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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LONDON] <타이타닉> [No.155]

글 |조연경 런던통신원 사진제공 |Simon Annand 2016-08-11 8,263

평범해서 더 가까운 비극의 무게

<타이타닉>




로맨스 없는 타이타닉


1997년에 개봉한 케이트 윈슬렛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 <타이타닉>은 영화사를 새로 썼다. 20세기 최악의 해상 사고라는 실제 사건에 세기의 로맨스라는 허구를 덧입혀 만들어낸 이 역사적인 영화는 각종 기록을 갈아치웠고, 두 주연 배우를 최고의 스타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세상에 공개되기 전에 뮤지컬이 먼저 탄생했다. 같은 사건을 소재로 했지만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엮은 뮤지컬 <타이타닉>은 1997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됐고 그해 토니상에서 최고 작품상을 포함해 대본, 음악 등 총 5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브로드웨이 공연 이후 네덜란드, 독일, 캐나다,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공연된 이 작품은 2013년에 처음으로 런던에 입성해 호평을 받았고 올해 돌아와 재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영화는 상류층인 로즈와 평범한 잭의 로맨스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 영화는 ‘절대 침몰하지 않는 배’라던 타이타닉이 그날 밤 어떻게 빙하와 충돌했고 어떤 과정을 통해 가라앉게 됐는지 스크린에 선명하게 재현했고, 그 위용은 지금까지도 회자될 만한 명장면으로 남았다. 하지만 때로는 타이타닉 호의 비극이 로맨스의 배경으로만 이용된 것처럼 느껴질 만큼, 영화는 로즈와 잭의 계층을 뛰어넘은 사랑에 더 주목한다. 반면 뮤지컬 <타이타닉>에는 중심인물의 로맨스가 존재하지 않는다. 뮤지컬의 가사와 음악을 맡은 모리 예스톤과 극작을 맡은 피터 스톤은 영국에서 출항한 타이타닉 호에서 나흘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일들에 주목했고, 그 비극적인 사건에 담겨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과 극한의 감정이 음악과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뮤지컬의 가능성을 읽어냈다. 대극장에서 공연된 브로드웨이 초연 때와 달리 아담한 무대에 오른 런던 버전의 뮤지컬 <타이타닉>은 톰 선덜랜드의 연출을 통해 규모는 작지만 객석에 더 친밀하게 다가가 관객들의 마음을 묵직하게 누르는 작품으로 부활했다.


<타이타닉>은 어느 날 갑자기 비극적인 사건에 휘말린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다. 출항하던 날 거대한 배를 보고 들떠 있던 사람들은 미국에서 펼쳐질 새 삶을 향한 기대에 부풀어 있다. 이 뮤지컬은 계층과 직업이 다양한 인물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조금씩 비추며 ‘타이타닉 호’를 여러 관점에서 관찰한다. 배의 설계자와 선주는 자기 자식 같은 선박을 뿌듯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선장은 명예로운 은퇴를 꿈꾸며, 선원들과 승무원들은 타이타닉의 첫 항해에 들떠 있다. 1등석 승객들은 화려한 삶이 미국에서도 이어질 거라 기대하고, 2등석 승객들은 그들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며 미국에서 얻을 더 큰 부를 꿈꾼다. 거기에 아메리칸드림을 품고 배에 오른 3등석 승객들과 증기기관 인부들까지 이 뮤지컬은 각양각색의 사연을 품고 배에 오른 사람들을 놓치지 않고 찬찬히 조명한다. 말하자면 이 작품의 주인공은 누구보다 빛나는 사연을 지닌 어느 특정 인물이 아니라 ‘타이타닉 호’, 그 자체다.




