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야든 경지에 오른 사람은 화려하기보다 담백하다. 그림으로는 수묵담채화다. 먹과 물을 머금은 소박한 풍경은 인간을 넘어 자연을 연상시키고, 채워지지 않은 여백에선 묵직한 내공이 느껴진다. 국악계에서는 안숙선이 그런 사람이다. 그를 수식하는 수많은 프로필이 ‘국악’, ‘판소리’라는 키워드에 줄줄이 붙어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병창 기능 보유자, 판소리 5바탕 완창,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등. 그러나 모든 것은 ‘명창’ 하나로 정리된다. 요즘은 이자람이나 박애리 등 젊은 소리꾼도 ‘신세대 명창’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지만, 아직까지 한국에서 ‘명창’은 단연 안숙선과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다.
그는 여류 명창 시대를 연 진채선을 시작으로 이화중선, 박녹주, 김소희로 채워진 계보를 이은 소리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물론 뛰어난 예술성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 시대에서 판소리를 한 차원 확장시킨 인물이라는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그가 보여준 모습은 그런 대표 명창의 충분조건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외국의 유명 오페라 가수와 합동 무대를 펼치는가 하면, 아날로그 몸과 소리를 전자화하는 디지털 퍼포먼스에도 참여했다.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는 우리말로 외국인 관중들을 압도하고, 얼마 전에는 재즈 가수, 뮤지컬 배우와 함께 아리랑 협연에 나섰다. 이만하면 ‘명창’이라는 호칭마저 비좁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그가 얼마 전 <서편제>의 송화로 돌아왔다. 지난달 국립창극단이 초연한 창극 <서편제>에서 작창과 노년의 송화를 맡아 무대에 선 것이다. 그는 영화에서도 송화의 목소리를 대신한 적이 있지만, 그 자신이 직접 나서 송화를 맡은 것은 처음이었다. 생기발랄했던 초반의 어린 송화가 초로의 모습이 돼 부르는 마지막 장면은 묘하게 안숙선의 소리 인생과 겹쳐졌다. 사계절의 변화를 소리꾼의 인생에 빗댄 은유는 인터뷰에서도 이어졌다. 형형한 눈빛으로 기자를 압도했던 그는 대화가 시작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수줍은 10대 소녀가 됐다. ‘선생님’에 대한 일화가 언급되면 목이 메고 눈가는 어느새 촉촉해졌다. 관심사가 나오면 20대처럼 금세 신이 났다. 소리 이야기가 나오자 중년의 안숙선이 되어 신중해졌다. 판소리의 미래를 묻자 비로소 완숙한 노년의 안숙선이 나타났다. 평소에도 소리를 하듯 말을 한다는 그는 ‘삶의 소리’라는 자신의 소리 철학을 길지 않은 인터뷰 시간 동안 몸소 보여주었다.
내 소리, 아직 겨울에 이르지 못했다
<서편제>와는 이래저래 인연이 깊으시죠? 영화 <서편제>에서도 득음의 경지에 이르는 송화의 모습을 담은 마지막 장면을 부르셨는데요.
<서편제>는 여러모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이죠. 저는 소리하는 사람이니까 대중에게 소리의 세계를 알리는 기회가 된 것 같아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소설과 영화, 뮤지컬 버전 등 우리 전통문화를 재창작해 성공한 대표적 예이기도 합니다. 이 밖에 또 재미있는 콘텐츠가 될 수 있는 전통문화가 있다면 뭘 소개하고 싶으세요.
