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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REVIEW] <도리안 그레이> [No.157]

글 |정수연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겸임교수 사진제공 |씨제스컬쳐 2016-10-11 6,152

유미주의의 ‘유샤품’에 주의하세요

<도리안 그레이>




‘오로지(唯)’와 ‘아름다움(美)’       


<도리안 그레이>를 이야기할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유미주의. 예술사조로서의 유미주의를 설명하자면 구구절절 길어지겠지만 그건 유미주의의 취지에 맞지 않는 흉한 짓일 테니 관두자. 유미주의가 무엇이냐. 아름다움이 최고의 가치임을 역설하는 미학적 세계관 아니던가. 유미주의의 기준에서 보자면 아름다움이란 머리로 알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껴 감각하는 것이니만큼 지리멸렬하게 설명하기보다는 쌈빡하게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움의 가치를 보여주는 왕도일 거다. 유미주의가 예술지상주의와 연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 모순이 있다. 어떤 것이든 ‘주의’가 되는 순간 그것은 언어의 설명을 요구하고, 언어의 옷을 입는 순간 생생한 경험은 추상적 개념으로 변모해버리기 때문이다.


<도리안 그레이>만 해도 그렇다. 소설의 내용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건만 소설의 언어는 관념적인 개념으로 가득 차 있다. 언어를 이미지로 번역하는 건 독자의 몫이겠지만 <도리안 그레이>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기보다는 아름다움을 내세운 세계관의 싸움처럼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이 유미주의의 또 다른 특성이라는 게 재미있다. 원래 아름다움은 예술의 본질이지만 그 앞에 ‘오로지’란 단어가 수식어로 붙는 순간 아름다움은 진리와 중심을 자처하는 기존의 가치에 대한 저항이자 도발로 그 얼굴을 바꿔버리게 되는 거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을 억압하는 모든 것과의 싸움. 빅토리아 시대에는 윤리와 도덕이 그 싸움의 대상이었다.


<도리안 그레이>의 이야기에서 양심과 도덕의 지분이 큰 것은 이 때문이다. 타락과 몰락을 자처하면서까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청년이 맞서 싸워야 했던 상대는 바로 당대의 윤리와 도덕인 바. 그런데 이 작품의 결론이 좀 의외다. 언뜻 도덕의 승리처럼 보이니 말이다. 이 작품이 유미주의의 대표적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언뜻 도덕극을 연상시키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기를 괴롭히는 양심을 없애려다 도리어 자기 자신이 소멸되고 마는 청년의 말로에 대해 해석은 분분했더랬다.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이런 도덕적인 결론을 낸 것은 전적으로 자기의 실수라고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당시에 유행했던 심미적 가치관을 회의적으로 생각했던 작가의 고민이 담긴 것 아니겠냐는 의견도 적지 않다. 당대의 윤리적 감각에 타협하는 척하면서 끝내 자기의 생각을 밀고 나가려는 작가의 페이크냐, 아니면 지금까지의 심미주의를 성찰하는 작가의 자기반성이냐, 같은 작품에 대한 해석은 정반대를 향한다.


뮤지컬로 만들기에 <도리안 그레이>는 여러모로 까다로운 텍스트이다. 시각 예술로 장르를 변환하려면 이 작품의 관념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고 이 작품의 결론은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주제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려운 지점은 아름다움이라는 절대적인 개념을 어떻게 감각의 영역으로 풀어내야 할지, 하는 점이다.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건 행복하지만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건 고통스러운 법. 아름다움은 고통 위에서만 제 모습을 찾는다.   




아름답지 않다                          


하지만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는 아직 아름답지 않다. 아름다움보다는 오히려 고통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보는 게 맞을 거다. 공연의 흐름은 전체적으로 뻑뻑하고, 공연의 대사는 생경하도록 관념적이며, 공연의 사건은 연결고리에 일관성이 없고, 공연의 영상은 다른 의미의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며, 공연의 음악은 시종일관 불편하도록 심각하다. 원작을 반영한 이야기의 만듦새는 원작을 향한 충실함이라기보다는 소화되지 못한 미숙함으로 다가올 뿐이고, 군데군데 원작을 바꾼 모양새도 원작을 씹어 되새겼다기보다는 도리어 원작을 갉아먹고 있는 형국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이 모든 현상의 근본에는 역시 해석의 문제가 깔려 있다.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에는 원작을 매만지려는 성실함이 보일 뿐 해석의 시각은 보이지 않는다.    


