이디어가 통통 튀고 내 작품에 대한 애정이 깊다는 걸 아는 제작자가 연출을 맡아보라고 하셨다.
어떤 점 때문에 <총각네 야채가게>에 애정을 갖게 됐나.
영악한 구석이라곤 없이, 정말 순수한 작품이다. 무한 경쟁 사회에 살고 있는 요즘 젊은이들은 늘 방황하고 있지 않나. 그들은 불안정한 사회, 경제 불황을 겪으면서도 그다지 튼튼해지진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도서가 인기를 얻고 있고. 그동안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고 당신의 5년 후 또는 10년 후를 꿈꾸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이 실제 내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이번 공연에 연출가로 참여하면서, 어떤 변화를 꾀했나?
야채 가게에서 일하는 총각 다섯 명을 네 명으로 줄이고, 캐릭터를 좀 더 분명히 했다. 그들 각자가 어떤 사람인지 관객의 머릿속에 명확히 기억되도록. 이전에는 음악이 짧고 드라마가 길었던 반면, 이번에는 드라마를 간결하게 줄이고 음악과 춤을 더한 쇼 장면을 적절히 추가했다. 어둡고 처지는 공연이 아니라, 과일이나 야채처럼 아삭하고 상큼한 공연이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심야식당>은 <소리도둑> 이후 아주 오랜만에 선보이는 김혜성 작곡가의 신작이다. 원작 만화를 좋아하는 창작자들이 의기투합해 만들게 됐다고 들었다.
정영 작가와 내가 함께 만들기 시작했고, 원래 제작하기로 했던 제작사 대표가 김동연 연출을 소개해 셋이서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작사 사정으로 공연이 무산되면서, 우리 셋만 덩그러니 남게 됐다. 우리끼리 어떻게 해서라도 완성해보자는 마음으로 계속 준비하다가, 두산 아트랩의 지원을 받아 지난해 1월에 워크숍 공연을 올렸다. 다행히도 현재 프로듀서가 함께해보자고 제안해주셔서, 정말 기적적으로 공연을 올리게 됐다. 실제로, 구상하고 진행한 작품은 꽤 있는데, 결국 좋은 제작사와 투자사를 만나야 작품을 올릴 수 있기에, 빛을 못 본 작품들도 많다. 내 작품이 여러 편 공연돼서 쉽게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매 작품마다 무척이나 어려웠다. 작품 한 편 한 편 올리는 것이 기적 같다. <심야식당> 대본을 보자마자 오프닝 곡 ‘심야 식당’이 딱 떠올랐다. 처음 그 곡을 쓴 후, 이런 뮤지컬을 만들 거라며 지인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과연 이 작품을 올릴 수 있을까, 이러다 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3년간 하다 보니, ‘정말로 공연이 제작돼 첫 공연 때 이 곡을 들으면 눈물 날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진짜 첫 공연 때 눈물이 나진 않더라. (웃음)
이 작품에선 어떤 음악을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했나?
원작이 가진 정서가 어떤 장면, 어떤 노래에서든 묻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마음, 그 정서를 일관되게 전달하고 싶었다.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나 되돌아보며 술 한 잔을 기울이는 곳, 무뚝뚝하고 말은 없지만 가슴 따뜻한 마스터가 있는 소박한 심야 식당에서, 화려한 아리아를 들려주는 건 어울리지 않을 거다. 일본 신주쿠 뒷골목 분위기에 맞게 차분하면서도 애잔한 음악을 만들었다. 오프닝 곡은 굉장히 단순한 멜로디로 시작한다. 밥 짓는 냄새가 나고 도마 소리가 조용히 울리는 곳을 떠올리며, 소박하고 조용하면서도 깨끗하고 신비로운 느낌의 곡을 만들었다.
<심야식당>에서 누구 한 사람, 주인공이 아닌 이가 없다. 각자 캐릭터에 맞는 테마곡들도 눈에 띄었다.
