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만화에서 애니메이션, 게임, 영화로 계속 확장한 『데스노트』가 이번에는 뮤지컬로 옮겨진다.
사신에게서 무소불위의 살생부를 얻은 주인공의 치열한 심리전이 인상적인 이 작품은 스릴러, 판타지,추리, 미스터리 등 다양한 요소들로 독자를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특히 이런 주인공과 초현실적 존재의 조합은 원작 작가 오바타 타케시의 작품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설정이어서 눈길을 끈다.
판타지 소재로 진행되는 사실적인 스토리
일본과 한국을 넘어 유럽과 미국에서까지 뜨거운 인기를 얻은 『데스노트』는 작가인 오바타 타케시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작품이 됐다. 일본에서는 이미 세 편의 영화가 제작됐고 할리우드에서도 최근 감독 확정과 함께 영화화 소식이 들려온다. 국내에서는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에도 실렸을 정도로 현재진행형의 뜨거운 감자. 이만하면 오바타를 일약 스타 작가에 오르게 한 작품은 『데스노트』 같지만, 사실 그는 『고스트 바둑왕(원제 ‘히카루의 바둑’)』으로 이미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이 작품은 다락방 창고의 바둑판에 봉인돼 있던 옛날 천재 기사의 영혼이 주인공 소년에 의해 깨어나, 두 사람이 함께 바둑의 세계를 헤쳐 나간다는 내용을 담았다.
오바타가 만화 잡지 『소년 점프』에 연이어 연재한 두 작품은 각각 바둑과 범죄라는 전혀 다른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왠지 비슷한 인상을 준다. 이는 오바타 특유의 작화 스타일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캐릭터와 상황 설정에서 닮은 점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두 작품 모두 숙명적인 라이벌이자 같은 세계에 몸담고 있는 상대 캐릭터가 등장한다. 대개 소년 만화의 기본 공식은 적 하나를 물리치면 그보다 강한 새로운 상대가 등장하는 ‘에스컬레이터식’ 구도를 사용하지만, 『고스트 바둑왕』과 『데스노트』는 이 공식을 배제했다. 오히려 히카루와 아키라(『고스트 바둑왕』), 라이토와 L(『데스노트』)의 라이벌 구도를 유지하며 함께 강해지고 성장하는 전개로 이야기의 흡인력을 배가시킨다.
더 확실한 유사점은 초현실적인 존재가 등장해 내내 주인공과 함께한다는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오바타 타케시의 작품에서 가장 자주 활용되는 컨셉이다. 흥미롭게도 국내에 소개된 그의 작품들에서는 한결같이 이와 비슷한 설정이 등장한다. 『아라비안 마신 모험담 램프램프』, 『어둠의 인형사 사콘』, 『블루 드래곤 라르 그라드』는 모두 소년과 초현실적인 존재가 콤비를 이뤄 이야기를 주도한다. 『아라비안 나이트』를 변형한 초기작 『아라비안 마신 모험담 램프램프』는 악한 마신에 맞서는 정의의 마신과 소년의 모험을 그렸다. 최근작 『블루 드래곤 라르 그라드』에서도 블루 드래곤의 그림자를 품은 소년이 악을 물리치는 여정을 담았다. 이는 판타지적 소재와 세계관에서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설정이다.
하지만 『고스트 바둑왕』과 『데스노트』는 각각 유령과 사신이라는 판타지적 요소가 들어 있음에도 이야기를 철저히 사실적으로 전개한다는 점에서 이와 구분된다. 오히려 이런 철학과 연결되는 작품은 『고스트 바둑왕』의 전작인 『어둠의 인형사 사콘』이다. 일본의 전통 인형극 ‘분라쿠’에서 사용하는 인형 ‘우콘(右近)’과 이를 조종하는 인형사 ‘사콘(左近)’이 주인공인 이 작품은 『소년 탐정 김전일』을 연상시키는 범죄물과 추리물의 외형을 갖추고 있다. 분라쿠 인간문화재인 타치바나 가문의 일원인 사콘은 항상 우콘이라는 인형을 데리고 다니는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다. 반면 우콘은 사콘의 또 다른 인격 같은 존재로, 내향적인 사콘이 하지 못하는 말을 마음껏 떠들어대는 반대의 성격을 지녔다. 사실은 사콘 혼자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살인 사건을 접할 때마다 다른 두 인격이 반목을 거쳐 논리적인 분석에 다다르며 사건을 해결하는 전개는 꽤 사실적인 추리물에 가깝다.
