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버릴 내일을 향해
<곤 투모로우>는 조선 말 한국 근대화의 혁명가였던 김옥균과 그를 암살하는 홍종우, 비운의 왕 고종의 이야기를 그린다. 뮤지컬은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발휘해 국운이 다한 격변의 시대를 살다 간 풍운아들의 비극적인 운명에 초점을 맞출 예정. 역사 누아르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는 가운데, 남자들의 의리 이상의 무엇을 보여줘야 하는 김옥균과 홍종우 역에 오랜 시간을 나눠온 강필석과 김재범이 나란히 캐스팅돼 기대를 높인다.
믿을 수 있는 사이라는 것
두 분의 인연은 오래전 한예종 연극원에서 시작됐죠?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사이답게 서로 공유하고 있는 기억이 있나요?
김재범 제가 기억하는 형은 잘 웃고, 조용하고, 운동하는 거 좋아하고…. 아직 기억나는데, 산적이라는 무술 동아리 활동을 무척 열심히 하셨어요. 아침마다 빈 강의실에서 혼자 매트 깔고 애크러배틱을 하곤 하셨죠. 아니면 장구를 치고 있거나.
강필석 왜냐면 산적이 회원수는 많았는데, 다들 회식 때만 나타났거든요. 특히 첫 수업 전 아침 7시에 운동하기로 정하고 나서는 겨우 연명해 가는 동아리가 됐죠. 저는 두목을 맡고 있어서 매일 나갔는데, 혼자서 무슨 운동을 하겠어요. 혼자 장구나 치고 있다 보면 한두 명씩 오기 시작하고, 몇 사람 모이면 “밥이나 먹자!” 하고 밥 먹으러 가고. 근데 재범아, 생각해 보니 우리가 이렇다 할 학창 시절 추억이 없다. 친분은 진짜 있는데. (웃음) 사실 한 학번 차이라 같이 학교를 다닌 기간이 1년 밖에 안 돼요. 서로 엇갈리게 군대를 가느라. 오히려 졸업하고 밖에 나와서 친해졌죠.
김재범 형, 정말이요? (일동 웃음)
오랜 인연에 비해 작품 인연은 없었더군요. 재작년에 <쓰릴 미>로 드디어 한 무대에 서게 됐을 때 어땠어요?
강필석 서로 마주 보고 연기하는 게 이렇게까지 웃길 줄 몰랐어요. 연습 때 하도 웃느라 진도를 못 나갔어요.
김재범 도대체가 웃음을 참질 않더라고요. 조금만 웃겨도 그냥 막 웃어버려요. 근데 저도 웃고 있어서 뭐라 할 수가 없는? (웃음)
강필석 개인적으론 이게 정말 큰 변화인 게, 예전에는 연습 때조차 공연하는 것처럼 진지했어요. 사실 못 웃었던 것 같아요. 난 지금 이 타이밍에 내가 생각한 이걸 꼭 해야 해, 하는 혼자만의 생각이 너무 강해서 다른 건 눈에 안 들어왔거든요. 연습 중에 다 같이 웃음이 터져도 저 혼자만 심각했죠. 적당한 긴장과 이완 사이를 유지하는 게 좋은 듯한데, 재범이랑 같이 작품을 하면 너무 이완돼 버려서 문제예요. 만약 재범이랑 코미디를 하면 전 웃다 죽을지도 몰라요.
친밀한 상대와 친분이 없는 상대, 어느 쪽이 더 연기하기 편해요?
김재범 각각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작품에 따라 다르고, 또 작품 안에서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 캐릭터를 연기하느냐에 따라 다르고. 형은 같이 코미디를 하면 힘들 거라 했지만, 저는 반대로 진지한 작품을 같이하는 게 더 어렵게 느껴져요. 내가 너무 잘 아는 사람이 눈앞에서 눈빛을 이글거리면서 전혀 다른 사람처럼 군다고 생각해 보세요. 특히 학교 동기이자 절친인 (최)재웅이랑 작품할 때는 눈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어요. ‘얘가 지금 내 앞에서 연기를 하네?’ 너무 웃긴 거죠. 그런데 시간을 함께 나눈 사이에서 나오는 친밀감은 무시할 수 없어서 그 영향 탓인지 너무 어색한 사이면 연기하는 게 편하지는 않더라고요.
강필석 반대로, 사석에서는 편한 사이였는데 무대에서 불편해지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럼 작품이 끝나고 나서 개인적으로도 어색해지죠.
