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대 남자
강한 남자의 상징 같은 두 배우, 김준현과 김우형. 두 남자의 인연은 학창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예대 재학 당시 진한 우정을 나누던 동기에서 무대 위의 닮은꼴로 손꼽히는 동료 배우가 되기까지. 배우로서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하며 한 뼘씩 성장해 온 두 배우가 이번엔 <레 미제라블>에서 장 발장을 쫓는 신념의 사나이 자베르 경감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다른 시작, 같은 목표
두 분은 학창 시절에 돈독한 우정을 자랑하는 사이였다죠. 서로 공유하는 특별한 추억이 있을 것 같은데요?
김우형 학교 다닐 때 형하고 저는 서로 버팀목이 돼줬던 사이예요. 제가 형한테 엄청 의지했어요. 저한테 형은 맏형 같은 든든한 존재였으니까. 아직도 기억나는 게 2006년에 <지킬 앤 하이드> 일본 투어 공연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당시 일본 극단 시키에서 연수 중이던 형이 응원을 왔어요. 악보 챙겨 다니라고 가방을 선물로 사서. 형도 일본에 간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자기 한 몸 챙기기도 바빴을 시절인데, 고마웠죠.
김준현 연극과 나와서 배우 하려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삶을 꾸려가기가 힘든 직업이니까. 그런데 우형이는 배우가 되려고 꾸준히 노력하더라고요. 그 모습이 예뻐서 뭐라도 챙겨주고 싶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당시에도 우형이는 끝까지 가겠구나 싶은 느낌이 있었어요.
준현 씨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2010년에 <지킬 앤 하이드>를 같이하게 됐을 때 어땠어요? 앞으로 비슷한 역할을 맡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김우형 제가 학교에 있을 때 형이 일본 극단에 들어갔기 때문에 우리가 같은 무대에서 활동할 거라고 생각 못했어요. 그러니까 형을 다시 만났을 때 당연히 좋았죠. 뮤지컬계에 키나 체격이 비슷한 사람이 별로 없는데, 우리는 외형뿐 아니라 느낌도 비슷해요. 형이나 저나 그냥 딱 봐도 강한 남자. (웃음) 특히 형은 여성스러운 구석이 하나도 없어요.
김준현 학교 다닐 때는 딱히 저희가 닮았다는 생각을 안 해봤는데, 사회에 나와서 이미지가 비슷하단 얘길 많이 들었죠. 저 보면 우형이 보는 것 같다고 하고, 우형이 보곤 저를 보는 것 같다고 하고. 우리 둘이 이미지가 겹친다는 얘길 많이 들었어요.
지킬이나 조로, 라다메스처럼 지금까지 같은 역할을 했던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같은 시즌에 한 역할을 더블 캐스트로 맡는 건 이번 <레 미제라블>이 처음이에요. 서로 자베르로 오디션을 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겠죠?
김준현 이번 자베르 오디션에 누구누구 왔다는 얘길 들었을 때 전 우형이가 되겠다 싶었어요. 무조건 김우형이네, 그랬죠. 고집 있고 신념 강한 자베르 같은 성향이 있는 친구니까. 우형이가 학교 다닐 때 얼마나 무서운 규율 부장이었는데요. (웃음) 우리는 같이 공연하면 좋겠다고 얘기하는데, 자꾸 같은 역할을 하게 되니까 무대에서 만날 일이 없어요. 그건 좀 아쉽죠.
김우형 내가 오디션을 잘 봤으면 무대에서 만날 수도 있었는데. 이건 비하인드스토리지만, 사실 이번에 장 발장으로 오디션을 지원했어요. 영화 <레 미제라블>를 보고 휴 잭맨이 연기하는 장 발장에 반해서 나도 섹시한 장 발장이 돼보자 싶었거든요. (웃음) 근데 오디션을 준비하면서 장 발장을 하려면 난 아직 멀었구나, 스스로 느꼈어요. 제가 생각해도 노래를 가짜로 부르고 있는 느낌? 오디션 첫날 역시나 자베르로 다시 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준현이 형이 자베르에 유력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블 캐스트에서 하나 남은 자리를 내가 맡아야겠다 싶었죠. (웃음) 근데 <레 미제라블>처럼 이렇게 많은 역할이 욕심나는 작품이 진짜 없어요. 명작은 명작이에요.
