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B급이 아니라고 전해라
B급의 조건
고급 예술의 반대편에 키치가 있다면 대중 예술의 하위에는 B급 문화가 있다. 언뜻 비슷하게 볼 수도 있겠지만 키치와 B급 문화의 토대는 완전히 다르다. 키치는 고급 예술을 닮고 싶은 욕망에 자기만의 미덕인 통속성을 배반하면서까지 고급스러움을 흉내 내는, 말하자면 자존감이 낮은 취향이다. 모양새는 무겁기 그지없고 매무새는 진지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럴듯해 보이는 껍질을 들춰보면 그 안은 텅 비어있기 일쑤다. 애초에 자기에게 없는 것을 동경하느라 자기에게 있는 것을 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B급 문화의 자존감은 더없이 높다. 애초에 저급한 취향을 자처하며 모든 권위와 논리를 거부하는 곳에서 ‘싸구려’의 싹을 틔우는 것이 B급 문화의 특성이니 말이다. 소위 ‘병맛’을 자처하는 B급 문화는 대중 예술의 문법 밑에서 스스로 비속한 모양새로, 하지만 누구보다도 도발적으로 어이없고 황당한 ‘생산물’(‘작품’이 아니다)을 만들어낸다. 말도 안 되는 상상력을 맘껏 펼치는 자유로움은 B급 문화의 힘이다. 키치는 고급 문화의 눈치를 보지만 B급 문화는 거칠 게 없다. 그 어떤 기준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자기의 재미와 취향에 집중하면 그만일 뿐.
B급 문화가 자기만의 스타일을 확실하게 견지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물론 그 스타일은 우습기도 하고 촌스럽기도 하고 과장되어 있기도 하다. 어떤 스타일을 선택하든 가볍고 또 가볍다. 하지만 주류 문화의 문법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솔직하고도 쉽게 자기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이 가벼움은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동력이 된다. 이는 B급 문화가 독특하면서도 창의적인 비주류의 가능성으로 대두되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때 B급 문화 특유의 뻔뻔함은 쿨하고 멋진 자의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쯤 되면 싼티에도 자신감이 흐르고 비속함에도 여유가 넘치게 마련이다.
뮤지컬에서는 어떨까. 뮤지컬은 대중 예술의 대표적인 장르이니만큼 B급 문화가 자랄 수 있는 좋은 토양이다. 뮤지컬에서의 B급 문화가 지니는 의미의 층위는 다양하다. 뮤지컬의 미덕은 예술성이니 작품성이니 그런 무거운 가치가 아니라 오로지 재미에 있음을 보여준다거나, 대형 뮤지컬에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저예산 소극장 공연만의 기발하고 엉뚱한 상상력을 담아내는 것은 뮤지컬 공연 문화의 저변을 넓히는 필요조건이다. 굳이 대형화될 필요 없고, 굳이 무거워질 필요도 없으며, 굳이 스타에 절절맬 필요도 없다. 우리끼리 모여 재미나게 낄낄대고 신 나게 엎어졌다 자빠지면 그만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 뮤지컬계에 필요한 상상력은 이러한 B급의 자의식일지도 모른다.
B급이 되고 싶었지만
그런 면에서 보자면 뮤지컬 <지구멸망 30일 전>은 언뜻 반가운 작품이다. 이 작품은 B급 뮤지컬을 향한 의욕으로 가득한 공연이기 때문이다. 제목부터가 허무맹랑하다. 지구 멸망 30일 전이라니. 만화적인 설정이니만큼 작품 전반의 분위기를 예상할 수 있게 하는 재미난 제목이다. 극단적인 설정은 사건과 인물을 과장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과장과 허무맹랑함이 잘만 조화를 이룬다면 이 엉뚱함은 어느새 현실을 풍자할지도 모르고, 대형 뮤지컬을 비웃을지도 모르며, 자기만의 스타일로 멋스러워질지도 모른다. 이 작품의 제목은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안타까운 건 그 흥미가 딱 제목까지라는 데 있다. B급 뮤지컬로서 이 작품의 기발함은 제목에서 그 기운을 다하고 마니, 이 작품의 이야기는 제목의 기발함을 따라가지 못한다. B급이 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고나 할까. 문제의 핵심은 결국 상상력이다. B급 뮤지컬에서 돋보이는 것이 바로 이것이건만, B급 뮤지컬이 되기에 이 작품의 상상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제목은 그 자체로 연상되는 바가 많다. 지구 멸망 30일 전이라는 설정을 진심으로 받으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처럼 과장된 영웅주의가 등장할 것이고, 농담으로 받으면 어처구니없으면서도 황당한 코미디가 만들어질 터다. 어떤 방향도 좋다.
