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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넥스트 투 노멀> 정영주 [No.147]

글 |안세영 사진 |심주호 2016-01-14 7,325

절망 속에서 빛나는 희망


“정삼각형을 어떻게 역삼각형으로 뒤집을지가 숙제예요.”  팬들의 간절한 기다림 끝에 돌아온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 이 ‘평범하지 못한’ 가족의 이야기에 새롭게 합류한 배우 정영주는 우울증에 걸린 아내이자 어머니 다이애나 역에 도전하는 소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늘 당당하고 유쾌한 모습으로 무대에 섰던 그녀가 정반대의 캐릭터를 만나면 어떻게 변신할까. 연극 <엘리펀트 송>의 피터슨으로도 열연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녀를 만났다.






두 작품과의 만남


이번 주에 <엘리펀트 송>이 개막했어요. 첫 공연을 마친 소감이 어떠세요?
이상하게 긴장이 안 되더라고요. 첫날부터 매진이었는데 일단 객석이 차니까 에너지가 돌아서 좋았어요. 작품 자체도 워낙 좋고요.


작년에는 이 연극을 원작으로 영화도 개봉했죠. 전 영화를 먼저 봤는데 거기서 보니 피터슨도 <넥스트 투 노멀>의 다이애나처럼 아이를 잃은 상처가 있더라고요. 둘은 정신과 간호사와 환자란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데 묘하게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영화에는 닥터 그린버그와 피터슨이 둘 사이에서 얻은 아이를 잃은 안타까운 사연이 있죠. 연극에는 그런 전사(前史)가 없어요. 그냥 공적인 원장과 수간호사의 관계예요. 하지만 연극의 피터슨도 정신병원 수간호사로 20여 년간 일하면서 자기만의 상처가 많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마지막에 마이클이 잘못됐을 때 본인이 나태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책임감을 느껴요. 마이클이란 아이를 잘 알면서도 그를 저지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무능함을 책망하는 거죠.


그런데 지난 2월 인터뷰 때만 해도 겹치기 출연은 하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이번에 그 원칙을 깨셨네요.
추석쯤에 수현재 컴퍼니에서 연락이 왔어요. 연극 <프랑켄슈타인>에서 인상 깊게 봤다며 새로 올리는 연극을 함께하고 싶다고. 처음엔 <넥스트 투 노멀>과 공연기간이 겹쳐서 거절하려고 했는데, 일단 대본 먼저 보라며 보내주더군요. 그런데 읽다 보니 제가 작년에 본 영화랑 같은 내용인 거예요. 제가 그 영화에서 피터슨 역을 맡았던 캐서린 키너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어머, 그 역할이야? 미치겠다! 이틀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고 엄청 고민하다가 아들에게 사정을 털어놨어요. 아들이 <넥스트 투 노멀> 대본도 다 읽고 노래도 달달 외우는 애거든요? 그런데 아들이 제 얘길 듣더니 ‘엄마, 둘 다 할 수 있지 않겠어?’ 이 한마디 하더라고요. ‘넌 엄마를 그렇게 믿어?’ 그랬더니 ‘응, 엄마 둘 다 할 수 있어’ 하는데, 그 말 듣고 오케이 한 거예요. 다행히 제작사 측에서도 배려해 준 덕에 지금까지 일정이 문제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아들이 어제 공연 보러 왔는데 끝나고 분장실에 와서 잘했다고 볼 토닥토닥하고 뽀뽀해 주더라고요.


<넥스트 투 노멀>은 어떻게 참여하게 된 건가요?
실은 <넥스트 투 노멀> 제의가 들어왔을 때도 이미 다른 뮤지컬 오디션을 끝내 놓은 상태였어요. 당연히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오디션 본 다음 주에 <빌리 엘리어트>를 같이했던 이나영 음악감독한테 연락이 온 거예요. 다이애나 역으로 오디션 좀 봐줄 수 있냐고. 그런데 제가 <넥
스트 투 노멀> 초연 오디션에서 떨어진 경험이 있거든요. 그래서 정말 나라도 괜찮으냐고 물었어요. ‘잘할 것 같은데’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앞뒤 안 재고 오디션을 보러 갔죠. 오디션 보면서도 얼마나 떨었는지. 다른 작품 쪽에는 죄송한 짓을 했죠. 사정을 말씀드리니 더블까지 제안해 주셨는데 제가 뮤지컬을 두 개 할 자신이 없어서 사양했어요.


