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런던 웨스트엔드는 신작 기근이다. 연초부터 야심 차게 웨스트엔드의 문을 두드렸던 대작들이 얼마 못 가 줄줄이 꼬리를 내리는 바람에 새로운 작품은 명함을 내밀기 힘들게 되어버렸다. 작품이 어느 정도 완성도를 갖췄다고 해서, 평론가들의 평이 좋다고 하더라도 좀처럼 흥행 반열에 오르지 못해 조기 폐막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신작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처음부터 웨스트엔드에서 개막을 하기보다, 오프웨스트엔드 극장에서 어느 정도 공연을 한 후 웨스트엔드 극장으로 옮겨가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제는 오프웨스트엔드 극장도 <유린 타운>, <포비든 브로드웨이>, <어쌔신> 등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린 작품을 올린다. 영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나 주크박스 뮤지컬도 대세라 할 만큼 많다. 어떤 것이든지 ‘믿을 구석’이 있지 않은 작품을 올리기가 힘든 상황인 듯하다. 최근에도 비틀스의 음악을 소재로 한 <렛 잇 비>가 재공연을 시작했고, ‘킹크스(The Kinks)’의 음악을 다룬 신작 뮤지컬 <써니 애프터눈>은 오프웨스트엔드 극장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마치고 웨스트엔드로 옮겨 갔다.
그런데 대부분의 주크박스 뮤지컬이 한 가수나 밴드의 음악을 주로 다루는 반면, 조금 다른 형태의 주크박스 뮤지컬이 등장했다. 영국 전역을 돌며 투어 공연을 이어가다가 큼직한 공연장들이 모여 있는 런던 웨스트엔드의 중심, 레스터 스퀘어 근처의 소극장에서 짧게 공연된 뮤지컬 <내가 알던 그 소녀 (Some Girl I Used to Know)>는 한때 가요계에 유행했던 컴필레이션 음반처럼 유명한 팝 음악을 모아서 만든 작품이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할지 몰라도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살았던 영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노래들을 작품에 녹여서 활용했다.
이 작품은 여배우 한 명이 두 시간 동안 무대 위를 떠나지 않고 작품 전체를 이끌어 나가는 모노극이다. 마찬가지로 모노드라마인 <텔 미 온 어 선데이>와 뮤지컬 <시카고>의 록시 역할로 유명한 영국의 여배우 데니스 반 아우텐은 이 작품에서 스테파니 캔워스 역할을 맡아 약 두 시간 동안 공연을 능숙하게 이끌었다. 게다가 데니스 반 아우텐이 테리 로널드 와 공동으로 창작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녀의 실제 연애 이야기를 작품에 어느 정도 반영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배우가 자신과 비슷한 캐릭터의 입을 빌려 자신의 삶과 비슷한 면이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에 작품이 더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만약 데니스 반 아우텐이 주인공을 맡지 않았다면, 그녀가 직접 창작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공연 자체가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될 만큼 <내가 알던 그 소녀>는 철저하게 데니스 반 아우텐에 맞춰진 작품이다.
이 작품은 스테파니 캔워스라는 여성의 삶을 따라가면서 1980년대를 추억하고, 그 시절을 살았던 현재 30~40대 여성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내가 알던 그 소녀>는 나와 같은 시대를 살면서 비슷한 경험을 한 ‘친구’가, 나보다 앞서 살아가면서 다양한 인생 경험을 쌓은 ‘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보따리 같은 작품이다.
하룻밤 사이 되짚어보는 기억
패션계의 아이콘으로 남부러울 것 없이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스테파니 캔워스. 자상하게 챙겨주는 착한 남편이 있고, 미디어와 대중도 그녀에게 호의적이지만 부족한 것 없이 완벽해서 오히려 현재의 삶이 무료하게 느껴진다.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고급 호텔 스위트룸으로 돌아온 스테파니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관객들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그러다 갑자기 옛 남자 친구 션의 페이스북 메시지를 받은 뒤 스테파니는 문득 추억에 잠긴다. 어린 시절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션이 지금 런던에 있다며 자신의 안부를 물어오자 그동안 잊고 지냈던 옛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드는 것이다. 성공한 지금에 비해 어리고 보잘것없었지만 스스로 당당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스테파니는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션과 함께했던 때를 추억한다. 심지어 자신이 있는 호텔로 찾아오겠다는 션의 메시지에 스테파니는 신이 난다. 하지만 모든 게 반짝반짝 빛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고 나자 자연스럽게 그 후의 암울했던 기억들이 뒤따라 생각나게 된다.