<레 미제라블>이라는 작품은 언제 알게 됐는지 기억해요? 언제 처음으로 이 작품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김준현 20년 전인가, 시민회관에서 해적판 공연으로 <레 미제라블>을 처음 봤어요. 학교에서 단체로 보러 간 거였는데, 솔직히 그땐 노래 좋다, 감동적이다, 이렇게 느끼진 못했어요. 그럴 나이가 아니었죠. 너무 어렸으니까. 공연 중간중간 졸면서 과제를 해치우는 기분으로 봤죠. (웃음)
김우형 저는 서울예대 입시를 준비할 때 <레 미제라블>을 알게 됐어요. 마리우스 노래 ‘Empty Chair Empty Table’이 입시곡이었거든요. 그때는 대충 이런 작품이 있구나 하는 정도였고, 2007년에 <레 미제라블> 오디션을 했을 때 이 작품 진짜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학생 혁명단 리더 앙졸라를 정말 하고 싶었거든요. 근데 어렵게 오디션에 합격하고 나서 공연이 무산됐죠. 당시 아쉬워했던 배우들 많아요.
결국 2012년 초연에서 앙졸라로 그때 한을 푼 셈이네요?
김우형 사실 2012년에는 어느 정도 세월이 흘렀으니까 자베르로 오디션을 봤어요. 그런데 해외 프로덕션에서 자베르를 하기엔 제가 너무 어려 보인대요. 자베르 말고 앙졸라를 하라기에 고민 많이 했는데, 결론은 잘한 것 같아요. <레 미제라블>에서는 장 발장하고 자베르를 제외한 모든 배역이 앙상블 역할을 겸해서 처음으로 앙상블을 해봤거든요. 앙졸라가 소화하는 앙상블 역이 무려 여덟 개였어요. 운 좋게 주연으로 데뷔해서 앙상블을 못 해봤는데, 값진 경험했죠.
김준현 우리 인연이 재밌는 게, 저도 초연에서 자베르를 지원했다가 앙졸라로 오디션 콜을 받았거든요. 그때 다른 작품이 들어와서 고민하다 앙졸라 오디션을 포기했는데, 결국 우형이랑 이렇게 다시 자베르로 만났죠.
준현 씨는 2013년 일본에서 장 발장으로 <레 미제라블>을 경험해 봤잖아요. 그 공연은 어떻게 하게 된 거였어요?
김준현 사실 장 발장은 생각도 못했는데, 얼결에 하게 된 면이 있어요. 장 발장은 수십 년 인생의 질곡을 보여줘야 하는 인물이니까 아주 나중에 나이 먹고 할 역할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일본 공연 당시 토호(일본 프로덕션)에서 오디션을 보지 않겠냐고 연락을 해왔어요. 제가 2012년에 일본 콘서트를 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자베르의 ‘Star’를 불렀거든요. 그걸 토호 관계자가 들었던 거죠. 처음엔 오디션도 자베르로 봤어요. 근데 연출이 저보고 장 발장이 어울릴 것 같대요. 다음에 올 땐 장 발장 노래를 준비해 달라기에 놀라서 “나 아직 젊은데?” 그랬더니 “너 안 젊어, 늙었어” 이러더라고요. (웃음) 나중에 장 발장으로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도 좀 망설였어요. 하고 싶은 역할과 할 수 있는 역할은 다른 건데, 괜히 나한테 안 맞는 옷을 입는 건 아닐까 싶어서요. 결과적으론 장 발장을 해서 공부가 많이 됐죠.
김우형 장 발장하고 자베르는 음악적 테크닉이 굉장히 다른 캐릭터인데, 형은 둘 다 가능하단 거예요. 대단하죠.
진실을 향한 고민
<레 미제라블>은 워낙 정해진 틀 안에서 움직여야 하는 작품이지만, 그래도 어떤 자베르를 표현하고 싶다 하는 계획이 있나요?
김우형 섹시한 자베르를 보여주겠다는 거? (웃음) 이제 연습을 시작한 지 2주 정도 됐는데, 지금은 마냥 악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진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최근에 한 작품 <아리랑>에서 맡았던 양치성이란 역할이 콤플렉스 덩어리였거든요. 머슴으로 태어나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다 결국은 일본의 앞잡이가 되는 인물이죠. 근데 자베르가 양치성하고 비슷한 면이 있어요. 자베르도 최하층민으로 태어나 꼭 성공하겠노라, 그리고 다시는 밑바닥 인생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한 계단씩 위로 올라간 사람이에요. 자기가 세운 인생의 기준대로 살아가는 사람인데, 자기 신념을 지키는 게 나쁜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고요.
