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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NEWYORK] <억척어멈: 브레히트와 서사극> [No.149]

글 |여지현 사진제공 |Joan Marcus 2016-03-07 5,028

근시안적 비전이 남긴 아쉬움


지난 1월 19일 뉴욕 다운타운의 오프브로드웨이 극장 클래식 스테이지 컴퍼니(Classic Stage Company)에서 막이 오른 <억척어멈: 브레히트와 서사극(MOTHER COURAGE AND HER CHILDREN)>은 개막 전부터 기대를 모은 작품이다. 작품의 시대적·공간적 배경을 17세기 유럽에서 현재의 아프리카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프로덕션은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작곡가로 잘 알려진 던컨 쉭이 음악을 새로 써서 뮤지컬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





불멸의 고전 ‘억척어멈’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1941년 작품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Mother Courage and Her Children)」은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17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30년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전쟁 중에 세 아이를 모두 잃는 장사꾼 억척어멈의의 억척스러운 삶을 통해 전쟁의 비인간성을 그리는 이야기다. 우리나라에 억척이라고 번역된 ‘커리지(Courage)’는 냉소와 경멸이 섞인 ‘용기’에 더 가까운 표현인데, 극 중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 빵 50덩어리를 못 팔아 장사할 밑천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주인공이 리가(Riga) 지역의 포화를 뚫고 미친 여자처럼 달려서 생긴 별명이다. 다시 말해 머더 커리지(Mother Courage)라는 이름은 우리말의 번역대로 억척스러움을 그려내기도 하지만 전쟁이라는 비정한 현실 속에 목숨을 잃을 것보다 생계를 잃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용기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그녀의 가치관을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본 기사에서는 편의상 머더 커리지를 억척어멈으로 표기한다). 억척어멈은 강한 성격 때문에 많은 여배우들에게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캐릭터로 여겨져 왔는데, 브레히트의 부인이자 초연 캐스트인 헬렌 헤이글과 2006년 퍼블릭 시어터의 여름 야외 공연 시리즈 <셰익스피어 인 더 파크>를 통해 억척어멈을 연기한 메릴 스트립이 이 작품의 베스트 캐스트로 꼽히고 있다.


억척어멈이 빵을 못 팔게 될까 두려워 포화 속을 냅다 달렸다는 것, 전쟁 중에 자식을 다 잃고 결국 혼자 남아 또 다시 전쟁 속을 돌아다닌다는 이야기는 다소 극단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브레히트는 원작에서 ‘억척어멈’으로 불리긴 하지만, 실제 이름과 성에 역사적 배경과 특정 지역에 관련된 배경이 있는 등장인물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상황에 현실감을 주었고, 이러한 구체적인 설정은 결과적으로 작품이 특정 문화와 사람들을 뛰어넘어 보편적인 메시지를 갖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뜻밖의 하차 사건

지난해 12월 9일 프리뷰 공연을 개막해 한창 공연을 이어가던 12월 30일, <억척어멈: 브레히트와 서사극(이하 <억척어멈)>의 프로덕션은 주인공 토냐 핀킨스가 하차하기로 했다고 갑작스러운 소식을 전했다. 프로덕션의 발표에 따르면 토냐 핀킨스는 제작진과의 의견 불일치로 계약 만료 기간인 1월 4일 공연을 끝으로 하차하며, 이후 공연은 핀킨스를 대신해 키샤 루이스가 출연할 것이라고 했다. 사실 핀킨스나 루이스 둘 다 한국에 잘 알려지지는 않은 배우들인데, 루이스는 1985년 4년간의 공연 끝에 막을 내린 브로드웨이 초연 <드림걸즈>에서 마지막 에피로 사랑을 받았고, 핀킨스는 토니 쿠쉬너의 2004년 <캐롤라인 오어 체인지(Caroline, Or Change)에서 주인공인 캐롤라인 역할을 맡았던 베테랑 배우이다.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배우와 스태프 간의, 혹은 스태프와 스태프 간의 불화가 발생하는 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지만, 이번 사건에 유독 관심이 모이는 이유는 불화의 중심에 인종주의적인 논쟁이 있기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브레히트가 17세기 유럽을 배경으로 쓴 작품을 클래식 스테이지 컴퍼니의 예술감독 브라이언 큐릭이 각색과 연출을 맡으면서 작품의 배경을 현재의 콩고 공화국으로 바꿨는데, 그와 동시에 등장인물도 모두 백인에서 흑인으로 (당연히) 바뀌게 되었다. 핀킨스의 주장은 백인으로 구성된 창작진이 흑인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했으며, 거의 한 시간 가까운 분량의 대본을 잘라내면서 억척어멈이라는 인물의 입체성을 훼손했다는 것, 연출을 맡은 큐릭이 억척어멈을 현실 감각을 잃은 실성한(Delusional) 여자로 표현한 것은 자신이 이해한 인물과 너무 달라 이견을 좁히기 힘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흑인 여배우로서 정형적인 편견의 시선으로 보는 흑인 인물을 그리는 데 반대했지만, 그런 인종차별적인 구조에 따라 움직이는 연극계에서 자신의 의견이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것이 그녀가 작품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였다. 핀킨스에게 이 공연의 억척어멈은 그 절대적인 존재감이 너무 작았다. 핀킨스가 신문을 통해 자신의 결정을 설명하는 긴 성명서를 보내자 큐릭도 성명서를 통해 핀킨스와 타협점을 찾으려 최대한 노력했으나 결국 간극을 좁히지 못해 유감이라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게재했다. 큐릭의 질문은 한 가지였다. “현 시점에서 우리가 브레히트를 셰익스피어의 작품처럼 생각해서 아주 다양한 각색이 가능할 것인가.” 큐릭의 편지는 자신은 그러한 시도를 했지만, 핀킨스는 그러한 시도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말하는 듯 보였다. 1월 4일 핀킨스가 마지막 공연을 마치면, 새로운 억척어멈으로 뽑힌 키샤 루이스는 오프닝까지 2주 남짓한 기간에 대본을 숙지하고 이 작품에서 그린 억척어멈을 이해해야 했다.