김재범 형, 저는 그런 사람 없는데요? (일동 웃음) 저는 최대한 상대 배우를 그가 맡은 캐릭터 자체로 믿으려는 경향이 있어요. 무슨 얘기냐면, 제 캐릭터에 대해 고민하다 보면 자연스레 상대 캐릭터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거든요. 그럼 ‘저 사람은 왜 이걸 저렇게 표현하지?’ 하고 상대를 답답해하는 경우가 생긴단 말이죠.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인 거잖아요? 어느 순간엔가 문득 저 사람은 자기 역할에 대해 나보다 열 배 더 고민했을 텐데, 과연 내 생각이 맞다고 할 수 있을까 싶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엔 그냥 그 배우를 캐릭터로 받아들여요. 예를 들어 상대 배우가 화술이 안 좋으면, 저 캐릭터 자체가 말을 잘 못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무대에서 배우 대 배우로 부딪쳐 보니 서로에 대해 새로 알게 된 게 있어요?
강필석 실제 작업해 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유연한 배우라는 것. 재범이는 정해진 큰 규칙 안에서 그날의 호흡에 따라 연기하더라고요. 그럼 저도 거기에 영향 받아 그에 맞게 움직이게 되고, 매일 공연이 미묘하게 달랐어요. 사실 십 대 남자애 둘이 주인공인 <쓰릴 미>를 삼십 대 후반에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웃음) 자칫 잘못하면 놀림감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재범이 덕분에 재미있게 잘 끝냈죠.
김재범 공연하면서 형한테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였어요. 그럼 저는 신 나서 “정말요? 저 오늘은 여기 이렇게 해도 돼요? 진짜?” 그러고. (웃음) 저는 그런 거 되게 좋아하거든요. 하고 싶은 대로 연기하는 거. 좋게 표현하면, 유연한 건데 그런 연기 스타일을 별로 안 좋아하는 배우들도 많아요. 어쨌든 자기 입장에선 감정에 방해가 될 수도 있는 거고, 당황스러울 수 있잖아요. 가뜩이나 형은 저한테 반듯한 이미지라, 연기도 반듯하게, 사전에 연습한 대로 정확하게 하는 걸 좋아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뭐든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이었어요. 재밌었죠.
무대에서 상대 배우가 나를 자극해 주는 게 좋아요? 가령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배우와 연기할 때 더 재미를 느낀다거나.
강필석 이것도 많이 변한 부분인데, 옛날엔 정확하게 재단해서 연기하려고 했어요. 혼자 연습도 정말 많이 하고. 근데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연기하는 게 즐겁지 않더라고요. 2009년쯤엔가, <쓰릴 미>를 두 번째 하고 있을 때 무대에 서는 게 재밌지도 않고, 흥분되지도 않고, 뭐가 문제일까. 소위 말하는 매너리즘에 빠졌죠. 그러다 우연히 연극 <레드>의 오리지널 연출가의 인터뷰를 보게 됐는데, 대답 중에 이런 말이 있는 거예요. 무대에는 항상 불안함이 존재해야 하고, 배우들은 그걸 즐겨야 한다고. 관객들은 안정적인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 들었어요. 생각해 보니 저는 무대를 안정적으로 만들려고 했던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제 자신이 힘드니까. 그때부터 열린 자세로 작품에 임하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사람은 쉽게 안 변하잖아요? (웃음) 머리론 그러자고 생각해도 정해진 틀을 깨는 게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아마 그런 걸 잘하는 재범이한테 일부러라도 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던 것 같아요. 아무리 마음대로 한다 해도 아예 엉뚱한 걸 하진 않으니까.
결국 연기란 것도 서로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겠네요.
김재범 신뢰는 정말 중요해요. 연기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사적으로 친한지, 안 친한지의 문제가 아니라 배우로서 서로 믿음을 갖고 있느냐인 것 같거든요. 갑자기 생각났는데, 학교 즉흥 연기 수업 시간에 눈 가리고 달리기 같은 걸 했어요. 옆에서 동기들이 잡아줄 거니까 걱정 말고 달리라면서. 처음엔 당연히 쉽게 못 뛰죠. 그땐 뭐지, 왜 이런 수업을 하지 싶었는데,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믿음을 위해 그랬던 것 같기도 해요. 진짜 그런 의도였는지 모르겠지만.
강필석 뭘 해도 받아줄 거라는 믿음. 이건 정말 중요하죠. 서로 믿음이 있어야 연습실에서도 마음 편히 뭔가를 시도해 볼 수 있고, 깊이 파고들수록 더 좋은 무언가가 나올 테니까요.
무대 위의 두 번째 만남
지금까지 모두 세 작품을 함께했는데, 상대역으로 나오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예요. <곤 투모로우>는 어떤 점에 끌렸어요?
강필석 일단 대본이 재밌었어요. 워크숍 공연이 좋았다는 얘기도 들었고. 저희 작품 바탕이 오태석 선생님의 희곡인데, 원작에서 민족주의적인 이야기를 많이 덜어내고 호기로운 사내들 이야기로 각색됐어요. 이지나 연출님이 누아르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거라고 하셔서 기대가 됐죠.
