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에서 내렸지만, 내일이 기대되는 작품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보니 앤 클라이드>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제목으로 번안된 영화로도 유명하다. 잘 만들어진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데다가, 소재가 지닌 흥미로움 때문에 막이 오르기 전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연말 분위기를 타고 장기 공연으로 갈 것이란 예상을 깨고, 2011년 12월의 마지막 날에 브로드웨이를 떠나게 되었다. 의외의 공연들이 눈물을 머금고 짐을 싸는 걸 볼 때마다, 브로드웨이란 정말 만만치 않은 곳임은 물론이고, 알다가도 모를 곳이란 생각이 든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담당 프로듀서가 광고비에 너무 적은 예산을 편성하고 연말 입소문을 기대했다고 하는데, 그 소문은 생각만큼 빨리 퍼지지 않았고, ‘올해 최고, 꼭 봐야 하는 뮤지컬’이라며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던 관객과는 반대로, 각종 매체와 평단의 반응은 비교적 싸늘했다. <지킬 앤 하이드>의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과 그의 친구들이 함께한 프로덕션은, 그간 개발했던 작품들의 연이은 부진에 이 작품 자체로 평가받지 못하고 어느 정도 편견 어린 시선을 감내해야만 했다.
할인 티켓을 울며 겨자 먹기로 많이 팔았다고 하는데, 필자조차도 1열 우측 끝 좌석을 단돈 36불에 살 수 있었다. 학생뿐 아니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파격 할인 티켓을 오픈했지만 관객석이 꽉 찬 것도 아니어서 수익이 나기 힘든 구조였다. 실제로 필자 주변의 많은 뉴요커들은 유별난 뮤지컬 팬도 아니면서, 신기하게도 이 작품은 다 봤다고 했다. 이런 현지인들의 호응에도 불구하고 적자가 났다는 것은, 아마도 수익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관광객들에게 어필하는 데 실패해서일 것이다.
비운의 작품이다. 몇 달은 승승장구할 수 있는 규모의 작품이었고 시기도 꽤 적절한 것 같은데, 뭐라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여러 이유들로 밀려난 작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독자들에게 굳이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이 작품은 왠지 라이선스 계약이 되어 해외에 수출될 것 같은 강한 느낌 때문이다.
보니 앤 클라이드, 그들의 이야기
오래된 전축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듯한 음악과 함께 조용히 시작되는 무대. 여느 연인들과 다름없이 행복한 한때를 보내며 활짝 웃고 있는 보니와 클라이드의 흑백사진들이 영상으로 비춰진다. 이윽고, 난데없이 귀청이 찢어질 듯한 수십 발의 총성과 섬광. 자욱한 탄약 연기와 고요만이 무대를 가득 채우자, 총알 세례로 벌집이 되어버린 자동차의 모습이 드러난다. 차 안에는 난사 당하여 피 흘리며 즉사한 젊은 연인이 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배경은 1930년대 미국 경제 대공황 시대, 모든 사람들이 너무나 가난하고 강도가 되는 것 외엔 별다른 선택의 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마을 주민의 상당수가 죄인이 되어버린 텍사스 서부 시골 마을이다. 19살의 웨이트리스 보니 파커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부모 밑에서 자라났고, 오로지 안정만을 위해 경찰과 사랑 없는 억지 결혼을 강요받는 어린 여인이다. 하지만 본래 열정적인 기질을 타고나, 가수, 배우, 시인이 되어 유명인이 되겠다는 꿈을 가진 당돌한 보니에게, 벗어날 수 없는 가난과 시골 생활은 답답하기만 하다. 클라이드 배로우는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일찌감치 삐뚤어졌고, 형 벅과 감옥을 들락거리다가 탈옥한 20살의 청년이다. 빌리 더 키드처럼 거침없이 살면서, 어떤 방법으로든 꼭 부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
고장 난 보니의 차 앞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어딘지 모르게 닮은 서로에게 운명적으로 끌리고, 걷잡을 수 없이 뜨거운 사랑에 빠진다. 반면, 보수적인 기독교인이었던 벅의 아내는 남편을 설득하여 다시 감옥으로 돌려보내고, 벅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여 새 사람이 되겠다 다짐한다. 형과는 반대로, 탈옥한 뒤 도망을 다니던 클라이드는 결국 다시 감옥으로 잡혀가고, 16년이라는 높은 형량을 받는다. 그는 감옥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성적 학대까지 당하다가, 급기야 첫 번째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보니가 면회 시 숨겨온 총으로 간수도 죽인 뒤 탈옥한다. 이렇게 그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다.
