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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PERSONA] <로기수>의 로기수 [No.151]

글 |안세영 사진 |양광수 2016-04-27 5,401

어둠을 뚫고 날아오른 소년


한국전쟁이 막을 내릴 무렵이었던 1952년, 거제 포로수용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17세 인민군 소년이 천재 탭댄서로 돌아왔습니다. 최근 미8군 부대와 동남아 순회 공연을 마치고 귀국한 탭댄서 로기수를 만났습니다.


*이 글은 로기수역 배우 이승원과의 대화를 토대로 한 가상 인터뷰입니다.




귀국 공연 잘 봤어요. 무대에서 말하는 걸 들으니 이제 남쪽 말도 꽤 익숙해진 것 같네요.
전향해서 남쪽에 산 지 5년 정도 됐으니까요. 북쪽 말을 쓰면 못 알아듣고 낯설어하는 사람이 많아서 일부러 빨리 익혔어요. 완벽하진 않지만 뭐, 이런 게 남쪽 말 아닌가…요?


음, 기사에는 제가 남쪽 말로 잘 옮겨드릴게요. 적십자단 환영 공연 이후 오랜만에 ‘평화의 댄스단’ 단원들과 한 무대에 섰는데, 어떻게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거예요?
그동안 행방은 계속 찾고 있었어요. 철식이가 많이 도와줬죠. 걔가 수용소에 있을 때부터 별명이 안테나였거든요. 수소문 끝에 결국 소식이 닿았고, 모처럼 다 모였으니 귀국 공연의 한 장면을 함께하기로 한 거예요. 복심이랑은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그래도 이렇게 만난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함께 춤추니까 옛날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아, 지금 제가 입은 옷이 적십자 무대에 섰을 때 입었던 거예요. 계속 갖고 있었는데 이젠 좀 끼네요.


많은 사람들이 기수 씨 과거를 궁금해해요. 포로가 되기 전에는 북에서도 부르주아 집안 출신이었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맞아요. 북에 넓은 농경지를 소유하고 있었거든요. 아바이가 일찍 돌아가시긴 했지만 땅이 있으니까 소작농을 부려서 어렵지 않게 살림을 유지할 수 있었어요. 그때는 저도 오마니 무릎에 누워서 한가롭게 새총이나 만지작대는 어린애였죠. 제가 느끼기에는 성도 오마니 밑에서 큰 걱정 없이 살았던 것 같아요. 전쟁 전에는 그렇게까지 어른스럽고 강한 사람인 줄 몰랐거든요. 아마 성 자신도 모르지 않았을까요. 전쟁이 터지면서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아바이가 돌아가신 후 계속 마음속에 품고 있던 책임감이 발동됐나 봐요. 그러다 오마니가 돌아가시자 저에 대한 책임감이 극단적으로 커졌고요.


해방동맹의 리학구 총좌가 삼촌을 반동으로 몰아 죽이게 한 것도 부르주아 출신인 것과 관련이 있겠네요.
네, 부르주아는 공산주의를 배반하는 존재니까요. 본보기로 삼기 위해 부르주아 출신인 저희 형제에게 집안의 어른인 삼촌을 죽이게 한 거죠.


아버지처럼 따르던 형이 삼촌을 죽이는 모습을 봤을 때 충격이 컸겠어요.

그날의 기억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피예요. 칼에 찔린 삼촌 배에서 튀는 피, 성의 손에 묻은 피…. 물론 전쟁 중이니 사람이 죽는 걸 처음 본 건 아니었어요. 제 손으로 총을 쏜 적도 있는걸요. 하지만 총소리가 난무하고 흙먼지가 날리는 상황에서 그저 살려는 본능으로 쐈을 뿐, 누굴 죽인다는 인식조차 없었죠. 그런데 눈앞에서 삼촌이 피를 흘리며 죽는 모습을 보니…. 사실 저한텐 삼촌도 아바이나 마찬가지였거든요. 기진 성이 집에서 아바이 역할을 했다면, 대외적으로 어른이 해야 할 일은 삼촌이 챙겨줬으니까요. 어쩌면 저보다 기진 성한테 더 아바이 같았을지도 모르죠. 그런 성이 삼촌을 죽이는 걸 본 순간, 인생이 달라졌어요. 그때까지 오마니가 돌아가신 충격을 성이 메워주고 있었는데, 성이 삼촌을 죽이면서 모든 가족의 끈이 끊어졌죠.