김재범 저도 소재 자체에 흥미를 느꼈어요. 혁명에 실패한 남자와 그의 사상에 매료되는 남자의 이야기가 재밌을 것 같더라고요.
이번에 맡은 김옥균과 홍종우는 흔히 말하는 적역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 않나 싶어요.
강필석 글쎄요, 김옥균이 딱히 저하고 안 맞는 역할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오히려 얼마 전에 했던 연극 <지구를 지켜라>의 강만식이 정말 안 어울리겠다 싶은 역할이었죠. 제 자신을 내려놓고 제대로 망가져야 하는 캐릭터였으니까. 그땐 주위에서도 다들 “응?” 이런 반응을 보였는데, 결과적으론 하길 잘했죠.
김재범 저한테 홍종우는 새로운 캐릭터긴 해요. 지금까지 했던 캐릭터들과는 다른 결의 인물이라. 특히 암살자라는 이미지가 저와는 좀 안 맞는 거 같고.
강필석 왜 프로필 사진 잘 나왔는데, 암살자처럼.
김재범 형, 좀 가만히 계세요. (일동 웃음) 아무래도 암살자라고 하면 흔히 마초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잖아요. 물론 암살자를 연기하는 모든 배우가 남성적일 필요는 없지만, 외형적인 느낌이 캐릭터를 완성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기도 하거든요. 게다가 하필 가만히 있어도 남자다운 분위기를 풍기는 (김)무열이하고 (이)율이랑 트리플 캐스팅이 돼서…. 어쩔 수 없죠. 외모에 기댈 수 없을 때는 특별히 더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관객들이 저를 암살자라고 믿도록 두 배, 세 배 노력할 테니 선입견 없이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지금 가장 고민하는 부분은 뭐예요?
강필석 얼마 전에 영화 <덕혜옹주>를 보면서 저희 작품 생각이 계속 났어요. 역사 왜곡 논란과는 별개로,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독립운동가들이 정말 얼마나 억울했을까 하는 마음이 피부로 와 닿았거든요. 김옥균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갈리지만,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얼마나 분했을까, 새로운 나라를 꿈꿨던 김옥균에게 갑신정변은 꼭 해야 했던 일을 한 거였겠구나 싶더라고요. 이 부분을 놓치지 않으려고요.
김재범 저는 처음 대본을 다 읽었을 때 머릿속에 딱 떠올랐던 게, 드라마 <선덕여왕>의 비담이에요. 나라 일에 관심 없던 비담이 점점 권력에 눈을 뜨면서 변해 가는 게 홍종우하고 비슷하게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대본 수정 방향이 비담과는 거리가 멀어져서 캐릭터를 다시 고민하고 있어요. 여기서 꼭 하나 미리 말씀드리고 싶은 건, 저희 작품의 홍종우는 실존 인물과는 무관한 허구의 캐릭터예요. 실제 홍종우는 김옥균과 대립된 사상을 가지고 그를 암살하는데, 저희가 그리는 홍종우는 김옥균을 동경해서 어쩔 수 없이 암살한 후에 그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고자 하거든요. 역사적 실화를 바탕으로 새로 지어낸 이야기인 셈이죠.
<곤 투모로우>의 주인공들은 나라를 바꾸겠다는 큰 꿈을 품잖아요. 지금까지 가져본 가장 큰 꿈은 뭔가요?
강필석 오랫동안 무대에 서는 거죠. 얼마 전에 선생님들이 출연하시는 <햄릿>을 보고 왔는데, 그렇게 감동적일 수가 없었어요. 평균 연령이 칠십에 가까운 분들이 다들 얼마나 멋지시던지. 대단한 야망을 품을 나이는 지났지만, 저렇게 멋있게 무대에서 나이 먹고 싶다는 꿈을 다시 되새기게 됐죠.
김재범 저는 순간 이동이요. (웃음) 연습 끝나면 순간 이동해서 집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 맨날 이런 생각해요. 사실 뭐, 제 꿈은 하나죠. 인정받는 세계적인 배우가 되는 거. 그런데 일단 언어도 안 되고.
강필석 같이 시원스쿨에 등록할까? (일동 웃음)
김재범 세계적인 배우가 되든 안 되든, 저는 정말 좋은 배우로 남고 싶어요. 나라를 바꾸겠다는 김옥균의 꿈에 비하자면 보잘것없지만, 이게 저한테는 가장 큰 꿈이에요. 그런데 말이 될지 몰라도 김옥균이 꿨던 꿈은 어떻게 보면 큰 꿈이 아니에요. 김옥균의 소망은 국민이 우선인 나라가 되는 거였잖아요. 근데 그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뮤지컬 한 편이 대단한 변화를 만들어낼 순 없겠지만, 저희 이야기가 관객분들의 가슴속에 작은 울림을 남기길 바라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6호 2016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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