이후, 보니와 클라이드는 미국 전역을 다니며 가게와 은행 강도 행각을 벌인다. 그 와중에 보니는 비록 악명이지만 점점 유명세를 타는 것을 즐기며, ‘보니 앤 클라이드’라는 사인까지 남기며 다닌다. 둘은 불안한 나날들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격렬하고 진실된 사랑을 잃지 않는다. 클라이드는 물건을 강탈한 뒤 곧 달아나곤 했지만, 어느 날 식료품점에서 예기치 않게 위험한 상황이 닥치자, 우발적으로 총을 쏘아 사람을 죽인다. 보니는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클라이드를 떠나 새 삶을 찾으려 하지만, 이미 돌아가기엔 너무 먼 길을 와버린 것을 느끼며 그의 곁에 남기로 한다. 어느 날, 클라이드는 은행을 털다가 총격전을 벌이고, 팔에 총상을 입는다. 편지로 이 소식을 접한 벅은 동생을 도와야 한다며 길을 나선다. 벅의 충실한 아내는 벅이 더 이상 범죄와 연루되지 않길 바라면서, 남편이 가는 곳엔 자신도 가겠다며, 함께 보니와 클라이드를 찾아간다. 하지만, 곧 네 명이 모인 여관방은 경찰에게 급습당하고, 벅은 총격전을 벌이다가 죽음을 맞는다. 벅의 아내는 잡히고, 클라이드는 다리에 총상을 입은 보니를 데리고 간신히 도망친다. 루이지애나 주의 한적한 찻길에 차를 세우고, 보니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클라이드를 위로한다.
두 사람은 어느새 괴물이 되어버린 서로를 보듬으며 애써 다시 꿈을 노래하지만, 이 여행에 끝이 다가옴을 직감한다. 연인은 차 안에서 서로에게 기댄 채 다시 여행을 떠난다. 단지 두 사람을 사살하는 데에는 반인륜적이라 생각될 만큼 불필요하게 많이 쓰였던 수십 발의 총알을 온몸으로 받아낸 채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던 연인의 마지막 모습이 담긴, 처참하고 충격적인 실사 사진 영상이 후경으로 비춘다.
사회 통념을 넘어선 이 죽일 놈의 사랑
영화 <보니 앤 클라이드>라는 제목을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로 번역하신 분은 천재다! 활자 그대로, 그들에겐 내일이 없었고, 희망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을 끝까지 살아보는 것 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내일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현재의 감정에 충실했다. 그들에게 사회 통념은 쓸모없는 것이었고, 지독한 사랑에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부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20대 초반이란 나이. 얼마나 흥미로운 나이인가?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할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시기, 반사회적인 기질도 ‘젊음’이란 단어 하나로 충분히 용인될 수 있는 시기, 자신을 오롯이 불구덩이에 던져 넣으며 단 한번의 미친 사랑을 감행할 수 있는 시기, 모든 것이 주체할 수 없이 뜨거워서 자기 자신까지 다 태워버리고 말 것 같은 시기. 그런 때에 그들은 서로의 닮은꼴로 만난다. 하지만, ‘살인자’, ‘잉여인간’, ‘헛바람 들어서 강도랑 바람나 도망가고 덩달아 자기도 재미로 강도가 된 년’이란 꼬리표. 이것이 그들이 20대에 들어서자마자 아무 준비 없이 사회에 내던져져 얻을 수 있었던 타이틀이다.
