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을 향한 집중 그 웃음의 가능성
가벼워지고 말 테다!
‘가볍다’라는 말은, 등산복을 제외하면, 대개 부정적인 수식어로 사용되어 왔다. 사람과 연관된 개념에는 더욱 그렇다. 입이 가벼운 사람은 가까이하기 어렵고, 행동이 가벼운 사람은 함께 어울리기가 힘들며, 생각이 가벼운 사람은 깊게 얘기할 상대가 아니다. 사람으로서 가벼워야 할 것은 오로지 몸무게일 뿐, 가벼움이 미덕이 되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하지만 가벼워야만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있다. 원숭이 거시기 놀이 한번 해볼까. 가벼우면 뜨고, 뜨면 날고, 날면 내려다보고, 내려다보면 웃고, 웃으면 복이 와요. 가벼움은 땅을 딛고 선 발이 비로소 하늘을 향해 도약할 수 있는 힘이다. 이러한 도약을 통해 얻어진 온전한 가벼움은 현실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시선의 자신감으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다. 무게를 자처하는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은 상태가 가벼움이라면 이런 가벼움이야말로 상상력의 가장 원래적인 모습 아닐까. 웃음도 풍자도 비판도 다 이런 가벼움이 선사한 열매였으니.
<난쟁이들>은 이 가운데 웃음의 열매를 옹골차게 맺음으로써 가벼움의 가치를 유쾌하게 증명한 작품이다. 동화의 이야기 구조와 등장인물을 재료로 사용했기 때문에 이 작품의 의도를 ‘기존 동화를 뒤집은 세태 풍자’나 ‘현실을 비튼 19금 어른 동화’ 등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은데, 이 작품의 관심이 동화를 재해석하는 데 있는 것 같진 않다. 물론 ‘동화(童話)’라는 단어가 지닌 순수하고 해맑은 느낌에서 보자면 색스러운 백설공주나 돈 밝히는 신데렐라의 등장 자체가 파격적인 뒤집기처럼 보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뒤집기란 전체 구조를 부숴버리는 파괴력을 일컫는바, 이 작품에서의 뒤집기는 동화의 궁극적 순수함을 해체하고 그 실체를 다시 보려는 집요함과는 거리가 있다. 진짜로 기존 동화를 뒤집는 상상력을 발휘했다면 이 작품이 웃음을 만들어내긴 어려웠을 거다. 일례로 그림형제의 원작에 나타난 성적 모티프나 신체 훼손의 장면들을 보면 이게 어쩌다 동화가 된 건지 알 수 없을 지경이고, 그림형제의 작품에 덧씌워진 동심의 껍질을 벗겨낸 동화 다시 쓰기는 참혹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키류 미사오의 책(『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시리즈!)은 19금 인증을 해야만 살 수 있더라.
<난쟁이들>의 1차적 관심은 동화 뒤집기보다는 동화를 더욱 동화답게 만드는 데 있다. 다시 쓰기의 해석이 아니라 동화다움의 재확인을 하고 있는 셈이다. 과정이야 어쨌든 이 작품의 마지막은 ‘끼리끼리’의 조건조차 뛰어넘는 순수한 사랑 아니던가. 사랑에 덧씌워진 조건과 욕망의 외피를 벗기는 힘은 ‘많은 돈’과 ‘잘생긴 외모’가 아니라 ‘희생’과 ‘헌신’일지니. 백설공주와 늙은 난쟁이가 지칠 줄 모르는 사랑을 나누는 판타지, 난쟁이 출신의 훤칠한 왕자가 난쟁이가 되어버린 공주를 받아들여 기꺼이 ‘가장’이 되길 결심하는 판타지(행복하게 살려면 절대 가장이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유언 같은 충고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판타지는 현실의 질곡을 넘어섬으로 시작되지만 현실로의 복귀는 다루지 않음으로써 완성된다.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을까? 하지만 <난쟁이들>에서 그런 무거운 질문 따위는 필요치 않다. 이건 가볍고 유쾌한 동화니까! 동화의 코드는 반복된다.
웃음을 향한 집중
사실 동화냐 동화 뒤집기냐의 여부는 <난쟁이들>을 이야기하는 데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애초부터 이 작품의 최종 관심은 오로지 웃음, 그 하나에 있기 때문이다. 동화의 모티프를 사용한 것도 이것이 웃음을 만들어내기에 아주 좋은 재료이기 때문이었을 거다. 일단 주인공의 이름과 성격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이야기의 진행과 결론은 물론, 주제까지도 관객에게 이미 공유된 텍스트이니 웃음을 빚어내기 위한 모든 조건이 구축된 셈이다. 이런 환경에서 이 작품이 선택한 웃음을 일궈내는 방식은 ‘다르게 말하기’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동화의 인물을 말하고 행동의 의미를 말하는 거다. 인어공주와 생선 공주 사이에 놓인 기의의 차이랄까. 기존의 동화가 사람(人)의 향기에 방점을 찍었다면 이 극에서는 생선(漁)의 비린내에 중점을 두는 식이다. 웃음은 여기에서 터져 나온다.