다큐처럼 충실한 재현


비극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는 결말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모르는 작중 인물이 극 초반에 환하게 웃으며 미래를 꿈꾸는 장면을 보면 마음이 저려오고 어떻게 해도 피하지 못할 운명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불안한 마음만 커진다. <타이타닉>

역시 매우 희망찬 목소리로 이야기의 문을 연다. 그게 후반의 비극을 극대화하려는 극적 장치가 아니라 실제 사실에 가깝기 때문에 더 안타깝다. 이제껏 건조되었던 어떤 배보다도 크고 빠른 최고의 배를 눈앞에 뒀으니 사람들이 놀라고 감탄하는 건 당연하다. 설계자, 선원, 승무원, 승객을 막론하고 모두 입을 모아 찬사를 보내고, 그 배에 탈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모습이 매우 밝고 즐겁게 보이지만 결국 결말을 아는 관객들에게는 그 기쁨마저 비극일 수밖에 없다.


<타이타닉>은 실화를 고스란히 전하는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질 만큼 출항하는 시점부터 일지를 쓰듯 꼼꼼하게 실제 사실을 반영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작중 등장하는 사람 대부분은 실존 인물이거나 혹은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이름만 바꾸어 살을 붙인 인물들이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알려져 있는 ‘타이타닉 호’에 대한 사실을 최대한 왜곡 없이 극에 녹여내서 별다른 극적 장치 없이도 진정성 있게 그렸다. 실제 ‘타이타닉’ 이야기가 여느 창작물에 버금가는 극적인 사연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타이타닉 호는 당시 꽃을 피웠던 기술문명의 정점에 서 있었다. 역사상 가장 크고 빠른 배였기 때문에 모든 선망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더구나 영국에서 출발해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향하는 첫 항해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영국 사회를 엄격하게 구분한 사회 계층 제도는 타이타닉 호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1등석, 2등석, 3등석 사이에 어마어마한 가격의 차등이 있었다. 객실의 종류는 물론, 제공되는 서비스도 전혀 달랐고 구역도 명확히 나눠 자유롭게 오가지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계층에 상관없이 공통적이었던 건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미래를 고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배가 출항한 후 순조로운 항해가 이어지는 동안 승객들의 사연이 소개된다. 미국에서 꾸려 나갈 새 삶에 대해 이야기하며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의 소소한 일화가 1막을 촘촘히 수놓고 있다. 사업을 확장하려는 꿈, 사랑의 도피 끝에 결혼하려는 꿈, 그리고 영국의 가난한 생활을 청산하고 자유로운 미국에서 새 출발하려는 꿈 등, 출신지와 계층이 다른 사람들이지만 모두 희망찬 미래를 그리고 있다. 선장은 자신의 마지막 항해가 될 타이타닉 호의 첫 항해를 끝으로 은퇴를 그렸고, 그런 선장을 존경하는 1등 항해사는 자신이 선장이 되어 승객들의 목숨을 책임질 날을 꿈꾼다. 돈을 벌기 위해 증기기관의 인부로 승선한 남자는 곧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약혼자와 결혼할 꿈을 꾼다.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평탄하게 살아가자고 약속하는 금슬 좋은 노부부도 있고, 2등석 탑승권으로 배에 올랐지만 1등석 승객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 아내를 다독이는 남편도 있다. 자신의 직업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전보 송신원도 있고, 승객들과 말동무가 되어주며 배의 서비스를 책임지는 승무원도 있다.



선주가 배의 속도를 높이자고 선장을 독려했던 것은 하루라도 빨리 뉴욕에 도착해 세계를 놀라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설계자의 설계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사연들이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의 무게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전보 송신원과 선장이 망루의 빙하 목격 보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때마다 불길함이 드리워 오다가 결국 뒤늦게 발견한 빙하를 피하지 못하고 부딪히는 비극의 순간까지는 폭풍 전야의 평화가 이어졌다. 타이타닉이 침몰할 거라곤 상상도 못한 승객들은 충돌 이후에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다가 선원들의 인도에 따라 구명보트에 탑승한다.


실제 있었던 사실을 꼼꼼하게 반영했고, 그들의 사연이나 모습이 지금의 우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타이타닉>은 더욱 현실적이다. 이 공연이 더 무겁게 느껴지는 건 그 배에 타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꿈을 꾸었는지, 그들이 얼마나 평범했는지 차분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구나 타이타닉 호가 영국에서 출항한 만큼 영국 관객들에겐 의미가 더 특별했을 것이다.