마이너 중의 마이너인 그들의 인생에 특별한 이변이 있지 않는 한, ‘평범한 행복’이라는 반전은 일어날 수 없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여기서 죽으나 저기서 죽으나 마찬가지, 시골구석에서 한평생 썩기 싫으면 악명이라도 떨쳐봐야 한다. 결국 그들은 꿈에만 그리던 반전을, 서로의 존재를 에너지로 삼아 실행에 옮긴다. 거칠고 상처받고 외로운 영혼들은 서로의 존재에 덕지덕지 엉겨 붙고, 그 위험함에 중독된 둘은 결국 함께 질식해 죽길 택한다. 두 사람은 어쩌면 함께하기로 한 순간, 비극적인 결말을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이 지독한 개인적 외로움과 좌절감, 사회적 소외감은 그들의 사랑을 그토록 절절하게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그들이 아무 짝에 쓸모없다고 욕을 먹는 만큼이나, 그들은 자신의 존재가 의미 있기를 바라며 발버둥 쳤다. 그들은 서로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끔찍이 소중한 단 한 사람이 되어 주었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을 해 나갔다. 필요에 의해서든, 딱히 선택의 여지가 없었든, 비정하게 사람을 죽인 살인마 클라이드가 보니만은 목숨을 걸고 지켜냈다. 이 사람 아니면 안 되는, 징그럽도록 절실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가슴을 가졌던 사람이 악명 높은 살인자라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 극은 결국, 너무나도 아팠던 두 젊음의 지독한 사랑 얘기다. 지푸라기 같았던 그 사랑은, 하늘 아래 기댈 곳 하나 없는 외로운 영혼들의 상처투성이 사랑이었다. 때문에, 극이 끝나면, 실존했던 보니와 클라이드라는 인물들이 사람을 얼마나 많이, 또 잔인하게 죽였는지는 전혀 모르겠고, 그들의 강렬했던 만남과 그렇게 결말이 날 수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정황들이 생각나서 가슴이 서늘해진다. 작가, 연출가의 해석이, 실제로는 틀림없이 몇 백 배 잔인하고 건조했을 실존 인물들을 포장해주고 변호해줄 수 있다는 것을 당연히 알고는 있다. 하지만, “그래, 그들도 우리와 같이 사랑 받고픈 사람이었어.” 또는, “그 누구도 범죄자가 되고 싶어서 되는 사람은 없을 거야.”라는 생각과 안타까움이 마음에 오래 잔향처럼 남는다.
어쨌든, 이 이야기의 소재가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다. 와일드혼 사단이 늘 흥행작을 내는 것은 아니지만, <지킬 앤 하이드>, <보니 앤 클라이드>, <원더랜드>, <드라큘라> 등 이름만 들어도 뭔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찾아내는 데는 확실히 재주가 있는 것 같다.
대중의 감성을 울리는 와일드혼의 음악
강렬한 소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컨트리 록, 블루스, 브로드웨이 팝 등이 섞여있는 프랭크 와일드혼의 음악에 관해서는 뭐라 한마디로 평하기 참 애매하다. 별로였다고 쓰자니 한두 개의 참 좋은 멜로디가 생각나고, 그걸 무시하고 쓰면 너무 시니컬한 것 같고, 좋았다고 쓰자니 뭔가 날로 먹는 듯 음악에 대한 섭섭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와일드혼은 배우를 빛내줄 수 있는 멜로디를 쓰는 훌륭한 작곡가이지만, 동시에 진지한 업계 관계자들을 헷갈리게 하는 작곡가인 것도 같다.
