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usical

더뮤지컬

magazine 국내 유일의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이 취재한 뮤지컬계 이슈와 인물

뮤지컬&컬처 | 무용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피나 바우쉬의 <마주르카 포고> [No.76]

글 |이동섭(파리 통신원) 사진 |Laurent Philippe 2010-01-13 6,110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을 때는 나는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로부터 그것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것에 대해 설명을 하려 하면 나는 더 이상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대답하기의 어려움을 고백한 그것은 바로 시간이다. 내게는 예술이 그러하다.

‘예술이 무엇일까?’라고 가볍게 생각하면 잘 알겠는데, 그것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점차 불분명해진다. 나를 바보로 만든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일반론적인 질문에서 벗어나, 비록 틀리더라도 나만의 답이라도 찾고 싶은 마음에 ‘왜 나는 예술작품을 볼까?’로 슬그머니 질문의 방향을 바꾸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왜 시간과 돈을 들여 공연과 전시를 보러 다닐까? 단순히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혹은 고상한 취미활동? 문화적인 상식과 교양을 쌓기 위해서? 물론 이러한 이유도 없지는 않겠지만 뭔가 피상적인 느낌이 든다. 그럼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보자. ‘무엇이 나로 하여금 예술작품을 보게 만드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나는 예술의 주변을 맴돌고 싶어 할까?’ 분명, 그것만이 주는 ‘무엇’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무엇’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적어 보았다. 하지만 마음에 흡족히 들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나는 피나 바우쉬의 1998년작 <마주르카 포고(Masurca Fogo)>를 보러 갔다.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 나는 그럴 듯한 답을 찾게 되었다. 
 

 


예술작품의 존재 이유, 뮤즈와 리듬
나는 문학이나 회화보다 무용이 더욱 높은 수준의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나의 편견은 피나 바우쉬의 작품을 볼 때마다 더욱 확고해진다. 피나 바우쉬는 로마를 주제로 한 작품 <팔레르모 팔레르모(Palermo Palermo)>를 만들면서 ‘로마에 대해서는 50여 편의 작품도 만들 수 있다’며 로마가 가진 매력과 아름다움을 고백했다. 그에 빗대어 말하자면, 나는 피나 바우쉬의 작품 하나로 10편 정도의 글은 쓸 수 있을 듯하다. 그만큼 나는 그녀의 작품에서 다른 어떤 예술 작품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무엇’을 강렬하게 느낀다. 또한 대부분의 예술작품을 볼 때, 그와 관련된 혹은 그것이 불러일으킨 또 다른 작품들이 보고 싶어지는데, 피나 바우쉬의 작품은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해서 다른 작품에 대한 갈증을 느낄 수 없다. 한 편의 무용 작품일 뿐이지만 그것을 통해 나는 내 전체를 장악당하는 무엇을 느낀다. 과연 무엇일까? 이러한 피나 바우쉬 작품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뮤즈(Muse)이다. 발터 벤야민이 말했듯이 ‘예술은 뮤즈들의 복수적 이름에 다름 아니다.’ 즉, 모든 예술은 뮤즈들이 형상화되어 나타난 것이므로, 본래는 모두 하나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예술 장르는 서로가 서로를 밀쳐내기도 하고, 끌어당기기도 하고, 나머지 예술들을 관통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프랑스 현대 철학가 장-뤽 낭시(Jean-Luc Nancy)는 ‘회화 속에 무용이, 무용 속에 연극이, 연극 속에 영화가 있기도 하며, 동시에 각 예술 장르만의 특징적인 요소들이 존재하는데, 그것들은 주로 리듬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원래 음악에서 사용되는 용어인 리듬은 간단히 ‘각각의 예술 장르가 갖는 고유한 특징들이 서로 움직이거나 부딪히면서 만들어내는 어떤 에너지의 흐름이나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이 리듬이라 불리는 무엇을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예술작품을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피나 바우쉬의 무용, 아름다움의 향연

이런 측면에서 피나 바우쉬의 작품을 생각해본다. 아마도 작품을 보면서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녀의 독특한 예술적인 리듬을 느꼈기 때문에 의미나 상징을 찾는 이성의 작용은 완전히 마비되었던 것이다. 그녀가 불러들인 뮤즈, 그 아름다움에 감염되어 무엇인가에 홀린 듯 몽롱한 상태로 그 안을 떠돌 뿐이다. 포르투갈을 주제로 만든 <마주르카 포고>나 <볼몽드vollmond>에서도 그러했다. 이 작품에서도 그녀는 자기 작품의 특징, 그 지역의 민속적인 음악과 부드러움과 강렬함을 오가는 음악, 단순하지만 세련된 무대, 레뷔처럼 구성된 연극 장면들, 과격하고 유머러스한 놀이를 즐기는 무용수 등을 이용해, 언뜻 보면 전혀 달라 보이지만 결국엔 똑같은 그녀만의 아름다움과 리듬으로 무대 위를 가득 채웠다. 나는 비록 파리의 공연장 객석에 앉아 공연을 보고 있지만 내 의식은 그녀가 불러들인 ‘아름다움’ 속에 머물고 있었음을 작품이 끝나고 공연장을 나온 후에야 알게 되었다. 또다시 나는 완전히 압도당했던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나는 장르를 불문하고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만들었던 예술작품들의 공통부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내가 결론 내린 예술작품의 가치는 다음과 같다. 무언가 나를 생각하게 만들며, 때때로 아름다움(리듬)에 내가 완전히 사로잡히게 만든다. 즉, 나는 그 리듬과 아름다움을 다시 체험하고 싶어서 또 다른 예술작품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이렇듯 예술의 가장 핵심적인 알갱이, 그것은 바로 아름다움이다. 원래 아름다움이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언어로 완벽히 설명되어질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예술작품을 통해서 그것의 존재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예술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아름다움이 그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어야 한다. 사진기로 풍경을 찍는다고 해서 저절로 사진 작품이 되지 않으며, 음표를 나열한다고 해서 음악 작품이 되지 않는다. 무용도 마찬가지이다. 무용수들이 음악에 맞추어 팔다리를 흔든다고 해서 저절로 무용이 되지 않는다. 그 동작들을 통해 아름다움을 무대 위로 불러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무용 작품이 되는 것이다. 
 

 


피나 바우쉬 2009년 신작 초연
일시: 2010년 1월 6일~9일 

장소: 칠레 산티아고 시립 극장 Santiago de Chile, Teatro Municipal

 

<콘탁토프(Kontakthof)>, <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아(Iphigenia auf Tauris)>
일시: 2010년 1월 21일~31일

장소: 독일 부퍼탈 오페라 하우스 Wuppertal, Opernhaus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76호 2010년 1월 게재기사입니다.  

 

네이버TV

트위터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