초연 때도 오디션을 보셨다면 그전부터 작품을 알고 계셨던 건가요?
알고 있었어요. 왜냐면 제가 <빌리 엘리어트>에 출연했을 때, 그 작품이 토니상 남우주연상 하나만 받고 작품상 등등을 줄줄이 <넥스트 투 노멀>에게 뺏겼다는 얘길 들었거든요. 대체 어떤 작품인가 하고 음악을 들어봤는데 정말 쇼킹했어요. 그래, 뮤지컬에 이런 음악이 나와 줘야지 싶더라고요. 오디션에 떨어진 뒤 다른 배우들 몰래 공연을 보러 갔을 때도 감동받았어요. 울면서 ‘내가 이 좋은 작품을 놓쳤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이번에 먼저 오디션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으니, 전화 끊고 나서도 한참 멍했어요.




외면해 온 나를 직시하다


관객들도 놀랐을 것 같아요. 그동안 주로 강한 캐릭터를 연기해 오셨잖아요. 작품의 무게 중심이 되어 다른 인물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역할을 맡으셨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균형을 흔드는 불안정한 역할을 맡으셨어요. 새로운 역할이 낯설진 않으신가요?
아직 해결 안 된 부분이 있어요. 우리 음악감독이 비유하길, 언니는 항상 무대 위에서 안정감 있는 정삼각형을 만들어왔대요. 그런데 다이애나는 역삼각형이래요. 제가 이 정삼각형을 어떻게 뒤집을지가 숙제라고 하더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21년 전 배우를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여자 배우는 예쁘고 늘씬한 게 보통이었어요. 그에 비해 저는 개성이 강했죠. 주변에서 만날 뚱뚱하고 묵직한 캐릭터만 맡는다 하는데, 전 그게 싫지 않았어요. 모난 돌이 있을 수도 있지 뭘. 어떻게 둥그런 돌만 있어. 근데 일찌감치 이런 맘을 먹으면서 제가 외면한 부분이 있더라고요. 제 안에도 분명 여린 면이 있는데 그걸 계속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외면하고 외면당해 온 거예요. 그래서 가끔 내면의 아픔을 끄집어내야 하는 역을 만날 때마다 무지 고생했어요. 너무 오랫동안 숨겨놨더니 못 끄집어내겠더라고요.


그게 어떤 역이었어요?
2005년 <뱃보이>의 메레디스, 2010년 <빌리 엘리어트>의 윌킨슨, 그리고 작년 <프랑켄슈타인>의 드레이시와 마담 프랑켄슈타인이요. <프랑켄슈타인> 때는 제 개인적인 사정까지 겹쳐서 너무 힘들었어요. 조광화 연출은 그 사정을 아니까 도망가지 말라고 하는데 그때는 그것도 너무 잔인한 말이더라고요. 그래서 안 한다고 연습실을 뛰쳐나간 적이 두 번 있어요. 화장실 가서 물 틀어놓고 꺽꺽 울었죠. 근데 사연 없는 배우가 어디 있겠어요. 결국엔 조광화 연출이 아픈 나를 직시할 수 있게 해줬어요. 직접 삭발까지 해주면서. (웃음) 드레이시 캐릭터가 원작에선 남성이기 때문에 다른 남자 배우들처럼 삭발을 하면 어떠냐는 얘기가 나왔거든요. 괜찮다고 밀라고 했더니 바리깡 들고 덜덜 떨더라고요. ‘내가 여배우의 머리를 밀다니!’ 이러면서. 물론 밀고 나서는 두상이 끝내준다고 좋아했지만. (웃음) 이제 웬만한 시련에는 ‘겪을 만하니까 겪겠지, 이 또한 다 지나가겠지’ 생각해요.