김준현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관객들은 장 발장에게 연민을 느끼기 마련이니까, 그를 집요하게 쫓는 자베르가 나쁘게 보이는 거지, 악인은 아니거든요. 자베르가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정당성을 잘 보여주고 싶어요. 그리고 저는 자베르가 죽는 순간이 진실되게 보였으면 좋겠어요. 관객들이 박수를 치는 둥 마는 둥 하는 공연은 안 됐으면 하는 바람이죠.
자베르가 장 발장으로 인해 자신의 신념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자살하는 그 순간에 어떤 감정일지 생각해 봤어요?
김우형 너무 부끄러워서 숨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 같아요. 죽지 않고는 스스로 견딜 수 없는 기분. 생각해 보면, 자베르처럼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누구나 다 살면서 자기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경험을 할 거예요. 어쩌면 무수히 많이. 예컨대 나보다 그릇이 큰 사람을 만나서 자괴감을 느끼게 될 때 있잖아요. 나는 저 사람 너무 밉다, 잘 안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나한테 따뜻하게 손 내밀어 줄 때, 내 자신이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럽죠. 그런 때 느끼는 감정하고 비슷할 것 같아요.
김준현 친구랑 싸우고 나서, 난 죽어도 화해 안 해, 쟤도 나랑 똑같은 마음일 거야 그랬는데 친구가 아무렇지도 않게 먼저 미안하다고 하는 상황 같은 거? (웃음) 그런 사소한 상황에서 느끼는 부끄러움도 견디기 힘든데, 자베르는 자기가 평생 지켜왔던 믿음이 깨져버리는 거잖아요.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끼겠죠. 거기엔 원망도 있을 테고, 분노도 있을 테고, 슬픔도 있을 테고. 저나 우형이는 다른 인생 경험을 하면서 살아왔으니까, 같은 상황이라고 해도 서로 느끼는 게 조금씩 다를 텐데 어떤 감정을 더 많이 느낄지는 좀 더 두고봐야 알 것 같아요.
상대방의 자베르는 어떨 것 같아요?
김준현 이번처럼 냉랭한 우형이 눈빛은 처음 봐요. 평소에는 눈에 독기를 안 담고 있는 친구거든요. 누구보다 카리스마 있는 자베르를 보여줄 것 같아요.
김우형 제가 계속 농담처럼 말했는데, 배우는 무대 위에서 섹시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남자든 여자든, 배우는 어떤 역할을 하든 섹시해야 하는 게 숙명이라고 생각하는데, 준형이 형은 그런 매력을 타고났어요. 아마 전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자베르가 될 거예요.
이번 공연에서 기대하는 점은 뭐예요?
김우형 참 많은 배우들이 오디션을 봤을 텐데, 우리가 뽑혔단 말이죠.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우리 스스로 증명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가 잘 해내는 게 함께하지 못한 배우들에게 예의를 갖추는 일일 테고요. 그리고 작품이 잘돼서 회사가 꼭 돈을 벌었으면 좋겠어요. (웃음)
김준현 배우들은 각자 개성이 강하다 보니, 작품 안에서 하나 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아요. 그런데 <레 미제라블>은 정말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작품이거든요. 특히 학생들이 혁명을 일으키는 바리케이드 장면은 앙상블이 좋지 않으면 빛날 수 없어요. 화합이 잘되는 작품은 서로 말은 안 해도 공유되는 긍정적인 기운이 있는데, <레 미제라블>에서 그런 분위기를 느끼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럼 저도 자연스럽게 성장하게 되겠죠.
끝으로 배우로서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나요?
김우형 인생의 경험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고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아서 깊은 사람이 되면 저절로 큰 배우가 될 거라고 믿어요. 앞으로 계속 성장해서 오래도록 무대에서 숨 쉴 수 있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어요.
김준현 무대 위에 서 있는 두 시간 반 동안 한순간도 거짓 없이 역할로 살 순 없더라도, 단 1분이라도 진실한 순간을 맛보게 되면 그 힘으로 계속 공연할 힘을 얻는 것 같아요. 진실한 순간을 위해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죠.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5호 2015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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