션과 함께 행복했던 때도 있었지만, 션의 무관심에 홀로 지내야 했던 비참한 시간도 있었고, 가슴 아팠던 이별도 겪었다. 션에게 의존하느라 자신의 삶까지 망가질 뻔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자 결국 옛 기억에 설레던 스테파니의 마음은 다시 차갑게 식고 만다. 결국 스테파니는 션에게 찾아오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그렇게 옛 연애의 기억을 쭉 되새김질한 스테파니는 자신 안에 감춰져 있던 그동안 잊고 있던 옛날의 자신, 그때 그 어린 소녀를 다시 만나고,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결국 옛 남자 친구와 현재의 남편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녀는 두 사람 다 선택하지 않은 채 짐을 챙겨 호텔을 떠나게 된다.
한밤에 즐겨 듣던 라디오에서는 청취자의 사연을 소개한 뒤, 그 사연에 어울리는 잔잔한 노래가 뒤따라 나오곤 했다. <내가 알던 소녀>는 꼭 그런 라디오 방송 같다. 이미 산전수전 다 겪어서 모든 걸 알고 있을 것만 같은 언니가 자신의 연애담을 조잘조잘 들려주고, 중간중간 그에 어울리는 팝송을 선정해서 불러주는 카바레 형식의 토크 콘서트 같은 공연. 한 가수나 밴드의 음악으로만 구성된 <렛 잇 비>나 <저지 보이스> 같은 작품은 그 가수를 모르면 작품 자체에 접근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내가 알던 소녀>처럼 한 시대의 음악을 다양하게 담고 있는 주크박스 뮤지컬의 경우, 마치 ‘콘서트 7080’을 보는 것처럼 누구나 편하게 즐길 수 있다.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동질감이 있어서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에 그 시절 음악을 곁들여서 더욱 생생히 옛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음악은 뮤지컬 넘버처럼 이야기를 전달하는 도구일 뿐 아니라 각자의 기억을 되살려 주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음악에는 추억을 담는 힘이 있다. 어떤 노래를 듣든,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그 노래와 관련된 추억을 하나둘씩 떠올리게 된다. 신기하게도 어떤 노래를 들으면, 바로 그 노래를 들으며 걷던 길, 그 노래를 들을 때 만난 사람, 그 노래를 듣던 그 순간의 모습이 마치 오래된 영사기 필름처럼 머릿속에 좌르르 펼쳐진다. 그래서 <내가 알던 그 소녀>처럼 이미 존재하는 노래를 뮤지컬 넘버로 사용하는 주크박스 뮤지컬의 경우,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주인공의 사연에 공감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의 추억담을 떠올리게 된다. 예전에 그 노래를 들을 때 자신이 어땠는지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르기 때문에 공연을 더 입체적으로 관람할 수 있다.
<내가 알던 그 소녀>에는 1980년대와 1990년대의 감성이 담겨 있다. 공연을 보는 한편, 그 시절 그 음악을 들으며 싱그럽게 웃었던 자신의 청춘을 되새겨볼 수 있는 것이다. 그 덕분인지 극장에는 이 작품의 주인공 스테파니 캔워스, 혹은 그를 연기하는 데니스 반 아우텐과 비슷한 연령대로 보이는 여성 관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이 작품은 그렇게 같은 시대를 살아온 30~40대 여성들을 대변하고, 그들이 하지 못한 이야기를 스테파니의 입을 빌려 들려준다. <내가 알던 그 소녀>는 그들도 한때 세상 무서울 것 없이 당당했음을, 그때 그 소녀가 아직 그들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재조명해준다. 그래서 비록 스토리는 평범하고 흔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스테파니의 사연에 관객들이 깊이 공감하고 함께 울고 웃으며 추억할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를 하다가 중간중간 노래를 부르는 형식 때문에 어쩌면 한 여배우의 토크 콘서트처럼 다가올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영국판 ‘콘서트 7080’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관객들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는 동시에, 옛 시절의 향수가 느껴지는 노래를 라이브로 듣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
8090의 음악 여행
타이틀곡 격인 ‘Some Girl I Used To Know’는 스티브 앤더슨이 이 작품을 위해 작곡한 노래로, 작품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부드럽고 애절한 발라드 곡이라서 공연이 끝나고도 한동안 귓가에 맴돌았다. 그 외의 다른 뮤지컬 넘버들은 대부분 1980년대와 1990년대 영국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팝 음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시절 특유의 비트를 빼고, 데니스 반 아우텐의 목소리에 맞게 발라드로 편곡해서 감성이 돋보이는 노래들로 스테파니의 기분을 표현했다.