생각할수록 설득력 있는 생활 속 디테일이 힘을 발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번 만난 왕자와 (밤이면 밤마다!)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토로하는 백설공주의 한탄이나, 재투성이 가사 노동의 과거를 벗어버리기 위해 돈 많은 남자를 만나야 한다는 신데렐라의 강박도 그렇고, 다른 여자에게 훌쩍 떠나버린 남자 때문에 졸지에 모든 걸 잃은 인어공주의 신분 몰락까지도, 사실 현실적으로 모두 그럴듯한 이야기 아닌가? 하지만 이야기를 펼치는 기세가 풍자라 부를 만큼 신랄하지는 않다.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불만을 구시렁구시렁 털어놓는 뒷담화의 쾌감이야말로 이들 공주에게 현실의 생동감을 불어넣는 힘이 된다. 왕자들의 어이없는 외모와 허세 섞인 대화의 우스꽝스러움이나 난쟁이의 실존적 고민에 김을 확 빼는 아버지들의 추임새(‘쟤 좋아하냐?’)도 같은 맥락의 웃음 코드로 볼 수 있다.
웃음을 부추기는 또 하나의 요소는 전형적인 모양새로 꾸며진 시각적 이미지와의 충돌이다. 펼쳐진 동화책 모양으로 꾸며진 무대는 예쁜 영상 팝업 북처럼 아기자기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공주들은 동화 속 의상을 성실하게 입었고 왕자들은 금발 머리를 휘날리며 말을 타고 등장한다. 무릎 꿇은 종아리를 가리기 위해 길게 늘어뜨린 의상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난쟁이로 꾸민 모습은 아주 그럴듯하다. 웃음은 이런 전형을 깨뜨리는 반전에서 시작된다. 색녀 백설공주, 속물 신데렐라, 비린내 인어공주와 ‘뜨그덕’거리는 모양새가 왠지 싸구려 같은 왕자들, 그리고 팔등신도 아닌 구등신으로 ‘등신’의 개수를 늘린 난쟁이들의 변신까지 반전이 아우르는 범주는 넓다. 뮤지컬의 전형적인 연기에 대한 자의식도 놓지 않으면서 슬쩍슬쩍 장르의 문법을 갖고 노는 품도 보기에 즐겁더라.
하지만 이 작품의 웃음이 지닌 진짜 가치는 웃음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을 향한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려고 독약을 들이키는 순간조차도 인어공주는 약병을 현란하게 흔들며 ‘처음처럼’ 신성한 음주의 예식을 치른다. 진정한 사랑이라는 의미 따위에 웃음의 초심을 빼앗길 수는 없다는, 관객의 웃음을 위한 창작진의 결기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이러한 집중은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이를 통해 이 작품은, 지금까지의 창작뮤지컬이 항상 걸려 넘어졌던, 어설픈 의미의 강박을 넘어섰을 뿐 아니라 유치한 유머의 강박 또한 넘어서버렸다. 시종일관 노닥노닥 키득키득 단 한순간도 진지함에 한눈팔지 않는 높은 자존감은 자기네들의 감각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일 것이다. 한없이 가벼워질 수 있는 자존감만큼 진지한 건 없다.
가벼움의 가능성
<난쟁이들>의 대표적인 뮤지컬 넘버인 ‘끼리끼리’는 이 작품의 정체성을 잘 설명해 준다. 뮤직비디오를 통해 이미 공개된 뮤지컬 넘버가 시작되는 순간 관객의 환호가 터져 나온다. 아름다운 선율이나 가창력이 돋보이는 불후의 넘버라기보다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가까운 이 노래가 이 작품의 대표적인 뮤지컬 넘버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적절하면서도 장난스러운, 작품의 결에 맞춰 호흡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음악의 미덕이 한껏 발휘된 예라고나 할까. 관객의 기억에 남는 음악의 존재 방식에 새로운 예를 제시한 셈이다.
가벼움에서 출발해 웃음의 종착지에 사뿐히 도착한 <난쟁이들>의 여정에 박수를 보낸다. 재미있는 작품이라는 최고의 칭호를 받기에 창작뮤지컬로서는 제일 앞선 자리를 차지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웃음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많은 작품들이 아웃됐던 베이스를 이 작품은 넉넉한 걸음으로 여유롭게 밟았다. 소소한 웃음을 짓다 보니 굵직한 웃음을 향한 기대감도 생긴다. 모든 뒤집기와 허물기의 근본적 목표는 ‘짓기(poiesis!)’에 있지 않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지어 올린 이야기는 역사보다 위대하다. 세상을 짓누르는 무거움마저도 하찮게 보아 웃어버리는 진짜 가벼움의 힘이 지어질 수 있다면. 웃음의 대상이 더 넓어지길, 웃음의 소리가 더 커지길 진심으로 기대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9호 2015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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