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나드는 우리의 모습
<살짝 넘어갔다가 얻어맞았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이 작품은 연극 <억울한 여자>, 드라마 <도쿄타워>의 일본 극작가 츠치다 히데오가
쓴 것이다. 우연히 긋게 된 선 하나로 변해 가는 인간의 모습을 블랙코미디로 꼬집은 이야기로, LG아트센터 제작으로 국내에 첫선을 보이게 됐다. 특히 국내 초연은 <목란언니>의 작가 김은성이 각색, <그게 아닌데>의 김광보가 연출을 맡고, 김영민, 이승주, 이석준 등 그간 김광보 연출과 앙상블을 이뤄온 배우들이 참여해 특별한 시너지를 기대하게 만든다.
작가 츠치다 히데오의 시선
“정치와 사회적 시스템을 운운하기 전에 사람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싶습니다. 이 흥분들에 물을 끼얹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우리 좀 냉정해 보자는 얘기예요.”
일본 극작가 츠치다 히데오가 <살짝 넘어갔다가 얻어맞았다>(이하 <살짝 넘어갔다>)를 쓰게 된 배경에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의 살벌한 분위기가 큰 작용을 했다. 인터넷에서는 단정적인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 눈에 띄고, 정책보다 정치적 입장만으로 정치계를 감정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츠치다 히데오는 의문을 품었다. ‘왜 모두가 이렇게 대화할 여유가 없어졌을까?’ 그래서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사회 시스템이 아닌 사람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자 했다.
츠치다 히데오의 주특기는 소소한 대화를 중심으로 작고 유쾌한 에피소드를 담아내는 것이다. <살짝 넘어갔다> 역시 <그 철탑에 남자들이 있다고 한다>, <억울한 여자> 등 그의 전작들처럼 특정한 사회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이를 정교한 코미디로 승화시키는 데 주력한다. <살짝 넘어갔다>는 미래의 어느 형무소를 배경으로 새로운 국경선이 그어지며 벌어지는 사람과 관계의 변화를 다루되, 시종일관 발랄한 대화를 이어가며 작가 특유의 유쾌함과 통찰력을 느끼게 한다. 그에 따라 관객들은 일종의 우화를 보듯 거리를 두고 작가가 펼치는 풍자를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다.
선 긋기 그리고 변화
작품은 경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제45 갱생 시설을 배경으로, 두 명의 간수와 여섯 명의 죄수의 이야기를 그린다. 감시가 느슨한 교도소에서 지루함을 느끼고 있던 이들은 어느 날 교도소를 경계로 나라가 둘로 갈라졌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장난으로 교도소에 국경선을 긋게 되고, 모두가 그 경계를 두고 놀이를 시작한다. 하지만 놀이는 점차 서로의 출신을 가르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결국, 꾸리아 출신의 경보 안, 양갑 성, 장창 우, 동꾸리아 출신의 대기 곽, 긍정 안, 수철 용, 자수 탁으로 편이 나뉘어 점차 적대적인 분위기가 형성된다. 또한, 두 나라로 나뉜 사이에서 고아 출신인 이구 허는 어느 곳에도 끼지 못하는 어정쩡한 상황에 처한다. 결국 선 하나로 시작된 갈등은 급기야 이들의 관계를 극단으로 치닫게 만든다.
이번 무대의 각색은 <로풍찬 유랑극장>, <목란언니> 등의 김은성 작가가 맡았다. 각색 과정에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지금 한국의 관객들에게 조금 더 우리의 이야기로 다가가게 만드는 것. 번역본과 각색본에 큰 차이를 두지 않되, 한국 관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명이나 이름, 명칭 등의 변화를 주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원작에서 나라의 배경을 막연한 시공간으로 구성해 ‘마나히라’란 실재하지 않은 지명을 지칭했다면, 한국 공연에서는 실재하지 않은 지명이란 점은 유지하되 ‘코리아’를 연상시키는 ‘꾸리아’로 지명을 바꾸었다. 같은 맥락에서 등장인물의 이름 역시 변화를 이뤘다. 원작에서는 이름에 한자를 쓰지 않는 설정이 등장하는데, 각색본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더욱 국내 현실에 맞게 성과 이름을 바꿔 쓰는 방법으로 변화를 주었다. ‘우 장창’이 아닌 ‘장창 우’로 불리는 시대란 설정을 더한 것이다. 더불어 연습 과정을 통해 ‘수철 용’. ‘이구 허’ ‘긍정 안’ 등 인물의 캐릭터를 상징하는 재밌는 이름들이 붙여졌다고 한다.
시의성 있는 블랙코미디
김광보 연출은 작품의 제목이 공연의 내용을 암시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살짝 넘어갔다가 얻어맞았다>. 제목 자체가 불현듯 생긴 선 때문에 벌어지는 인간의 갈등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 사실 한국의 현실에서 선이란 것은 꽤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남북 간의 갈등, 지역 간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을 유발하는 것이 바로 이 선 때문이 아닌가. 김광보 연출은 <살짝 넘어갔다>가 일본 작품이지만, 우리 상황에 굉장히 잘 맞아떨어지는 시의적절한 공연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 주변에서 쉬 볼 수 있는 선, 그리고 그로 인해 비롯되는 갈등을 작품이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각 인물들은 선에 따른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 중 가장 큰 변화를 보여주는 이는 바로 교도관 ‘대기 곽’이다. 김광보 연출은 ‘대기 곽’이 소위 말하는 완장을 찼을 때,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는지를 확연히 보여준다고 말한다. ‘대기 곽’이 완장을 차게 됨으로써 갈등이 드러나고, 여기에 다른 인물들이 군중심리를 드러내며 결국 그 갈등은 종착점까지 이르게 된다. 김광보 연출은 대기의 변신을 이 작품의 중요한 부분으로 꼬집었다. 나아가 이번 무대를 통해 관객들이 ‘내 안에 그어진 선’, ‘그동안 내가 선을 그음으로써 나타난 관계의 변화’ 등을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6호 2015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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