컬처 클럽의 ‘Do You Really Want to Hurt Me’를 비롯해, 소니아의 ‘You’ll Never Stop Me from Loving You’, 톰슨 트윈스의 ‘Hold Me Now’, 빌리 레이 마틴의 ‘Your Loving Arms’, 소프트 셀의 ‘Say Hello, Wave Goodbye’, 킴 와일드의 ‘You Came’, 디나 캐롤의 ‘Ain’t No Man’ 등 이 작품에 삽입된 음악은 설령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 시절 영국을 대표하는 노래들이다. 이 노래들이 스테파니의 사연 사이사이에 삽입되어 그 순간 스테파니의 생각과 기분을 표현했다.
하지만 걸쭉한 런던 사투리로 자기 자랑을 섞어가며 잘나가던 시절을 회상하던 센 언니가 중간중간에 처량하고 애절한 발라드를 부르는 것은 사뭇 아이러니하다. 대사를 할 때는 자신 있고 당당하게 말했지만, 다시 노래할 땐 연약하고 가련한 모습을 드러냈다. 작품에 쓰인 곡 대부분이 대체로 느린 템포의 발라드라서, 노래가 극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차분하게 잡아주었지만, 공연 전체가 단조로워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안 그래도 무대 전환이 없이 호텔 방이라는 하나의 공간에서만 공연이 진행되고, 다른 등장인물 없이 스테파니 역의 여배우 홀로 극 전체를 꾸려가는 형식의 모노 뮤지컬이기 때문에 눈을 즐겁게 하는 볼거리가 부족했는데, 노래까지 거의 다 차분하고 애절한 발라드풍으로 편곡되어 있어서 아무래도 심심했다. 다양한 가수의 노래를 여러 곡 이용한 게 무색할 정도로 일관되게 편곡된 노래들도 아쉬웠다. 원곡을 모르는 입장에서 이 작품에 나온 버전의 노래만 접하면, 이미 있는 노래라는 것을 알기 힘들지도 모르겠다고 느껴질 정도로 편곡한 버전을 작품에 사용했다.
한편 스테파니 캔워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자체는, 어린 시절 남자를 만나서 그 남자와 함께 행복해하다가 결국 이별을 겪는, 클리셰로 느껴질 만큼 흔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오히려 관객들이 공감하기 쉬웠다. 명확해서 따라가기 쉬운 스토리 라인과 라이브로 들려주는 옛 시절의 멋진 음악이 있는 뮤지컬 작품. 소소하지만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무대 위에 혼자 선 데니스 반 아우텐은 마치 자신의 얘기를 직접 들려주는 큰언니 같았다. 그녀는 공연이 진행되는 두 시간 내내 관객들을 상대로 혼자 묻고 혼자 답하면서 울고 웃었다. 이야기를 하다가 노래를 하고, 또 이야기로 넘어가는 모습이, 마치 실제 자신의 얘기를 하는 듯 자연스러웠다. 유들유들하게 이야기를 풀어 나가다가 애절하게 노래를 부르는 시간이 반복됐다. 작품 후반으로 갈수록 우울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당당하고 성공적인 현대 여성의 내면에 감춰져 있던 옛날의 그 소녀가 슬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강해 보이기만 하던 언니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대비를 통해 더 큰 효과를 보였다.
뮤지컬 <내가 알던 그 소녀>는 현재 영국 전역에서 투어 공연을 하고 있다. 데니스 반 아우텐이 직접 창작에 참여해 자신의 고정 공연 목록으로 삼은 만큼, 이 작품은 데니스 반 아우텐이 마음을 바꿔 먹지 않는 한, 장소를 옮겨가며 전국에서 꽤 오랫동안 공연되면서 많은 관객들을 추억으로 설레게 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4호 2014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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