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세상에 이름을 알린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가 올해 50주년을 맞았다. 반세기 동안 국적을 초월한 사랑을 받아온 <맨 오브 라만차>.
이제 100주년을 향해 나아갈 <맨 오브 라만차>의 행보를 기대하며, 지난 50년간 이 작품이 걸어온 시간을 되짚어 보았다.
1965년 <맨 오브 라만차> 초연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탄생은 1959년 CBS에서 방영된 극작가 데일 왓서맨의 TV 드라마 <나, 돈키호테>에서부터 출발한다. 드라마는 성공리에 방영되며 그해 작가협회상을 받았다. 몇 년 후 왓서맨은 드라마를 각색해 뮤지컬화하는 작업에 착수했고, 미치 리와 조 다리온이 각각 작곡과 작사에 참여했다. 이들의 협업으로 완성된 <맨 오브 라만차>는 먼저 1965년 미국 코네티컷의 굿스피드 오페라하우스에 올라 4주간의 시연을 펼친 후, 11월 22일 오프브로드웨이 앤타 워싱턴 스퀘어 극장에서 초연했다. 연출은 알버트 마르가 맡았으며, 돈키호테/세르반테스 역엔 리차드 킬리, 알돈자/둘시네아 역엔 존 디에너, 산초 역엔 어빙 야콥슨이 이름을 올렸다. 개막 당시에는 특별한 이력이 없던 작품인 탓에, 일반 관객들의 예매율이 저조했다. 하지만 첫 공연 후 평단의 찬사가 이어지며 단숨에 핫한 공연으로 떠올랐다. 명작 『돈키호테』의 현대적인 재구성과 당시로는 드물게 현악기 대신 목관악기, 퍼커션 등을 비중 있게 사용한 세련된 음악이 평단의 호평을 끌어낸 것이다. 그 결과 이듬해 토니상에서 베스트 뮤지컬상, 작곡작사상, 연출상, 무대상, 남우주연상 등 5개 부문을 석권하며, 명실상부 그해를 빛낸 작품으로 기록됐다.
1968년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 진출
초연 이후 <맨 오브 라만차>의 흥행 열풍은 계속되었다. 1968년 3월에는 마틴 벡 극장으로 무대를 옮기며 브로드웨이 진출을 알렸다. 1969년, <맨 오브 라만차>는 뉴욕 공연만으로 연속 1,800회를 달성하며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사운드 오브 뮤직>의 기록을 넘어섰다. 1971년 6월에는 마침내 총 2,328회의 공연을 끝으로 뉴욕에서의 첫 장기 공연이 막을 내렸는데, 이는 1969년대 뮤지컬의 장기 공연 순위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한편, 1968년에는 웨스트엔드 진출도 이뤄냈다. 제임스 겔브가 연출을 맡아 4월 24일 피카딜리 시어터에서 개막하며, 작품의 성공 신화를 이었다.
1972년 <맨 오브 라만차>의 영화화
<맨 오브 라만차>의 흥행은 작품의 영화화에 힘을 실어주며, 1972년 뮤지컬 영화 <맨 오브 라만차>를 탄생시켰다. 작가 데일 왓서맨이 직접 각색을 맡았고, 감독에는 <러브 스토리>의 아샤 힐러가 이름을 올렸다. 영화는 원작 뮤지컬 넘버의 매력을 충실하게 살리는 데 초점을 맞췄지만, 전반적으로 무대의 감동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을 받았다. 그럼에도 화려한 캐스팅으로 스크린만의 매력을 선사하였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피터 오툴이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 <두 여인>의 소피아 로렌이 알돈자와 둘시네아, 그리고 제임스 코코가 산초 역에 이름을 올려 특별한 시너지를 자아냈다. 이 중 피터 오툴의 돈키호테 연기는 인상적이지만, 영국 뮤지컬 배우 사이먼 길버트의 노래를 립싱크했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을 남겼다.