다이애나 역시 내면의 아픔을 끄집어내야 하는 역할인데, 연습하면서 특히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나요?
‘내 신경정신과 의사와 나’라는 노래에서 여러 알약 이름 나오잖아요. 저는 그 알약 이름이 생소하지 않아요. 실제로 우울증 약을 복용한 경험이 있거든요. 2008년에 성대 파열이 와서 배우 인생이 끝날 뻔한 적이 있어요. 그때 수술하고 두 달 동안 말을 못했는데 뇌의 한 부분이 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TV를 보는데 하나도 재밌지도 슬프지도 않고 그냥 소파랑 한 몸처럼 붙어있는 거예요. 우울증 약을 먹으면 감정이 높낮이 없이 평준화되거든요. 그냥 무(無) 상태인 거죠. 그때 아들이 유치원생이었는데 남편이 다 챙겼던 것 같아요. 전 방관자였고. 그렇게 5개월쯤 지났을 거예요. 아침에 웬일로 아들이 수건을 들고 눈곱을 떼어주면서 ‘엄마. 세수 안 했지?’ 하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그러고 나서 애 얼굴을 보니 꼬질꼬질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고 집 안 꼴도 엉망이고… 그 꼴을 보니 번개 맞은 것 같더라고요. 그날 대청소하고 밤에 파스 붙인 채 여기저기 전화했어요. 나 공연하겠다고.


그러고 보니 극 중 다이애나도 비슷한 증상을 겪은 것 같아요.
2막에 다이애나가 그런 무(無) 상태로 나오죠. 약과 전기충격요법으로 모든 게 텅 빈 상태. 심장 박동기에 사망이 표시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 리딩할 때 가슴이 뜨끔했어요. 일부러 떠올리지 않아도 자연스레 제 경험이 떠오르니까. 사실 생각하기 싫은 기억이 떠오르는 건 좋지만은 않아요. 그럴 때 외면하지 않고 대면하는 작업이 힘들죠. 지금 노래랑 안무만 맞춰보는데도 벌써 눈물이 나서 큰일났다 하고 있어요. 칼린이 지금 실컷 울라고 하더라고요. 연습할 때 실컷 울어야 공연 때 덜 운다고.


같이 다이애나 역할을 맡고 계신 칼린 감독님하고는 언제부터 알고 지내셨나요?
에이콤 아카데미에서 뮤지컬 처음 시작할 때요. 저 24살, 칼린 28살 때. 첫 작품 할 때는 인사만 했고, 그후 <명성황후> 오디션 볼 때 칼린이 음악감독으로 왔죠. 그땐 한국말 진짜 짧았어요. 영어와 부산 사투리가 섞인 이상한 억양으로 말하는데 단어도 짧아! 얘기하면 배우들이 거의 못 알아들어서 제가 통역을 했어요. 한국말을 한국말로. 그러면서 친해진 거예요. 그때 에이콤 연습실이 역삼동에 있었는데 칼린 집이 논현동이었어요. 그래서 꼭 저희 집에 안 가고 그 집에서 밤새 뭔가 퍼먹었죠. 그러면서 칼린 논문 준비하는 것도 도와주고, 자고, 다음 날 같이 출근하고. 그랬으니 서로의 연애 관계며 잠버릇 정도는 꿰고 있죠.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입 다물어주는 관계랄까? 하하. 지금도 엄청 챙겨줘요. 칼린은 초연 때부터 이 작품을 해왔으니까 아직 디렉션 들어가기 전인데도 이것저것 많이 알려주죠. 하루는 문자로 댄스 슈즈를 챙겨오라고 해서 이유를 물으니까 이렇게 귀띔해 주더라고요. ‘내일 말괄량이 아들들하고 왈츠 출 거야. 근데 이 말괄량이 아들들이 계속 발을 밟거든.’ (웃음)