그런데 이 작품이 선택한 행로는 애매모호하다.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로맨틱 코미디이니 말이다. 사랑하지만 부모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하는 연인, 결혼했지만 경제적 불확실성으로 부부 생활을 하지 못하는 부부, 스타가 됐지만 자기의 진짜 모습을 가려야만 하는 가수 등등. 이런 설정은 벌써 답이 뻔하다. 연인은 맺어질 것이고, 부부는 뜨거워질 것이며, 가수는 자기 모습을 찾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평범한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굳이 지구 멸망 30일 전이라는 거창한 설정이 필요했는지 잘 모르겠는 거다. 소재의 흥미로움을 반감시키는 스토리의 전개는 지루하니 실망스럽다. 여기엔 B급 뮤지컬다운 아무런 상상력도 가미되어 있지 않다.
이 작품이 B급을 자처하는 근거인 농담 코드가 살아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결혼은 안 된다는 아버지의 눈에 흙을 뿌린다든지, 친구에게 죄를 지은 아버지가 벼락에 맞아 죽는다든지, 맥락 없이 엉뚱한 농담이 종종 등장하지만 어쩌나. 웃기지도 않고 기다려지지도 않으니 말이다. 졸렬하도록 조악한 농담도 맥락과 분위기가 축적되면 B급 특유의 취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지만 예측 가능한 이야기에 반복적으로 끼어드는 농담은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농담만으로는 B급의 정체성을 얻을 수도 없지만 그 농담마저도 관객의 웃음을 끌어내기엔 역부족이다. 이 작품의 이야기와 대사에서 B급의 스타일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이다. B급다운 스타일을 기대하기에 음악의 선율은 로맨틱 코미디의 정석에 가깝다. 이야기는 농담을 섞어 가벼워지고자 하지만 음악만 나오면 다시 원점이다. 음악은 감성 충만 진지 작렬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창작진은 그것이 일부러 의도한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듬성듬성한 이야기에 진지한 발라드 음악을 덧붙여 둘 사이에 분위기의 엇박자를 넣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려면 그 엇박자의 의도는, 가사가 됐든 배우의 연기가 됐든, 분명하게 드러났어야 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 그런 자의식은 없어 보인다. 배우는 정말 진지하게 사랑의 발라드를 부르는데 그 모습은 B급 뮤지컬보다는 로맨틱 코미디에 더 어울린다.
그렇다면 이 작품을 아예 로맨틱 코미디로 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여기에도 난관이 있다. 로맨틱 코미디 즉 극적 기준으로 보자면 이 작품의 이야기와 연출은 너무 엉성하기 때문이다. 갈등의 극복과 해결의 과정이 빠져있거나 있어도 듬성듬성하고, 장면의 매무새도 적잖이 무성의하다(한참이나 끌고 다니는 남자 주인공의 공항 짐 좀 벗겨주길!). 이 작품의 연출자인 성재준은 로맨틱 코미디에 익숙한 작가이지만 그의 작품이라고 보기에 당황스러울 정도이다. <싱글즈>와 <카페인>의 작가가 이렇게 허술한 공연을 만들다니. B급 뮤지컬을 표방하느라 성재준표 로맨틱 코미디의 디테일을 버렸건만 결과적으로 보자면 어느 것 하나 붙잡지 못한 셈이다. 성재준의 재능은 B급 뮤지컬이 아니라 로맨틱 코미디에 있건만.
B급 문화가 소수 마니아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은 자기만의 완결성에 있다. 저속하든 허황되든 유치하든 나름의 일관성으로 스타일을 만들어낼 때 사람들에게 중독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거다. 취향에 대한 도발은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그래야만 B급의 창의적인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 안에서 완결되지 못할 때 이것은 그저 준비가 충분치 않은 미완성품일 뿐이다. 미완성품을 자꾸 B급 정품이라고 우기면 안 된다. 제대로 상상을 펼치지도 못하고 제대로 말초적이지도 못한 채 끝나버리는 작품을 B급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이 작품은 아직 B급도 아니고 로맨틱 코미디도 아니다. 뭐가 됐건 빈틈부터 메워야 할 터. 그렇지 않으면 이 작품이 B급으로 완성되는 것보다 지구 멸망이 먼저 올지도 모른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8호 2016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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