1991년 초연 25주년 기념 투어
1990년 초연 25주년을 맞은 이듬해 <맨 오브 라만차>는 이를 기념하는 미국 투어를 펼쳤다. 11월 7일 시카고를 시작으로, 로스앤젤레스, 코스타 메사 등 일곱 도시에서 공연을 이어갔다. 하지만 당시 원작자 왓서맨은 이 공연에 대한 불만을 표명해 화제를 모았다. 알버트 마르의 연출, 하워드 베이의 무대 디자인 등 1965년 초연 버전에서 거의 변화되지 않은채 공연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 작품의 작곡자이자 프로듀서를 겸하고 있던 미치 리는 “고장 나지 않으면 고치지 않는다”는 자신의 지론을 밝히며 투어를 계속했다. 이후 투어를 마친 <맨 오브 라만차>는 1992년 브로드웨이로 귀환했고, 영화배우 라울 줄리아(돈키호테/세르반테스 역)와 가수 쉬나 이스턴(알돈자/둘시네아 역)의 출연으로 화제를 모았다.
2002년 네 번째 브로드웨이 리바이벌
1965년 초연 이후 <맨 오브 라만차>는 브로드웨이에서 네 차례 리바이벌되었다. 1972년 6월엔 비비안 버몬트 시어터, 1977년 9월엔 팰리스 시어터, 1992년 4월에는 마르키스 시어터 무대에서 재공연됐다. 2002년 12월 개막한 리바이벌 공연은 초연 무대였던 마틴 벡 시어터에서 펼쳐졌다. 앞서 알버트 마르가 연출한 세 번의 리바이벌과 달리 이 공연에서는 크리에이티브 팀의 전면 교체가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연출은 영국 출신의 조너선 켄트, 음악감독은 로버트 빌링, 무대와 의상 디자인은 폴 브라운, 조명 디자인은 폴 갤로가 맡았다. 출연진에는 브라이언 미첼(돈키호테/세르반테스 역), 메리 엘리자베스 매스트란토니오(알돈자/둘시네아 역), 어니 사벨라(산초 역) 등이 이름을 올렸다. 2002년 변화된 리바이벌 공연은 관객과 평단의 호응을 이끌어내며, 이듬해 드라마데스크상, 토니상에서 베스트 리바이벌상에 노미네이트되는 결과를 이뤄냈다.
2005년 한국 초연
2005년에는 오디뮤지컬컴퍼니가 <맨 오브 라만차>를 한국 초연했다. 1967년 실험극장이 <동키호테>란 제목으로 이 작품을 처음 무대에 올렸고 예그린악단(1976~1977년)과 롯데월드 예술극장(1992) 등이 공연을 이었지만, 국내에서 라이선스를 정식으로 획득해 무대에 올린 것은 2005년이 처음이다. 그간 <맨 오브 라만차>의 인기는 국경을 초월했다. 그 시작을 알린 것은 1966년, 세르반테스 사후 350주년을 기념해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공연되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후 1967년 이스라엘 텔아비브와 스웨덴 말뫼, 1968년 프랑스 파리와 오스트리아 비엔나, 1969년 일본 도쿄 등 각국에서 초연을 이어갔고, 1972년에는 구소련에서 초연하며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마이 페어 레이디>에 이어 구소련에서 세 번째로 상연된 뮤지컬로 기록됐다. 한편 일본에서는 지난 2012년, 배우 마치모토 코시로가 1969년 일본 초연 이후 26세부터 70세까지 돈키호테/세르반테스 역으로 1,200회 넘게 무대에 올라 일본 뮤지컬계에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2015년 초연 50주년과 한국 초연 10주년
2015년은 <맨 오브 라만차>가 초연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셰익스피어 시어터 컴퍼니가 지난 3월 미국 워싱턴의 시드니 하만 홀에 <맨 오브 라만차>를 올렸다. 앨런 폴이 연출을 맡고, 오페라 가수 겸 뮤지컬 배우 앤소니 윌로우가 출연한 이번 프로덕션은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에 힘입어 연장 공연으로 이어졌고, 추후 브로드웨이 공연의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했다. 원작가 데일 왓서맨의 미망인 마사 넬리 왓서맨은 이 공연에 참석해 “<맨 오브 라만차>는 관객을 위한 유일한 뮤지컬이다”란 축사를 남겼다. 한편 국내에서는 <맨 오브 라만차>가 한국 초연 10주년을 맞아 겹경사를 이뤘다. 2005년 초연 이후 2007년, 2008년, 2010년, 2012년 재연을 거쳐 초연의 크리에이티브 팀(데이비드 스완 연출, 김문정 음악감독, 서숙진 무대디자이너 등)이 다시 한 번 2015년 무대를 위해 의기투합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3호 2015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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