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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LONDON] <시티 오브 엔젤> CITY OF ANGELS [No.137]

글 |조연경(런던 통신원) 사진 |Johan Persson 2015-02-26 7,490

반전 있는 누아르 뮤지컬 



누아르 영화에 대한 오마주

한때 할리우드는 누아르 영화 일색이었다. 음습하고 어두운 분위기,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어디선가 비릿하게 느껴지는 피 냄새. 건장한 남자들이 자행하는 폭력과 범죄. 누아르가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하기는 쉽지 않지만, 보면 누구든 알 것 같은 그 느낌이 무대에서 표현된다면 어떨까. 


런던의 돈마 웨어하우스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시티 오브 엔젤>은 누아르 영화를 향한 오마주다. 1989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이 작품은 이듬해 토니상에서 각본상, 음악상, 남우주연상을 비롯해 최고 작품상까지 총 6개 부문에서 수상했고, 1993년에는 런던으로 건너가 이듬해 로렌스 올리비에상의 최고 작품상까지 거머쥐었다. 그 후 20여 년 만에 돌아온 이 작품은 21세기의 쟁쟁한 공연들을 제치고 지금 런던에서 가장 티켓을 구하기 어려운 뮤지컬이 됐다. 괜찮은 작품을 올리기로 소문난 돈마 웨어하우스의 작품이고, 객석 규모가 작기 때문에 티켓이 예매 시작 즉시 매진된 것은 당연했다. 그만큼 작품에 대한 기대를 한아름 안고 와서 비좁은 객석을 꽉 채운 관객들은 어두운 조명 아래 흐르는 재즈 선율과 1940년대 스타일로 치장한 배우들의 과장된 누아르 연기에 연신 박수를 보냈다. 특히 이번 프로덕션은 영화 <레 미제라블>의 에포닌 역으로 유명한 사만다 바크스를 비롯해, 브로드웨이의 <닥터 지바고>에서 지바고 역으로 낙점된 탐 무투 등 유명 배우들이 많이 참여해 더욱 주목받고 있다. 흠 잡을 데 하나 없는 탄탄한 캐스팅과 세련된 연출에 힘입어, 20여 년 전의 작품이 런던 한복판에서 다시 한 번 그 가치를 입증했다.


뮤지컬 <시티 오브 엔젤>은 미국 할리우드에서 누아르 영화가 한창 각광받던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유명 소설 작가인 스타인은 자신의 탐정 소설 『시티 오브 엔젤』을 누아르 영화로 각색하는 작업을 의뢰받는다. 어두운 무대에 재즈 선율이 흐르고, 하얀 조명을 받으며 영화 속 주인공 스톤 탐정이 등장하면 벌써 누아르 분위기가 물씬 난다. 이 작품은 누아르 영화의 분위기, 그 영화의 대본을 각색하는 과정, 그걸 영화로 촬영하는 것까지 한꺼번에 담아내면서 한때 인기를 누렸던 누아르 영화를 추억하고, 그 시절 할리우드의 모습을 단편적으로나마 보여준다. 그러면서 이 작품은 누아르 영화에 대한 추억을 되새기는 선에서 끝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간다. 그리고 그게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영화와 현실의 이중구조

이층 구조로 된 무대의 한구석에서 작가 스타인이 타자기를 치면 무대 위에 장면 넘버와 제목이 나타난다. 그리고 마치 관객이 스타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대본의 상황이 배우들에 의해 실시간으로 무대 위에 펼쳐진다. 대본을 기초로 만들어질 영화 장면이 어떤 모습일지 미리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대본의 시작은 우선 인물 소개. 흑인 소울을 가득 담은 앙상블들의 재즈 뮤지컬 넘버를 배경으로 검은 조명의 실루엣에서 주요 배역을 맡은 여배우 넷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고, 마지막으로 주인공 스톤이 한껏 멋을 내며 등장한다. 