끝난 뒤에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


게이브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극 중에서 게이브는 다이애나의 환상 혹은 실재하는 유령으로 보이잖아요.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보기엔 그냥 그 무대 공간 자체가 다이애나의 머릿속인 것 같아요. 다이애나가 세팅해 놓은 세상. 옛날 유머 중에 이런 게 있거든요. 학생이 한밤중에 집에 돌아가는데 외길에서 하얀 옷 입은 누군가가 계속 쫓아오더래요. 귀신인 줄 알고 막 뛰어왔는데 집에 와보니 자기 안경 끝에 밥풀이 붙어있더란 거죠. 다이애나한테 게이브는 이 밥풀이에요. 남편인 댄은 이걸 떼어내려 애쓰고, 게이브는 어떻게든 붙어 있으려 애쓰면서 묘한 삼각관계가 형성되는 거죠. 다이애나가 마지막에 떠나는 건 이 세계를 깨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들 게이브를 그토록 그리워하는 다이애나가 막상 옆에 있는 딸 나탈리에게는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죠.
다이애나는 게이브가 생겨서 댄하고 결혼한 거잖아요. 그런데 8개월 만에 아이가 죽고, 다시 2년 만에 아이가 생기죠. 당시에는 남편을 원망했을 것 같아요. 또 아이를 만들었어. 혹시 얘도 8개월 만에 떠나버리면 어쩌지? 그게 너무 큰 상처니까 처음부터 외면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다른 아이가 생겼다는 것만으로 먼저 간 아이한테 죄책감을 느꼈을 거예요. 내 머릿속의 떠나지 않는 두 살짜리 게이브가 보고 있으니까 이 아이를 안아주기가 힘들었겠죠. 나탈리를 생각하면 정말 안타까워요. 다이애나와 나탈리의 관계는 상처투성이에요. 제 생각엔 그래도 나탈리가 엄마를 많이 봐주는 거 같아요. ‘엄마 원래 저러니까. 살갑진 않지만 내 엄만데 어쩌겠어.’ 하고. 사실 어느 집이나 ‘우리 딸, 오늘 하루는 어땠어?’, ‘어머니 고생 많으셨어요. 힘드셨죠?’ 이렇게 도덕책처럼 살진 않잖아요. 제 주위만 봐도 잘 살건 못 살건, 배우건 아니건 떠나서 어느 집이나 가족끼리 부대끼고 사는 건 똑같더라고요.


그럼 마지막에 다이애나가 가정을 떠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다이애나는 자기 삶을 챙기려고 떠나는 거예요. 마지막 곡인 ‘빛’에서 다이애나가 노래하잖아요. ‘살아있어야 행복해’라고. 댄과 나탈리, 게이브의 망령과 같이 있을 때 다이애나는 살아있는 게 아니었거든요. 살아서 행복하려고 떠난 거예요. 근데 거기서 끝이 아니고 남은 가족들에게도 좀 다르게 잘 해보고 싶은 거죠. 내가 없어서 나은 부분도 있을 거란 걸 인정하고 가는 거예요. 그거 쉽지 않거든요. 내가 없어도 유지가 된다고? 그럼 내가 쓸모없었던 거 아니야? 이런 불안한 마음도 있을 테고, 또 남겨질 가족에게도 미안하겠죠. 그동안 잘 해주지도 못했는데. 하지만 결국 다이애나가 떠나니까 댄도 상담을 받겠다며 자신을 돌아보잖아요. 나탈리도 헨리하고 자연스럽게 다이애나 소식을 이야기하고. 거기에서 공연은 끝나지만 그 이후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죠. 그래서 다이애나가 떠나는 게 그렇게 암담한 결말 같지 않아요.


이후의 이야기에 대해 그려본 게 있으세요?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에서 부부가 같이 정신과 상담받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런 장면을 떠올렸어요. 한 달에 한 번 의사 앞에서 만나서 ‘잘 지냈어?’, ‘어, 얼굴 좋네’ 그렇게 어색하게 몇 마디 나누다가 한 서너 번쯤 만났을 때 갑자기 대학 시절 생각이 나서 병원 앞 계단에서 키스를 할 수도 있는 거고. 그리고 나탈리에게도 인정을 받아야겠죠. ‘그동안 애썼어, 엄마’, ‘미안해, 엄마가 너무 관심이 없었지’, ‘아니야, 난 나름대로 편했어. 내가 약을 하든 대마초를 피우든 엄만 관심 없었으니까’, ‘이제 하지 마, 피부 늙어 이것아’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관계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런 희망적인 장면을 그려요. 솔직히 그런 상상이 안 된다면 이 공연이 너무 허무하잖아요. <넥스트 투 노멀>은 내용은 우울하지만 희망에 대한 이야기이거든요. 서로 떨어져 있어도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랑 잘 있대’, ‘미쳤나봐, 러시아 갔대’ 이렇게 소식을 주고받으며 사는 좀 더 평범한 모습을 그려봐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7호 2015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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