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영의 무대를 보고 있으면 청량감이 느껴진다.
그가 특유의 밝음을 무대 위에 톡톡 터트릴 때마다
시원한 에너지가 분출되기 때문이다.
그 특별한 에너지는 캐릭터에 생생함을 부여하는 큰 힘이 된다.
<여신님의 보고 계셔>의 순호와 <뮤직박스>의 민석의
다층성이 더 깊이 있게 느껴지는 것 또한 이런 이유에서다.
무대 밖에서 만난 정원영은 무대에서 그러하듯
한결같이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구김살 없이 해맑은 모습으로 신나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를 마주하고 있으니 새삼 밝음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주변을 얼마나 환하게 비출 수 있는지를 말이다.
<뮤직박스>를 보고 난 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정원영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뮤직박스>의 민석이랑은 정반대의 삶을 살았죠. 장난감이랑 전혀 친하지 않았고요. 무생물보다는 오히려 곤충이나 동물 같은 생물을 더 좋아했어요. 컴퓨터 게임 대신 운동을 훨씬 즐겼고요. 장난감만 갖고 놀기엔 제 자신이 무척 재밌었거든요. 아마 전교에서 친구가 가장 많았을 거예요. 언제 어디서나 분위기 메이커였으니깐.(웃음)
그 당시엔 장래 희망이 뭐였어요?
가수가 꿈이었어요. 음악에 대한 열정보다는 막연히 TV에 나오는 연예인이 되고 싶은 맘이 컸죠. 한창 HOT, 젝스키스가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거든요. 사람들이 나에게 주목하는 그 순간이 참 좋았던 거 같아요. 그래서 수학여행이나 학예회 때 빠짐없이 무대에 섰죠.
그때 어떤 공연을 했는지 궁금하네요.
살짝 기억나는 건 서태지와 아이들의 ‘환상 속의 그대’와 ‘난 알아요’에요. 노래랑 춤을 엄청 외웠죠. 초등학교 6학년 땐 HOT의 ‘캔디’로 공연을 했어요. HOT 멤버 중 춤을 가장 잘 추는 장우혁 역할을 맡아서 망치 춤을 췄죠. 중·고등학교 때도 주로 HOT 노래로 무대에 올랐어요. 그러고 보니 HOT를 정말 좋아했나 봐요.(웃음)
지금도 무대에서 동심이 많이 묻어나는 것 같아요. 실제 생활에서도 그런 편인가요?
동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동물원 가는 걸 즐기고, 만화 영화도 많이 봐요. 기계치기 때문에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가지고 노는 일엔 관심이 없어요. 운동을 하거나 친구들을 만나서 수다 떠는 걸 더 좋아하죠. 그래서 남들보다 조금 더 동심이 남아있는 것 같아요.
그런 순수함 때문인지 정원영의 무대를 보고 있으면 하얀색이 떠올라요.
순수함이라기보다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아요. <뮤직박스>의 민석이나 <여신님이 보고 계셔>의 순호 둘 다 처음 대본을 읽고 캐릭터를 만났을 때 하얀 아이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말을 할 때나 표정을 지을 때 늘 머릿속에 하얀색을 그리고 있었죠. 그런 면들이 무대에서 잘 보여진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배우 정원영은 무슨 색인가요?
파란색! 어렸을 때부터 파란색을 좋아했어요. 보고 있으면 시원하고, 기분이 정화되는 느낌이잖아요. 파란색이 굉장히 소년의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남성스러움이 묻어나는 색이라 좋아요.
<뮤직박스>의 민석과 <여신님이 보고 계셔>의 순호 모두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에요. 다층적인 인물인 만큼 표현하기도 까다로울 것 같아요.
너무너무 어렵죠. 오히려 순호 같은 경우는 작품 리딩 워크숍 때 제가 처음 연기한 인물이니 좀 수월했어요. 내가 연기하는 게 곧 순호라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순호란 아이는 꾸며서 연기하면 돼요. 중간 중간에 정상적으로 돌아와도 정당성이 생기는 인물이니깐. 그런데 민석이란 인물은 이해할 시간이 좀 필요했어요. 어떻게 하면 이 인물이 개연성을 가질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죠. 남들이 보기엔 내가 미친 거지만, 내 관점에선 남들이 더 미친 사람으로 보여야 하잖아요. 그래서 굉장한 집중력이 필요했어요. 인물에 깊이 빠져있어야 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신이 바뀔 때마다 감정을 제어하는 부분도 힘들었어요.
인물의 트라우마를 표현하기 위해 현실에서 끌어온 부분이 있었나요?
성재준 연출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제가 워낙 밝아서 슬픈 연기를 못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밝음 때문에 슬픔이 더 크게 느껴진다고요. 친구가 원래 없는 사람보다 친구가 많았는데 그들을 한순간에 잃은 사람이 더 큰 외로움을 느끼는 법이잖아요. 저 역시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저를 떠난다는 생각을 하니 한없이 외로워지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외로움에 대해 고민하다보니 민석이란 인물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어요.