‘뮤지컬 작곡가’로서 드라마와 음악을 한데 녹이는 데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단편적인 이야기와 장면에 대한 작곡가 개인의 느낌을 표현해내는 ‘팝 음악 작곡가’로서의 작품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분명 멜로디는 괜찮은데, 왜 대체 이 급박한 장면에서 ‘발라드’를 부르고 있는지 참 미스터리하다. 예를 들어, 보니와 엄마가 격렬하게 싸운 후의 멜로디는 그야말로 너무나 달콤해서 당황스럽다. 훌륭한 배우들이 그럴듯하게 조미료를 뿌려주지 않았더라면, 그 장면은 그 음악으로 절대 극적인 설득력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장면 하나만 놓고 보면 괜찮지만, 전체적으로는 극의 흐름을 저해하거나 속도감을 떨어뜨리는 장면들이 중간 중간 꽤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음악 자체만 놓고 보면 친숙한 코드 진행에 멜로디의 클라이맥스도 확실해서 흡인력이 있기 때문에 잘 부르면 배우가 빛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메인 테마가 상당히 대중적이면서도 심금을 울리고, 적재적소에 쓰인 점을 높이 사 별 다섯 개에 세 개 반을 주고 싶다. 특히 최고로 꼽을 수 있는 장면과 음악은, 도피 행각을 할 때, 허름한 여관방의 욕조 안에 둘이 마주보고 앉아서 살인자라고는 상상도 못할 만큼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보통 연인들처럼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신이다. 웃통을 벗고 비좁은 욕조에 들어가 기타를 치는 클라이드가, 마주 앉아 있는 보니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불러주는 ‘보니’라는 노래는, 여성 관객을 잊을 수 없는 황홀경으로 이끌어준다. 별다른 내용 진행도 없는데, 이 장면이 굳이 삽입된 것은, 이런 엄청난 감정적인 효과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여성 관객들이라면 당연히 가지는 판타지를 아주 아름답게 충족시켜 준다. 와일드혼의 음악이 훌륭하다고 하는 것은, 전반적인 감성의 전달이 잘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그의 이런 재능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극 음악을 쓸 때, 직관에만 의존하지 않고 조금 더 의도적인 요소를 많이 넣는다면, 훨씬 드라마와 견고하게 결합된, 완성도 높은 극음악이 나오지 않을까?
효과적인 연출, 에너지 충만한 배우들의 호연
시작은 두 사람이 행복했던 때의 영상을 배경으로 차가 난사 당하는 충격적인 장면인 반면, 끝은 두 사람의 사체를 찍은 잔인한 실사 영상을 배경으로 절망 속에도 다시 꿈을 노래하며 서로에게 기대는 배우들을 함께 보여준다. 이야기 흐름과 너무나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대구 구조를 이루는데, 충격적이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극적으로 매우 훌륭한 구성이었다. 보니는 실제로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해서, 지금도 많은 자료들이 남아있다고 한다. 배경으로 나오는 보니와 클라이드의 과거 실사 영상은, 무대 위에서 그들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들의 모습과 대비를 이루며, 뭐라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아주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무대 안에서 시종일관 폭발하고 있는 ‘클라이드’ 역 배우의 강렬한 에너지. 은행마저 파산하고, 사람들은 굶어 죽는 시절에, 비뚤어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외면적, 내면적 이유를 공감하며 그와 함께 아파할 수 있었다.
필자는 무대 바로 앞에서 관극했는데, 인터미션 시간에 보니, 무대 한 귀퉁이에 나무판자로 만든 세트가 부서져 파편들이 떨어져 있었다. 부실하게 만들어 저렇게 부서졌나 했더니 클라이드가 화내는 장면에서 갑자기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필자 눈앞에서 순식간에 세트를 맨주먹으로 쾅! 때려 산산조각 내는 것 아니겠는가! 클라이드 역 배우는 공연 할 때마다 세트를 주먹으로 부수고 있는 것이었다. 당찬 여인 보니의 기운도 만만치 않았다. 사랑을 나누는 노골적인 장면들에서는 무대 위에서 두 사람이 발산하는 케미스트리를 느끼니, 왠지 ‘한번쯤 인생 살면서 저런 미친 사랑해봐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밑도 끝도 없는 의문이 들었을 정도다.
듣기 좋지만 뜬금없는 팝 발라드를 극에서 들어내고 드라마에 어울리게 조금만 개선시켜 준다면, 평론가들은 주저 않고 이 극을 치켜세워줄 것 같다. 어쨌든, 모든 안타까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극이 참 많은 매력적인 힘을 가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관광객들을 극장으로 다 끌어 들이지 못했을지언정, 적어도 로컬 뉴요커들은 이 극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이제 어느 나라에서, 언제 라이선스 공연이 이루어질지 궁금하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1호 2012년 2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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