사설탐정인 스톤은 부유한 노인과 결혼한 젊은 마나님의 의뢰로 그 집 막내딸 실종 사건을 맡게 된다. 하지만 처음에 느꼈던 불길한 예감대로, 미스터리를 풀어 나갈수록 사건은 점점 더 복잡하게 꼬이기만 한다. 실종됐다던 막내딸 말로리가 자신의 호텔 침대 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한 스톤은 음모에 휘말렸다는 것을 직감한다. 결국 그는 말로리에게 약점을 잡힌 데다, 누구의 소행인지 모르는 폭력의 희생양이 되기까지 한다. 게다가 한 여자와 안타깝게 이별했던 과거 이야기까지 더해지면서 사건은 점점 복잡해진다. 결국 살인 누명마저 쓰게 된 스톤은 전에 동료로 함께 일했던 형사에게 쫓기다가 감옥에 갇히는 등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 휩쓸리고 만다.


무대 1층에서 계단 형태의 구조물을 통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만든 무대 2층은 작가 스타인의 공간이다. 책과 종이를 천장에 닿을 때까지 마구잡이로 쌓아놓은 것처럼 보이는 세트를 배경으로 스타인의 작은 책상과 타자기가 놓여 있다. 스타인은 마치 창조주처럼 자신의 창조물들을 내려다보면서 창작에 몰두한다. 하지만 스타인의 작업은 전화벨 소리에 의해 종종 중단된다. 영화 제작자이자 감독인 버디는 스타인에게 진행 상황을 물으며 독촉하기도 하고, 본래 소설가인 스타인의 대본에 해설이 너무 많다며 영화는 보여주는 예술이니 독백을 줄이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상당한 금액의 계약금을 받고 시작한 꽤 괜찮은 일이었지만, 안하무인 버디의 간섭에 스타인은 점점 지쳐간다. 늘 자신의 곁을 지키던 아내마저 출장으로 떠나버리자, 스타인은 버디의 비서인 도나에게 의지한다. 그것 때문에 마음 상한 아내를 달래려 스타인은 일도 내팽개치고 비행기를 타지만,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오게 되고, 그가 없는 사이 버디가 영화의 결말을 멋대로 바꿔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스타인 역시 자신이 쓰고 있는 영화 속 주인공 스톤과 마찬가지로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주변 상황과 인물들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일이 반복된다. 


뮤지컬 <시티 오브 엔젤>은 영화 속 장면과 현실의 사건이 교차되며 진행되는 구조다. 특히 영화 속 장면을 전개할 때는 전형적인 누아르 영화의 느낌을 무대 위에 재현하기 위해 공을 들인 티가 났다. 어둡고 끈적끈적한 재즈 멜로디가 무대에 흘렀고, 당시 흑백 영화를 무대 위에 재현하는 것처럼 흑백 조명으로 무대를 비췄다. 반면 현실 장면들은 그에 대비될 수 있게 다양한 색의 조명을 사용해 표현했다. 주인공 스톤과 스타인 외의 배우들은 영화와 현실의 역할을 각각 일인이역으로 맡았다. 영화 속에서 스톤의 유일한 조력자인 그의 비서는 현실에서 스타인의 고충을 들어주고 은근히 감정을 나누는 버디의 비서로 등장했다. 그리고 현실 속 스타인의 아내는 영화에서 스톤이 잊지 못하는 옛 연인으로 모습을 보였다. 각각의 배우가 맡은 두 역할은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어서 스타인이 겪는 현실 상황과 그가 쓰는 영화 속 사건이 교차될 때마다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장면이 전환됐다. 그때마다 옷을 갈아입고 다른 눈빛으로 연기하는 배우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이 작품의 매력이었다. 배우들의 의상부터 눈빛과 손짓 하나하나까지 디테일이 살아 있어 실제 누아르 영화를 보고 있다고 착각할 만했다. 코러스를 전담하는 흑인 배우들은 누아르 영화에 어울리는 소울을 실어 재즈의 느낌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줬다. 