콩고판 억척어멈

필자는 키샤 루이스의 이틀째 프리뷰 공연을 보았다. 원래 일정은 그 전주에 보는 것이었는데, 아직 대본 숙지 기간이 필요했던 루이스를 위해 프로덕션 측에서 공연을 며칠간 취소한 관계로 원래 샀던 티켓 날짜를 바꾸고 며칠 후에 보러 간 것이다. 공연 시작에 앞서 연출인 큐릭이 관객들 앞에 나와 그간의 사건들에 대해 언급하며 루이스가 아직 완전하게 준비되지는 않아서 대본을 조금 참고하면서 연기할 수 있으니 양해해 달라며 인사를 했다(실제 공연에서 루이스는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고 연기했다. 루이스의 연기 자체가 부족했던 것은 아니지만, 리딩이 아닌 정식 공연에서 혼자 대본을 들고 연기하는 모습이 어색했던 것은 사실이다).


무대는 클래식 시어터 스테이지가 선호하는 원 세트 삼면무대로 잎사귀 덩굴로 덮인 뒷면을 제외하고는 관객들이 무대 앞과 양옆에 앉았다. 무대 양옆에 마을회관 확성기처럼 생긴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었고, 브레히트의 서사극이 그러하듯 장마다 시작에 그 장의 기본 내용이 짧게 요약되어 전달됐다.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나 전달하는 내용의 음울함과 상관없이 한결같이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투로 들리는 스피커 속의 목소리는 늘 밝고 힘차서 오히려 오싹한 느낌을 주었다. 브레히트의 서사극 기법에 어울리게 전지적 시점의 해설자여서 더욱 효과적이었다. 또한 작품에서 억척어멈과 함께 하나의 등장인물과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억척어멈의 마차는 고장 난 군용 지프 트럭에 딸린 천막 차가 대신했다. 원작에서는 억척어멈이 죽은 말 대신 마차를 끌고 다니는 ‘억척스러운’ 모습이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는 말이 죽었다는 디테일은 대사를 통해 설명되긴 하지만 마차를 실제로 끄는 것은 제일 마지막에 한 번 고장 난 군용 지프트럭에 딸려 있는 천막 칸을 굵은 끈에 매고 끄는 것에 그친다(나중에 핀킨스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지만 이 마지막 장면에서 머더 커리지가 천막 칸을 모질게 끌고 가는 모습은 핀킨스가 연출과 싸워서 얻어낸 결과라고 했다).