공연 말미, 사망자 명단이 쓰인 현수막이 드리워져 선체가 있던 무대를 가렸다. 그리고 당시 사망자에 대한 짤막한 정보를 내레이션으로 들려줬다. 공연이 다 끝나고 객석에 불이 켜진 후에도 작은 글씨로 빽빽이 기록된 명단을 오래도록 바라보던 관객들이 많았다. <타이타닉>에는 영화 같은 사랑 이야기도 없고 화려한 특수 효과나 거대한 무대 장치도 없지만 실화에 기반을 둔 이야기가 주는 무게감은 남달랐다. 이야기를 그렇게 풀어내는 방식에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벌어진 실제 사건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는 창작진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리로 그려내는 상상력


<타이타닉>을 공연하는 런던의 차링크로스 극장은 300석이 채 안 되는 규모의 오프웨스트엔드 극장으로 무대도 작은 편이다. 브로드웨이에서는 대극장에서 공연됐고 그 규모에 어울리는 볼거리를 선사하는 작품이었을지 몰라도 런던에서는 2013년 초연 때부터 중·소규모의 극장을 택해 작은 무대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2층 구조의 갑판이 무대를 가득 채우고 있고 책상이나 사다리 같은 도구를 활용해 공간을 갑판에서 선장실로, 전보실로 또 식당이나 전망대로 자유롭게 활용했다. 1막에서는 이렇게 배 위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줬지만 빙하와 충돌한 이후 상황을 보여주는 2막에서는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특히 침몰이 가까워질 때 밧줄을 이용해 구명보트를 내리는 장면을 표현하고, 무대의 2층 부분 전체를 배우들이 밧줄로 기울이는 동시에 매달리는 모습을 연기하면서 타이타닉의 선미가 들리던 장면을 재현해 낸다. 무대 전체가 선체로 활용됐으니 객석은 자연스럽게 구명보트가 떠 있어야 할 밤바다가 되었다. 구명보트에 탄 승객들은 객석 사이사이 통로에 서서 기울어진 무대를 바라봤다.


<타이타닉>의 무대를 더 극적으로 표현한 건 조명과 음향의 힘이었다. 무대가 기울어지는 동안, 빙하가 갈라지는 소리와 나무로 된 선박이 삐걱대는 소리가 실감 나게 극장 안을 채웠다. 어두운 객석이 고요한 밤바다처럼 무대를 에워싸고 있었고, 무대마저 점점 어두워지면서 배우들의 연기가 더해지자 정적인 무대가 순식간에 영화 못지않게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재난 현장으로 변했다. 배우들이 자극적으로 연기하지 않고, 점점 억누르고 절제해서 표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마침내 무대와 객석이 전부 어두워지고 정적이 흐르자 어느새 재현된 사건의 비극이 묵직하게 공연장을 짓눌렀고, 배우들의 내레이션이 나지막하게 흘렀다. 굳이 드러내놓고 다 보여주지 않아도 관객들이 상상하고 느껴 이해할 수 있도록 소리와 조명으로 표현한 <타이타닉> 속 침몰은 절제된 연출력이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객석과 무대의 거리가 가깝고, 극장 공간이 광대하지 않기 때문에 더 무거운 공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타이타닉>은 그 후에 나온 동명의 영화가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는 바람에 그보다 앞서 만들어졌음에도 그 그림자에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수년이 지나서 대서양을 건너 뒤늦게 오른 런던 무대에서 이 작품은 영화와 다른 자기만의 스토리텔링으로 관객들에게 인정받았다. 중심인물이 없어서 이야기가 집중되지 못하고, 웅장하게 이어지는 넘버들 중에서도 클라이맥스를 보여주는 넘버가 없기 때문에 관객의 기억 속에 오래 남지 못하고 이번 런던 공연이 끝난 후엔 당분간 다시 공연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근 연장 공연을 결정했을 만큼 <타이타닉>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힘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누군가에겐 옛날 영화가 되어버린 <타이타닉>에 대한 향수를 안고 찾아올 관객까지 끌어안은 이 뮤지컬은 또 언젠가 돌아와 관객들에게 묵직한 울림을 전할 것 같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5호 2016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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