이 공연의 주된 분위기가 단순한 도덕극으로 흘러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원작에는 그럴 만한 요소들이 다분히 깔려 있다. 오스카 와일드가 실수라고 말하든 말든 간에 결론은 분명 도덕적이니까. 하지만 이것은 아름다움의 패배라기보다는 아름다움의 퇴화에 대한 작가의 고민일 터다. 도리안 그레이의 타락과 몰락을 통해 그저 예술의 도덕극을 완성하려 했다면 이 작품에 유미주의의 대표작이라는 명성이 주어졌을 리 없을 테니 말이다. 혹시 이번 공연이 도덕극처럼 보이는 외양에 숨겨진 유미주의의 고민을 담아내고자 한 건 아닐까? 그랬다면 쾌락과 아름다움을 대변하는 헨리와 도리안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했을 거다. 헨리는 입으로만 쾌락을 말하는 인간이고 도리안은 생각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인간(내 말이 아니다. 원작에서 그랬다. 도리안은 “머리가 없고 아름답기만 한 존재”라고)이 아니던가. 이 둘을 어떻게 그려내느냐에 이 공연의 해석이 방향을 잡게 되는 거다.


그런데 이 두 인물을 보자면 이 공연의 관심은 진짜 도덕극에 있는 듯 보인다. 원작에 없는 가상의 인물 샬롯을 설정한 데서 이런 심증은 더 굳어진다. 샬롯은 시빌의 여동생이고 헨리와 잘 알고 있던 사이인데 언니처럼 도리안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헨리가 도리안을 비난하게 된다는 설정. 샬롯이라는 캐릭터는 헨리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극적 설정이겠지만 이건 너무 진부한 도덕 교과서다. 죄책감에 회개하는 유미주의자라니. 도리안도 마찬가지다. 헨리에게 비난받은 후 자기의 목을 그어버리는 도리안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완벽한 인간을 꿈꿨던 조물주의 계획대로 만들어진 존재이지만 조물주의 뜻과 어긋나는 순간 버림받는 괴물 신세가 돼버린 셈이다. 자기의 영혼을 팔아서라도 아름다움을 붙잡으려 했던 주인공이 이렇게 수동적으로 그려져도 되는 걸까. 도리안 그레이의 유미주의가 프랑켄슈타인의 도덕극으로 옷을 바꿔 입어버렸다. 안 예쁘다.



오로지 남은 것은 하나              


모호해진 유미주의의 자리에 남은 아름다움은 오로지 김준수의 몫이다. 팸플릿에서도 초상화에서도 영상에서도 정말 돋보이더라. 외모로 보자면 김준수는 도리안 그레이의 역할을 부족함 없이 해낸다. 유미주의 대신 ‘유샤(唯XIA)주의’가 힘을 발휘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것이 배우를 위해서나 작품을 위해서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초상화에 갇혀버린 도리안처럼 배우 또한 자기의 틀에 갇혀버리기 쉽고, 무엇보다 작품이 던지는 질문에 창작의 이름으로 내세우는 답이 너무 쉬워지기 때문이다.


이 공연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 이것이다. 작품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벽을 마주했을 때 새로운 길을 내기보다는 언뜻 자기 복제처럼 보일 만큼 익숙한 자기 방식의 서사와 그림으로 되돌아가는 건 실망스럽다. 도리안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고비 고비마다 <더 데빌>에서 본 것 같은 선악의 대결과 흑백의 그림이 펼쳐지는 식이다. 선과 악의 문제에 대한 연출가 이지나의 천착은 이해하지만, 오스카 와일드가 도덕적 결론의 외양에 숨겨놓은 아름다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으로는 너무 성급한 이분법이 아닐까. 아무래도 연출가로서 이지나의 장점은 서사의 구축보다는 미장센의 만듦새에 있나보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는 그것조차 의외다. 특히나 1910년대 연쇄극이나 노래방 배경 화면을 연상시키는 직설적인 영상의 활용에 고개를 갸웃거린 게 여러 번이다. 도대체 왜? 


아름다움은 본래부터 전위적이다. 아무리 억압해도 어쩔 수 없이 배어 나오는 인간다움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억압이 있는 곳에서 아름다움은 언제나 인간다움을 향한 싸움의 무기였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님을, 밥만 있으면 된다고 윽박지르는 시대의 무례를 향해, 선언하는 것이니. 한 철학자가 말한 대로 인간을 구원할 힘은 오직 아름다움에 있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의 전면에 있는 예술가는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아름다움을 고민해야 할 터. 유미주의라는 사조 때문이 아니라 정말 아름다움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7호 2016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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