작가와 캐릭터의 한판 승부

처음 극이 시작될 때는 작가의 존재감이 미약했다. 무대 구석에서 타자기만 두드리고 있기 때문에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반면 중절모를 눌러 쓰고 멋지게 등장하는 스톤은 처음부터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했다. 그런데 스톤의 매력에 관객들이 빠져들려는 찰나, 작가 스타인이 끼어든다. 스타인이 머리를 긁적이고 얼굴을 찡그리며 방금 타자기로 쳤던 대사를 하나씩 지우면, 영상으로 보이던 대사가 지워지는 효과와 함께 스톤을 비롯한 배우들이 필름을 되감듯 거꾸로 움직여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고, 스타인이 새로 쓰는 대사로 다시 장면을 연기하게 된다. 그 순간 누아르 영화 속 배우들은 작가의 타자기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이 작품은 단순히 누아르 영화를 무대 위에 구현하는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작업 과정과 성장담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돌변한다. 스타인이 소설을 영화로 각색해가는 과정에서 관객들은 스타인이 써 나가는 이야기가 궁금해서 몰입하게 되고, 스타인의 손끝에 따라 움직이는 스톤의 활약상을 지켜보게 된다.


하지만 스타인의 각색 작업은 프로듀서 버디의 개입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영화를 제 입맛대로 만들려는 버디에 맞서 자신의 소설을 지키려던 스타인은 결국 버디의 성화에 못 이겨 이야기를 바꿔버리고 만다. 살인 누명을 쓴 스톤에게 전 동료였던 형사가 찾아와 자신이 스톤을 증오하는 이유를 나열하는 장면에서 버디의 주장대로 그 형사가 사실은 스톤의 연인을 좋아했다는 설정을 집어넣어 버린 것이다. 스타인이 고친 문제의 대사를 그 형사가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스톤은 타자기 앞에 앉은 스타인을 똑바로 보며 말한다. 나라면 그러지 않았다는 짧지만 강한 한마디에 스타인은 그동안 쌓여온 열등감을 단번에 폭발시킨다. 너는 내가 창조한 캐릭터일 뿐, 너의 뇌 속에는 내가 집어넣은 생각들만 있다고 공격하는 스타인과 인기 많은 자기가 질투 나서 그러느냐며, 너의 명성은 다 내가 만들어준 거라고 맞받아치는 스톤의 한판 싸움을 그린 넘버 ‘You’re Nothing Without Me’ 는 누아르 영화에 젖어있던 관객의 집중력을 확 사로잡는다. 이때부터 이 작품은 누아르 영화에 대한 단순한 추억팔이를 넘어선다. 영화 밖에서 조물주 역할을 하던 작가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이야기의 경계를 넘어 서로를 똑바로 보면, 이 작품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판타지의 영역에 들어서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현실에 단단히 발을 붙이게 된다.


스타인과 스톤이 서로를 향해 자신이 더 잘났다고 주장하며 기 싸움을 할 때 하얀 선 모양의 조명이 둘 사이에 나타난다. 두 사람이 자리를 옮기면 선도 함께 이동해서 좌우나 상하로 둘의 영역을 구분해준다. 위쪽에 있는 사람이 발을 구르면 선이 내려가고, 아래에 있는 사람이 뛰어오르면 선이 올라가는 등 서로 영역 다툼을 하는 모습으로 둘의 줄다리기가 시각적으로 연출된다. 결국 스타인은 스톤이 형사한테 맞는 장면을 써서 스톤을 무력하게 만든 뒤 승리의 기쁨을 맛본다. 