판소리 12바탕을 예로 들어볼까요. ‘가짜 신선 타령’은 공포 스릴러 같은 성격이 있는데 잘 만들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가짜가 대신 들어와서 판을 치고 속이는 이야기에요. 사람들이 살면서 눈앞의 이익만 좇다보면 손해볼 수도 있잖아요. ‘장끼타령’도 그런 내용이에요. 수꿩이 나오는데 너무 조바심을 내다가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결국 망하게 되죠. 그렇게 동물들을 빌려서 인간을 우화적으로 풍자하는 것도 재밌죠. 12바탕은 우리 삶 속에서 찾아낸 것이에요. ‘욕심내면 안 된다’, ‘미물도 함부로 하면 안 된다’ 같은 보편적인 이야기에 꿈과 이상이 담겨 있죠. 요즘은 전통을 거꾸로 해석해서 흥부는 무능하고 놀부는 노력하는 사람으로 그리기도 하던데요. 바보같이 살아도 나중에는 훨씬 나은 경우도 많아요. 특히 지금처럼 각박한 현실에서는 이런 전통 이야기가 주는 따뜻한 교훈도 의미 있을 거라 봅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어린 송화, 장성한 송화, 늙은 송화가 다 등장합니다. 자연에 비유하자면 계절 같은 느낌도 드는데, 선생님의 소리 인생은 지금 어디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 소리 세계는 아직도 겨울로 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나이만 겨울에 가깝죠. 가을에 열매를 맺고 겨울은 내려놓을 때거든요. 서릿발 같은 소리가 나야 해요. 송화도 그런 소리가 나왔죠.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에요. 예전에 프랑스 공연에서 한 화가를 만났는데 그분이 하는 말씀도 그림 실력이 늘수록 색을 화려하게 안 써도 완성도 높은 작품이 나온다는 거예요. 저도 그런 경지를 향해 가긴 하겠죠. 다만 끝이 보이지 않아서 그저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게 이 길인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선생님들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어요. 소리를 좀 알 만하니까 이제 가게 생겼다고.
심봉사 눈뜨는 대목을 부르면서 송화는 비로소 득음을 하게 되는데요. 선생님도 그런 순간이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득음이라는 게 완성이 아니에요. 과정일 뿐이고 계속 진행해야 하는 거죠. 10대에는 천방지축으로 부르고, 20대에는 그냥 힘으로 밀어붙이죠. 30대에서야 소리에 눈을 뜨게 되는데 (그때를 회상하듯) 저도 이때 소리가 좋아졌어요. 40대 정도가 되면 소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시작하고, 50대는 오히려 빈 곳, 부족한 것이 많음을 알게 되요. 기운이 떨어지는 때거든요. 젊을 때처럼 밀어붙이는 게 안 된다고. 대신 슬픔을 더 풍성하고 깊게 그려내는 데 초점을 맞추게 돼요. 젊을 때 선생님들이 ‘억지소리’를 내지 말라고 하시던데 그 말씀이죠. 툭툭 던지듯 해야 되는데, 쉽지가 않죠.
<서편제>는 진정한 소리꾼, 예인의 길이란 게 송화의 인생처럼 외롭고 고통스러운 여정 끝에 나온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직접 경험하신 그 길은 정말 그렇게 힘든 여정이었는지요.
고통스럽기만 하면 어떻게 소리를 계속하겠어요. 그래서 ‘귀 명창’들의 존재가 힘이 됐죠. 소리를 좋아하는 관객들은 소리꾼이 발전해가는 걸 감안하면서 듣거든요. 지켜보는 거죠. 이분들은 비록 직접 소리를 하지는 않아도 소리꾼보다도 더 소리를 간절히 바라고 사랑하는 분들이에요. 어린 소리꾼이 좀 미흡해도 기대하고 지지해주는 거죠. 그리고 소리를 잘하면 외모가 박색이더라도 다 예뻐 보여요. 그렇게 사랑을 받으면 이 길을 계속 걷게 되는 거죠.
말씀하신 귀 명창이 요즘에는 많지 않아서 아쉬우실 것 같습니다.
맞아요.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있어야 소리하는 맛이 나는 거잖아요. 내가 아무리 잘해도 허공에 대고 질러봐야 의미도 없고. 이분들이 반응을 적극적으로 해주시면 무대 위에서 우리들도 힘이 더 나서 열심히 하게 되는데 말이죠.
안숙선을 키운 두 사람
아홉 살에 데뷔한 후 줄곧 한길로만 걸어오셨어요. 다른 길을 생각한 적은 없으신가요.
소리꾼 이전에 한 인간이기 때문에 마음을 다치면 그런 생각도 했죠. 하지만 결국 계속해온 건, 어느 순간 소리를 더 사랑하게 되고 소리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돼버린 거예요. 기쁘면 기뻐서, 슬프면 슬퍼서 한 소절 뽑죠. 또 살면서 무언가를 잃기도 하는데, 소리는 빼앗을 수도 없고 훔쳐가지도 못하거든요.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적인 세계죠.
그렇게 삶의 희로애락을 담아냈던 게 선생님 세대의 소리였다면, 지금은 아무래도 교육기관에서 배우는 소리잖아요. 제자들의 소리를 들으실 땐 그런 차이가 느껴지겠습니다.