그런 일을 겪었는데 해방동맹에 대한 반감이 생기진 않던가요?
그런 질문 많이 받아요. 왜 자유 진영으로 가지 않고 친공 포로가 모인 76막사에 남아있었냐고. 하지만 그건 전쟁이 끝나고 수용소를 나온 지금이니까 할 수 있는 생각이죠. 당시처럼 언제 죽고 살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멀리 내다볼 수가 없어요. 자유 진영으로 간다는 생각 자체가 불가능하죠. 전쟁 통에 강압적인 집단 속에 있으면서 리학구 한마디에 사람이 죽고 사는 걸 봐왔으니, 다른 살 길이 있다는 생각은 아예 못한 거예요. 일종의 종교였던 셈이죠.



수용소 안에서는 어떻게 지냈어요?
유령처럼. 뭐 웃을 일이 하나라도 있어야죠. 돌아갈 집도 없고, 다시 만날 엄마도 없고, 성은 변했고,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겠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그냥 무기력하게 살았어요. 탭을 만나기 전까지는.


프랜은 당신이 술에 취해 미군 클럽에 들어왔을 때, 자기를 따라 발을 움직이는 걸 보고 이미 재능을 알아봤다고 하던데요.
제가요? 기억이 안 나는데.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요. 제정신이었다면 절대 미군과 어울리지 않았을 텐데. 술기운도 있고 시끄러운 곳에서 수십 명에게 이리저리 치이다 보니 넋이 나갔었나 봐요. 아니면 제 피에 자동적으로 탭에 반응하는 뭔가가 있었거나.


어쨌든 그 사건을 계기로 수용소장 돗드가 적십자 무대에 설 댄스단을 만들었잖아요. 당신이 반발하자 프랜이 제안했다면서요. 일주일만에 자기 스텝을 따라잡으면 댄스단을 나가도 좋다고. 탭에 빠진 건 그 일주일 사이였나요?

솔직히 프랜이 제 앞에서 탭을 보여줬을 때 이미 느꼈어요. 피가 뜨끈뜨끈해지는 걸. 근데 머리에선 안 된다고 신호를 보내는 거죠. 양코배기들 춤을 추라고? 말도 안 돼. 딱 일주일만 배우고 때려치우자! 그래서 일주일 내내 마음이 복잡했어요. 춤을 추면서도 이게 좋은 건지 싫은 건지 혼란스럽고, 마냥 즐길 수 없었던 거죠. 결국 내기에서 이겨 딴스를 관둘 수 있게 됐지만, 막상 멈추려니 멈출 수가 없더라고요. 그때 확실히 알았어요. 딴스가 좋다!


그런데 애당초 당신이 클럽에 들어간 건 노래하는 복심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나요? 댄스단에서 복심을 다시 만났을 때, 왜 바로 스카프를 돌려주지 않았어요?
마후라를 못 돌려준 건… 사실 못 줬다기보다 줄 마음이 없었어요. 거기 그 아이 향기가  남아 있잖아요. 같이 있을 땐 말도 못 붙이다가 혼자 있을 때 괜히 마후라 한번 꺼내보고 집어넣고 뭐 그런… 아니, 잠깐. 이 얘긴 넘어가죠.


그럼 나중에는 왜 돌려준 거예요?
그땐 딴스를 그만두려고 했으니까요. 딴스단 하는 게 알려지면 해방동맹이 어떻게 나올지 두려웠거든요. 이제 안녕이라고 생각하고 마후라를 줬는데, 복심이가 자기 오마니 얘기를 하면서 꿈을 버리지 말라고 하더군요. 복심이의 당부가 없었다면 정말 그만뒀을 거예요.


결국 리학구에게 댄스단 활동을 들키고, 형의 안위를 약속하는 대신 무대에서 돗드를 쏘라는 말을 들었을 땐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건 거부할 수 없는 교주의 명령이기 때문에 안 할 수 없을까란 생각은 안 들었어요. 총을 쏘고 나는 죽겠구나. 그런데 희한하게 죽는다는 사실이 두렵기보다, 그냥 그 순간 제 인생이 되게 아쉬운 거 있잖아요. 살면서 이제야 뭔가 뜨거운 걸 만났는데 이렇게 끝이 나는구나. 사실 전쟁 중에 상대 진영에 포로로 잡혀 왔는데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늘 하고 살았어요. 그래서 막상 죽음이 닥쳤을 땐 올 게 왔다는 생각이었죠. 다만 왜 하필 지금? 이제야 좀 사는 게 재미있는데.


형과는 어떻게 헤어졌나요?
싸웠어요. 성이 무대에 서지 말라며 ‘내가 왜 인간 백정 소리까지 들어가며 산 것 같냐’고 소리쳐서 ‘나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네?’하고 대들었죠.