셰익스피어를 들먹이며 시대와 상황에 맞는 변화에 초점을 맞추긴 했지만, 큐릭의 각색에서 기본적인 스토리가 달라진 것은 없었다. 억척어멈과 그녀의 세 자녀부터, 다른 부수적인 등장인물들까지, 브레히트 원작의 뼈대는 충실하게 따랐는데, 뼈대만 가지고 있다는 점이 바로 이 작품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연출이 한 시간가량 쳐낸 대본의 대부분 내용은 억척어멈과 아이들의 상황을 설명하는 장면이 포함된 인물 간의, 그리고 인물의 내적인 디테일이다. 본 공연에서는 콩고 공화국이라는 구체적인 배경은 제시됐지만, 언제 어디에서 어느 집단 간에 벌어지고 있는 내전인지에 대한 실질적인 디테일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배우의 입장에서는 억척어멈이라는 인물을 이해하고 표현하기가 어렵고, 관객의 입장에서는 인물의 구체적이고 복잡한 동기들이 사라진 채 흔히 알고 있는 억척어멈이라는 인물에 대한 일반적이고 단편적인 정보로 이해되거나 아니면 아이들과 자신의 목숨보다 돈이 중요한 인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일차원적인 인물이 되어 버렸다.




정체성이 모호한 음악

<억척어멈>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부분은 크지 않았는데 그보다 더 아쉬웠던 것은 던컨 쉭 음악의 정체성이 모호했다는 점이었다. 던컨 쉭의 음악은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길티 원스(Guilty Ones)’와 비슷한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노래도 있고, ‘퍼플 레인(Purple Rain)’처럼 멜로디가 강한 노래도 있다. 브레히트의 서사극에서 음악이 사용되는 방법이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에게 괴리감을 주어서 감정이 아닌 이성을 작동시키기 위함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그의 음악은 어느 정도 괴리감을 만들어내기는 한다. 배경음악이라든지 전주 없이 갑자기 노래가 시작하는 것도 그렇고, 전체적인 분위기와 별다른 관련성이 없는 음악들이 사용될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 전환점들이 일관성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배우들의 동선 처리가 애매했을 뿐 아니라 배우, 연출, 작곡가 또는 음악감독 그 누구도 음악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일관된 태도를 지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던컨 쉭이 <미국 연극>과 진행한 인터뷰에서도 드러났지만, 그가 현장에서 작업을 진행하지 않았다는 것이 패착이었는지, 아니면 키샤 루이스가 대본을 다 숙지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는지, 어느 이유였든지, 이 ‘음악극’의 음악은 감정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작품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억척어멈이 어떻게 세상과 타협하게 되었는지 설명해 주는 중요한 노래 ‘위대한 항복의 노래(The Song of Grand Capitulation)’는 노래 자체로는 그나마 던컨 쉭의 멜로디 자체에서 주는 불안정한 연속성과 맞물려 꽤 효과적이긴 했지만 그것마저도 통일감 없는 동선으로 효과가 반감되었다.



연출의 비전의 한계

다행히 앙상블은 그들의 몫을 톡톡히 해주었다. 군인 장교로 등장하는 제이콥 밍 트렌트는 뉴욕의 다운타운 작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얼굴로, 작년 퍼블릭 시어터에 올라갔던 수잔 로리 팍스의 연극 <아버지 전쟁에서 돌아오다(Father Comes Home from War)>에서 말하는 개 역을 맡아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이번에도 대사의 경중을 이해하는 딕션과 연기로 앙상블의 수장 같은 느낌으로 흡인력 강한 무대를 보였다. 그리고 억척어멈의 열여섯 살 벙어리 딸을 연기한 미리라이 싯홀 역시 표정과 몸짓으로 대사 천 마디 이상의 표현을 해주었다. 자칫하면 배경 인물에 그칠 수 있을 인물에 무게를 더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연출의 근시안적인 비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좋은 예가 될 것 같다. 20세기의 고전인 브레히트를 셰익스피어의 극처럼 각색해 보겠다는 포부는 좋았으나, 작품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함께할 배우, 그리고 관객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다. 결국 그의 각색과 연출은 통일성을 잃고 아마추어 극단이 내놓는 정극의 요약극에 그쳤다. 누군가는 이 상황의 더 큰 이슈는 그가 미국의 인종주의적인 사회구조와 시각에 경도되어 배우가 제시한 정당해 보이는 의견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백인 창작진을 대표한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개인적으로 이 의견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중요한 이슈를 논외로 하더라도, 창작자로서의 지향점과 그가 해낼 수 있는 현실 상황들의 괴리가 컸고, 그 괴리를 좁혀 나가지 못해서 이러한 비극이 벌어진 게 아닌가 싶다. 브레히트의 작품이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처럼 각색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지 좀 더 깊고 넓게 당시의 상황과 현재의 상황, 그리고 문화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과 사고가 필요할 뿐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9호 2016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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