『고스트 바둑왕』과 『데스노트』는 판타지 캐릭터의 유혹을 뿌리치고 치밀한 심리와 추리에 집중하는 이 전략을 잇는다. 유령의 강림과 사신이 떨어뜨린 죽음의 노트가 거대한 이야기의 시작이지만, 두 작품 모두 판타지가 아니라 바둑 만화와 범죄 스릴러의 핵심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죽음을 동력으로 나아가는 이야기
이런 두 작품의 긴장감 조성의 중심에는 주인공의 비밀을 둘러싼 상대 세력들의 추격전이 있다. 바둑 고수 유령과 사신의 살생부의 존재를 감추기 위한 주인공들의 치밀한 두뇌 싸움이 그 핵심이다. 그리고 두 작품 모두 주인공들이 자신의 비밀을 들키기 직전까지 몰리기도 한다. 바둑을 통한 소년의 성장물에 가까운 『고스트 바둑왕』도 이런 위태로운 상황 묘사에서는 『데스노트』 못지않은 긴박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 긴박감은 급기야 두 이야기를 이끌어온 주요 인물들의 죽음으로 최고조에 이른다. 『고스트 바둑왕』의 유령 후지와라노 사이는 극 중 최강자와 일전을 치르고 그 대국을 히카루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승천한다. ‘고스트 바둑왕’인 사이가 사라진 후에도 작품은 히카루 중심으로 2부를 이어갔기 때문에 개명된 제목이 방향을 잃자, 소장판에서는 원래의 ‘히카루의 바둑’으로 바뀌는 해프닝도 있었다. 『데스노트』에서는 사신보다 더 강한 존재감을 보여주던 L의 죽음으로 1부가 종결되는 유사성을 보인다.
하지만 특히 『데스노트』가 게임을 비롯해 영화와 뮤지컬까지 거침없이 ‘멀티 유즈’되고 있는 것은 바로 범죄와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더 인상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주인공인 야가미 라이토의 천재적이며 사악한 술수와 과감한 행동이 있다. 라이토는 미국 드라마 <덱스터>의 주인공 덱스터처럼 안티 히어로이지만 그의 범죄 행위엔 어느 정도 타당한 이유도 있어 극 중 추종자들뿐만 아니라 일부 독자들에게도 지지를 받았다. 실제로 이런 라이토의 사상은 인터넷상에서 다양한 철학적 논쟁을 야기하기도 했다. 데스노트를 줍기 전까지 라이토는 정의감 넘치는 아버지와 닮은 곧은 성품의 모범생이었지만, 노트를 갖게 된 후 그 절대적이고 강력한 힘에 매혹돼 점차 악의 기운에 물든다. 완벽한 조건의 ‘엄친아’가 막강한 권력을 쥐자 자신을 ‘우중(愚衆)’ 위에 군림하는 존재로 자각한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라이토를 우파(RIGHT)의 은유로 해석하기도 한다. 물론 극 중 라이토는 ‘Light’라고 표기되지만 비슷한 음가를 차용해 우파의 속성을 풍자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그가 우파라면 반대편에 있는 L은 당연히 좌파(Left)의 표상이 된다. 이 경우 그는 범죄자의 처벌이라는 명분이 있더라도 사회적 합의와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처단 행위는 결국 범죄일 뿐이라는 합리주의를 대변한다.
이처럼 오바타 타케시의 작품은 다양한 분석과 해석이 가능한 캐릭터와 설정 덕분에 계속해서 여러 장르로 재창조되고 있다. 처음의 흥미로운 설정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예측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전개되는 이런 스토리 구조는 오바타의 작품 세계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1호 2015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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