정말 몰라서 물은 거예요?
아뇨. 알아요, 성이 얼마나 날 챙기려고 했는지. 삼촌을 죽인 것도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알아요. 알지만 그냥 받아들이기 싫었어요. 착했던 성이 변한 게 싫고, 그게 나 때문인 것도 싫고. 그러다 이제 내가 성을 위해 죽게 됐는데, 그걸 알아달라고 하느니 그냥 못된 동생으로 남고 싶더라고요. 쓸모없는 동생은 잊고 형을 위해 살라고… 그래서 일부러 상처 주는 말을 한 거죠.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어요. 나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네? ‘나 때문인 거 알아!’ 그러니까 이제 성을 위해 살아. 제발.


총을 쏘면 다른 단원들도 위험해질지 모른다는 걱정은 안 했나요?
적십자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 저희는 이미 해방동맹의 위협을 받고 있었어요. 5개 대대가 공연장을 지키고 있다 해도, 거길 벗어나면 어찌될지 모르는 운명이었죠. 그래서 복면을 쓴 거예요. 저야 복면을 쓰든 말든 죽겠지만. 그런데 제가 복면을 벗고 이름을 말하니까 다들 따라하더라고요. 어휴, 내가 총을 쏘면 수용소 상황이 급변하고 이들은 더 위험해질지 모르는데. 하지만 총을 안 쏠 수는 없었어요. 성이 걸려있으니까.


하지만 총은 비어있었죠. 대체 그 총알은 언제 사라진 거예요?
저도 석방된 뒤에야 알았어요. 해방동맹이 딴스단을 잡으러 왔을 때 철식이가 제가 도망가는 걸 도와주다 붙잡혔거든요. 저는 그때 철식이가 죽은 줄 알았죠. 그리고 총을 들고 다니다가는 검문에 걸릴 것 같아서 미군 보급 창고에 숨겼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성이 철식이를 살려줬고, 총좌의 말을 엿들은 철식이가 성의 부탁으로 그날 밤 몰래 창고에 들어가 총알을 빼놓았대요. 제가 만날 거기 가있는 걸 아니까 총도 거기 뒀을 거라고 짐작한 거죠.


그 뒤에 댄스단은 어떻게 됐나요?
한바탕 폭풍이 몰아쳤죠. 저는 검거됐고, 다른 단원들도 조사를 받았어요. 어쨌든 빈 총이었기 때문에 큰 처벌을 받지는 않았어요. 저는 수감됐지만 단원들은 곧 수용소로 돌아갔죠. 듣자하니 우리가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쓰던 미군들이 그 일로 좀 신경을 쓰게 됐나 봐요. 자기들 안전을 위해서라도 해방동맹을 저대로 놔두면 안 되겠다 싶었겠죠. 사상 대립으로 인한 유혈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확실한 제재를 가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단원들은 오히려 안전했어요. 그러다가 1953년 정전협정과 함께 수용소는 폐쇄되고, 저도 석방됐어요. 원래 수감 기간은 더 길었는데 정전협정을 한 만큼 정치적으로 성과를 보여줘야 하니까 사상범을 석방시켜준 것 같아요. 이후엔 보시다시피 형의 유지를 받들어 탭에 매진했고요.


석방 전에도 기진 형의 죽음을 알고 있었나요?
몰랐어요. 전 반대로 생각했거든요. 철식이가 죽고 성은 살아있겠지 한 거죠. 내내 철식이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는데, 석방 날 철식이가 찾아온 거예요. 그 순간 너무 행복했어요. 아! 철식이도 살고 성도 살았구나! 하지만 아니었던 거죠. 철식이는 살고 성이 죽었던 거예요. 처음에 철식이가 상자를 건넸을 땐, 형의 옷이 들어있을 줄 알았어요. 상상도 못했죠. 그렇게 나를 말리던 성이 수텐레스를 녹여 탭 슈즈를 만들어줬을 거라곤. 그걸 보는 순간 가슴이 무너졌어요. 내가 성을 살리려고 했는데 결국 성이 날 살린 거잖아요. 끝까지 날 위해서 살다가 죽은 거잖아요. 앞으로 성을 위해 살라고 말했는데…. 너무 미안해요. 너무 고맙고.


지금 신고 있는 게 형이 준 신발인가요?
네. 이걸 신고 춤추면 성이 어디선가 날 보고 있을 것 같아요. 보고 있다면 전해 주고 싶네요. 보이디? 나 잘 살고 있으니까 이제 걱정 말라!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1호 2016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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