그럴 수 있죠. 아무래도 자기가 겪어본 것들을 소리에 담아내 하는 거랑은 다르죠. 차이가 있을 거예요. 예전에도 춘향전 할 때 누가 표현을 잘 못하니까 선생님이 “너는 사랑도 안 해봤냐, 이별도 안 해봤냐” 그러면서 핀잔을 주셨는데요. 그러시다가도 “소리 잘 못해도 좋으니 이별은 하지 마라”고 하시더라구요(웃음). 인생의 질곡, 그걸 잘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겠고, 천성적으로 타고나야 하는 부분도 필요한 것 같아요.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다르죠. 요즘 청년들의 고민도 이것인데요. 선생님의 경우는 어떠셨습니까.
사실 시작할 때부터 30대까지도 확신은 못했어요. 어릴 때는 먹고 살기 어려워서 세끼 밥만 다 먹여주면 그게 최고였죠. 또 예술인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좀 그랬어요. 편견도 있었고. 그래서 시집가면 안 하려고 했죠. 지금처럼 사람들이 환호해주지도 않고 공연장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다 이 길에 집중하게 해준 분들이 선생님들이에요. 지방에서 소리 좀 잘한다 싶은 아이들 있으면 명창 선생님들이 서울로 불러올려서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가르쳐주셨어요. 혹시 제가 다른 길을 가려고 하면 붙잡아 주시기도 했죠. 그분들이 안 계셨으면 벌써 집어던져 버렸을지도 모르죠. 부모님만큼이나 고마운 분들이에요. 제가 아프기라도 하면 오히려 곰국을 끓여다 먹이시고 침도 맞게 해주셨죠. 그분들을 만난 건 가장 큰 행운이에요. (눈물을 닦으며) 그때는 사랑이라는 걸 몰랐는데 지금에서야 깨닫고 있는 중이죠.
여러 분의 스승이 있지만 대표적인 두 분이 명창 김소희, 박귀희 선생님이죠. 요즘도 그렇지만 그 시절에 여러 스승을 모셔 공부한다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피붙이처럼 생각해주신 거죠. 충분히 그러실 수 있어요. 당신이 평생 지켜오신 소리인데 아무한테나 줄 수 없고 남한테 빼앗기고 싶지도 않은 건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1979년에 국립창극단에 들어가고 나서 소리가 좀 좋아졌어요. 제가 열심히 하니까 그런 자격들이 조금씩 갖춰진 거죠. 그걸 들어보시고 마음에 드셨던가봐요. 그런데 선생님들도 연세가 많으시니까 돌아가시면 제가 배울 데가 없잖아요. 그래서 배우려고 노력을 하고 공부도 많이 했죠. 저는 그때 공부를 안 하면 죽는 줄 알았어요.
그분들에게 얻은 가장 큰 자산이라면 무엇인가요.
그분들은 소리가 인생의 전부였어요. 모든 것이 소리와 관련돼 있었어요. 소리가 생명 같은 분들이었고, 소리가 존재 자체였죠. 소리를 들으면 그 선생님의 인생이 다 보였어요. 그래서 노래가 아니라 소리라고 하죠. 인생의 소리. 그런 경지를 목표로 계속 노력하는 거죠.
우리 소리 참맛 지켜야
요즘 음악들은 들으시나요. 좋아하는 가수나 노래는 있는지요
경음악도 들어요. 촌로들의 흥얼거리는 노래도 들으면 애환이 있죠. 클래식이나 재즈, 다 좋아요. 음악은 다 좋아요.
오디션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으면서 노래에 대한 전 국민적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노래를 참 좋아하고 잘하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 소리에는 그렇게 관심이 없을까요.
그래서 화가 날 때도 있죠. 하지만 햄버거만 먹다가도 나이를 먹으면 김치찌개를 찾게 되듯이 소리도 그런 것 같아요. 워낙 공연이 길어서 쉽게 접근을 못하지만 언제고 한번 만나기만 하면 이 매력에 빠질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크게 걱정은 안 해요. 하지만 그렇게 될 때까지 전통 음악이 지속되도록 노력을 해야겠죠. 그래서 정부 차원에서나 많은 분들이 관심과 지원을 해주셔야 되는 거고요.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과 협연도 많이 하시잖아요. 국악인들과의 공연과 비교할 때 어떤 재미가 있으십니까.