하지만 그렇게 승리했다고 해서 스타인의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작가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도 현실과 타협하려고 했지만 자신이 없는 사이 버디가 영화의 결말을 완전히 바꿔버리고, 공동 작가로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한 스타인은 영화 첫 촬영 날 버디를 만나기 위해 촬영장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자신의 히어로, 스톤 탐정 역할을 형편없는 배우가 맡았다는 사실을 알고 결국 영화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한다. 세트장에서 행패 부리는 스타인을 잡으러 경찰이 출동하는 등 상황이 심각해지자, 이번에는 스톤이 타자기 앞에 앉아 스타인을 돕는다. 지금까지 스타인의 타자기에 맞춰 영화 속 이야기가 진행됐던 것처럼, 이번에는 스톤이 타자기 앞에 앉아 현실을 지배하고 좌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다소 판타지 같은 해결 방법이긴 하지만 스톤과 스타인이 손을 잡고 그동안 자신들을 압박하던 모든 사람들을 물리쳐 버리는 반전은 통쾌했다. 그 덕분에 스타인은 작가로서 자존심을 회복했고, 스톤은 그런 작가가 창조한 캐릭터로서 긍지를 느낄 수 있게 됐다. 스타인이 쓰던 영화 속 반전 결말에, 현실의 반전까지 더해져 <시티 오브 엔젤>은 막판에 통쾌한 한 방을 선보였다.



소극장을 꽉 채우는 존재감

작은 무대에 모인 배우들은 하나같이 훌륭한 연기를 펼쳤다. 서로를 비추는 거울 같은 스타인과 스톤 역의 두 배우는 1막과 2막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한 듀엣에서 서로에 눌리지 않는 존재감을 과시했다. 각자의 이야기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던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발톱을 세우고 달려드는 모습은 다른 데서 쌓인 스트레스를 그렇게라도 풀어보려는 발버둥처럼 보이기도 했다. 버디 역의 배우는 비주얼부터 목소리까지 괴팍한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일등공신은 여배우들이었다. 현실과 영화의 두 배역을 오가며 강한 카리스마를 뽐내는 여배우들은 마치 팜므파탈처럼 무대를 단번에 장악했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여배우들이 재즈 선율에 맞춰 나른하게, 때로는 폭발적으로 부르는 넘버들은 <시티 오브 엔젤>을 여배우의 역할이 중요한 작품으로 만들어주었다. 영화 속 인물과 현실 속 인물이 듀엣을 하는가 하면(‘What You Don’t Know About Women’), 한 배우가 영화 속 배역과 현실 속 배역을 오가며 하나의 넘버를 나눠 부르기도 했다(‘You Can Always Count On Me’). 주요 배역을 맡은 여배우는 네 명에 불과했지만, 이들이 개성 강한 배역 여덟 개를 선보인 덕분에 뮤지컬 <시티 오브 엔젤>은 매력적인 캐릭터가 풍부하고 다양한 넘버를 들을 수 있는 풍성한 극이 되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앙상블과 코러스를 담당한 ‘엔젤’들, 그 외 배역을 맡은 배우들까지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배우들이 한데 모여 발산하는 에너지는 상상 이상으로 거대해서 소극장 무대가 가득 메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브라스 밴드의 연주에 맞춰 흐르는 재즈 음악도 이 뮤지컬을 돋보이게 했다. 관객들의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누아르와 그에 잘 어울리는 재즈, 거기에 예상치 못한 반전까지 뮤지컬 <시티 오브 엔젤>은 어렵게 모인 관객들을 만족시키는 법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공연 개막 전에 티켓이 매진됐다고 해도 평단의 호응이 좋지 않거나, 관객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으면 일찌감치 입소문이 퍼지는 곳이 웨스트엔드다. 뮤지컬 <시티 오브 엔젤>이 매일같이 만석을 기록하는 것은 관객들이 재미있었다고 입소문을 낼 만큼, 그래서 자신 있게 공연을 지인에게 추천할 만큼, 훌륭한 수준의 공연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돈마 웨어하우스는 그동안 연극 위주의 작품을 만들었지만, 이번 프로덕션의 성공을 계기로 향후 뮤지컬 제작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하는 바람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6호 2015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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