전형적인 뮤지컬 스타일의 음악들은 아니다. 화려하고 멋진 아리아를 뽐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우선 <심야식당>에 어울리는 곡이어야 했다. 이야기하듯 부르는 노래, 말하려다 말고 그 말을 다시 마음에 담는 노래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3년간 이런 음악만 만드니 나도 답답하더라. (웃음) 코스즈의 인생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때문에 쓸쓸하고 슬프다. ‘홀로 걷는 긴자의 밤거리’ 어쩌고 하면서 그의 삶을 노래하는데, 보통의 뮤지컬 솔로 곡처럼 클라이맥스에서 고음을 내지를 수는 없었다. 코스즈의 노래는 클라이맥스에서 오히려 더 음이 낮아진다. 들었을 때 마음이 짠해지는 곡이다. 반면 마릴린의 노래는 쇼적인 요소가 있다. 마릴린 역을 누가 맡느냐에 따라서 음악이 달라지리라 생각했는데, 박혜나 배우를 염두에 두고 쓴 터라 원작보다 훨씬 귀엽고 발랄한 마릴린의 노래가 나왔다. 워크숍 공연과 비교했을 때 몇몇 캐릭터는 빼고 대신 엔카 가수 치도리 미유키를 추가했다. 제거한 몇몇 캐릭터들의 정서를 그녀가 대신할 수 있었고, 음악적인 면에서 엔카를 삽입할 수도 있었다. 죽은 고양이의 이미지를 지닌 그녀의 슬픔이 마스터와 짝을 이루는 느낌도 있다.
과거 작품들도 그렇고, 대중적이고 듣기 편한 곡들이 대부분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곡들은 내가 실력이 부족해 못 쓴다. (웃음) 나는 화성이나 구조 등을 생각해가며 이성적으로 곡을 쓴다기보다 본능이나 감성이 먼저 움직이는 편이다. 고쳐볼까도 생각했지만 작곡가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는데 스타일을 바꿀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내 단점을 보완하면서 장점을 부각시키는 게 나을 것 같다. 난 내게 어울리는 작품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 음악으로 표현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작품들까지 욕심내서 잘하고 싶지는 않다. 유쾌하고 따뜻한 작품,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가 좋다. ‘너 사는 거 힘들지, 나도 힘들어, 하지만 우리 함께 힘내서 잘 살아보자’고 다독거려주는 작품 말이다. 음악은 팝, 컨트리, 블루스, 전통음악 등 다양하게 좋아한다. 음악감독이나 연출가의 위치에서 작업한 적도 있는데, 그게 다 더 좋은 곡을 쓰기 위한 훈련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뮤지컬을 만들었던 지난 10년을 되돌아보면, 처음이랑 지금 작업하는 마음가짐이 다를 듯하다.
10년 전에는 뮤지컬 만드는 걸 정말 쉽게 생각했다. 그래서 초기의 성공들이 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김혜성, 장유정 콤비는 어떻게 그런 작품들을 만들었냐고 물어보면, 나도 모르겠더라. 우린 뮤지컬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뮤지컬이 뭔지도 잘 몰랐다. 흥행을 목적으로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재밌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사실, 지금도 뮤지컬이 뭔지 잘 모르겠다. 10년쯤 되면 ‘이건 이렇게 하면 되겠지’ 하고 답을 금방 찾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모르겠다. 하지만 뮤지컬이 나를 살게 하고 또 꿈꾸게 만든다. 여러 사람과 함께 뮤지컬을 만들다보면, 어려운 퍼즐을 맞춘 것 같은 희열을 느낀다. 도저히 일이 풀리지 않아 짜증이 나다가도, 어느 날 문득 연습실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단번에 해결된다. 갑자기 퍼즐 조각이 맞아떨어지고 각자 의견을 더했는데 작품이 좀 더 완벽해질 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소름이 돋는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이런 건 아무나 경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2호 2013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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