지난해 오페라 송년 갈라 콘서트를 했는데요. 그분들이 다들 워낙 좋아해줘서 끝난 후에도 감동이 오래갔어요. ‘이 좋은 걸 왜 몰랐을까’라고 하는데 뭉클했죠. 사실 오페라나 재즈를 하시는 분들이 우리 걸 보러 오기가 쉽지 않잖아요. 오히려 그런 자리를 통해 여러 소리가 만날 수 있고, 새로운 예술도 나오는 거죠. 그래서 저는 그런 자리가 있으면 가급적 많이 나가려고 해요. 열린음악회 같은 자리도 마다않고 나가죠.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제 디지털 판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녹음, 촬영 기술이 향상돼도 육성의 힘, 실연의 힘을 따르지는 못하겠죠.
당연하죠. 전 에든버러 축제 같은 델 가면 마이크를 안 썼어요. 우리 소리가 가진 원래 매력을 마이크를 통해 전달하는 건 안 돼죠. 자연의 소리잖아요. 그래서 오페라처럼 판소리도 전용극장이 더 필요합니다. 호흡이나 숨 쉬는 것까지 느낄 수 있는 공연장이 필요해요.
이제 국악이 ‘월드뮤직’이라는 이름으로 서구 사회와 교류하고 선생님도 해외 공연을 자주 다니시면서 우리 소리를 알리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지요.
비유를 하자면 요새 김치가 세계화되면서 여러 가지 버전으로 변형되고 있잖아요. 하지만 김치라는 건 원래 지녀야 할 고유의 양식이 있거든요. 그런데 변형된 김치가 김치를 대표해서는 안 되잖아요. 진짜 김치의 참맛이 있는데. 소리에서도 원래 가진 참맛을 변형하거나 버려서는 안 된다는 거죠. 세계화를 할 때도 중요한 건 소리의 핵심적인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그다음 필요에 따라서 현대적인 형식으로 변형하는 거죠. 퓨전의 과정에서 우리 것 자체가 가려지면 안 돼요. 우리에 맞는 삶의 방식을 일단 지켜가면서 세계와 교류하려는 시도를 하는 게 맞아요. 그게 없으면 그냥 우리 걸 이용당하는 것밖에 안 된다고 봐요.
이번 <서편제> 작창을 들어보니까 정말 그 고장 특유의 말투를 느낄 수 있더라구요.
그렇죠. 지역마다 특유의 억양이 있잖아요. 그런데 요새는 한국말이 점점 변형되고 없어지는 말도 있거든요. 같은 말이라도 약간의 어휘나 억양에 따라서 분위기가 달라지는 게 언어인데 그걸 아는 사람이 점점 줄어든다는 건 중요한 문제예요. 또 그런 말이 사라진 판소리를 생각해보세요. 그런 판소리는 할 필요가 없는 거죠.
전통을 이어온 예인으로서 그 명맥이 머지않아 끊길 수도 있다는 불안감도 있을 것 같아요.
정말 불안해요. 그 작은 차이가 판소리에서는 정말 중요한 거라구요. ‘해당화’ 한 마디를 해도 ‘해~당화’와 ‘해당~화’가 다르잖아요. 다문화도 좋고 현대화도 좋지만, 우리의 것들을 잘 지켜 나가려는 노력도 함께해야 해요.
4월에는 국립극장에서 창극 교육(창극아카데미)도 하시던데요. 어린이들에게 판소리 같은 우리 전통문화의 교육은 평생 관객이자 차세대 예인을 양성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텐데요.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시고 창극을 알리실 생각이십니까.
제가 극장장께 직접 건의를 드린 거예요. 어릴 때부터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요. 이런 걸 마련해야 어린이들이 우리 소리를 접하게 되고, 애들 따라서 부모님도 함께 와서 들으니까요. 그럼 또 입소문이 퍼져서 우리 소리가 확산되는 거죠. 또 꿈나무도 발굴하고 양성해야 하거든요. 이런 게 물 흐르듯이 이뤄져야 되는 거죠. 이건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해야 될 일이기도 해요. 애들에게는 이게 첫 만남이고 재미있어야 하니까 명인들이 다 모여 소리와 춤, 놀이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흥미를 유도할 계획입니다.
우리 문화의 파수꾼으로 평생을 살아오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우리 문화의 소중함, 그 매력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소리, 전통문화의 저변이 넓어질 수 있을까요.
‘생활 속의 소리’가 가장 기본이 되어야겠죠.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나 싶어요. 그런 사명감이 저에게 있습니다. 그동안은 이 명맥이 사라질까봐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려고 여기저기 많이도 돌아다녔어요. 예전에는 문화센터에도 많이 나갔어요. 그렇게 이 시대에 맞는, 이 시대의 정서를 담은 방식을 찾아 끊임없이 노력해야죠.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5호 2013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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