<뮤직박스>에서 민석과 하나는 서로를 변화시키잖아요. 이 둘의 관계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마치 종교적인 부분 같아요. 민석에게 하나는 무조건적인 사랑이었어요. 그는 늘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나만의 사람이 필요했거든요. 그녀의 존재 자체가 민석이를 치유한 거예요. 한편 하나는 엘리라는 가짜 이름 안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대로 살아가야 하는 인물이잖아요. 그런 하나를 보면서 민석은 진짜 심장을 선물해주려고 했고요. 민석이 때문에 하나가 힘들어지긴 했지만, 그녀도 자신의 목소리를 정말 좋아해주는 민석이를 만나 치유를 받았죠.
차기작 <구텐버그>는 지금까지 출연한 작품들과는 좀 다른 지점에 있는 것 같아요.
책임감이 가장 큰 차이죠. 물론 늘 책임감을 갖고 무대에 오르지만, 대극장에서는 다른 배우들에게 의지하는 부분도 생기잖아요. 하지만 소극장에서는 관객들이 나의 표정과 손짓 하나하나를 다 보고 있기 때문에 더 신경 쓰고 책임져야 할 부분이 많아요. 게다가 2인극은 무대 전체보다 두 명의 배우에게 더 집중되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큰 책임감을 요하는 작품이에요.
작가 더그와 작곡가 버드가 뮤지컬 워크숍 공연을 펼치는 컨셉이 흥미로워요.
더그와 버드는 합이 잘 맞아서, 서로가 가장 원하는 작품을 만들어가요. 이들이 배우의 역할도 하기 때문에 더그를 통해서 더 많은 인물을 표현할 수 있어요. 그래서 한 공연을 하면서 많은 작품을 하는 기분이 들어서 좋아요. 저도 <여신님이 보고 계셔>나 <스트릿 라이프>의 워크숍 공연을 해봤잖아요. 이런 공연들은 무대에서 계속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이건 실질적인 워크숍이 아니라 워크숍을 토대로 만들어진 진짜 뮤지컬이잖아요. 자칫하면 무대가 성의 없어 보일 수도 있고, 그렇다고 완벽하게 꾸미면 워크숍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 정확한 선을 정하기 위해 연습실에서 다들 머리를 싸매고 있어요. 그런데 다들 아이디어가 좋아서 정말 재밌는 작품이 나올 것 같아요.
한 인터뷰에서 20대엔 성공하기보다 많은 쓰임을 받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어느덧 그 끝자락에 와있는데, 지난 20대를 돌아보면 어떤가요?
후회 없어요. 늘 만족하고요. 자만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가득 찬 만족이죠. 긍정적인 마인드 덕분에 힘들었던 순간도 행복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남들이 힘들다는 해병대에 가서도 행복했고, 오디션에 떨어졌을 때도 그다음 작품에 오르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했고요. 20대초부터 지금까지 하고 싶었던 일들은 다 해본 것 같아요. 작품 면에서도 후회 없이 행복한 20대였고요.(웃음)
그중 무대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어요?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순간이 젤 행복하죠. 특히 <즐거운 인생>이란 작품을 할 때 그랬어요. 트리플 캐스팅된 김무열, 라이언 형님들에 비해 인지도가 너무 없었거든요. 정원영이 누군지 모르고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더 열심히 했어요. 처음엔 객석에 빈자리가 많았는데, 점차 객석이 채워지고 저를 보기 위해 일부러 공연장을 찾아오는 관객들이 늘어나더라고요. 그렇게 인정받은 배우가 됐을 때 희열을 느꼈어요.
살아오면서 마음속에 담아둔 롤모델이 있나요?
제 아버지인 정승호 배우, 이모인 나문희 배우예요.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일터에서나 가정에서 모두에게 인정받는 모습이 정말 멋있어 보이거든요. 뮤지컬 배우 중에는 유준상 선배님이 참 멋있더라고요. 가정에서는 훌륭한 남편과 아버지, 일터에서는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끝까지 자기 관리를 하는 프로페셔널한 배우잖아요. 선후배들뿐만 아니라 관객과 시청자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고요. 저도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앞으로 꼭 맡고 싶은 역할은 무엇인가요?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어올 시간이 없네요.(웃음) 민석이의 개연성은 어떻게 이어갈까? 민석이와 순호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다르게 표현해야 할까? 또 더그는 어떤 인물일까? 미래의 다른 작품을 생각하기보단, 지금하고 있는 작품을 더 잘하고 싶어요. 다만 앞으로 정원영이란 인물을 좀 더 많이 알리고 싶어요. 연기의 폭이 넓어질 수 있다면, 가능한 한 많은 분야에 도전해보고 싶고요. 더 많은 사람들이 정원영이라는 배우의 연기를 볼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할 거예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9호 2013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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